밤새 달린 것 치고는 정신이 생각보다는 제법 말짱했다. 안 달리던 놈이 달린다고 걱정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무색하게도 말이지. 다만 세상이 나를 빼고는 모두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태양이 도니까 푸르스름하게 새벽이 오고, 지구가 도니까 개찰구까지 걸어가는데 5번은 넘어졌다. 까인 얼굴과 깨진 무릎이라는 상황은 인지했지만 묘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삐빅, 하는 소리로 개찰구를 통과한 다음 계단이란 이름의 언덕은 무슨 정신으로 넘어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지하철이 오자 행선지는 보지도 않고 잡아탔다. 첫차 탑승자의 특권이라면 누가 뭐라 해도 좌석에 그대로 눕는 것이라. 누가 LTE 세대 아니랄까봐 말짱한 줄 알았던 정신은 머리가 닿는 즉시 암전됐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디 평범한 꽐라 대학생의 지하철 진상 짓이겠지만, 그래도 이 사실을 굳이 이렇게 일기에 적는 이유는 거기서 꾼 꿈이 하도 생생하고 또 요상해서이다. 꿈속에서 나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젠장, 꿈속에서조차 말이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게 나쁘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유럽스러운 어느 나라의 의대생이었기 때문이다. 의느님, 아아 의느님. 덕분에 꿈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지만. 다만 문제가 있었다. 시대가 요상했다. 아무래도 의사를 지망하는 사람이니 만큼 허구한 날 보는 것이 사람 죽는 꼴이었다. 그러니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같았는데, 죽는 이유가 좀 더 고전적이었다. 아니, 전 근대적이라는 표현이 옳았을까? 확실한건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고 수혈도 없이 피를 한 바가지를 뽑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따라다니는 불행은 내게 꿈에서조차 요상한 아르바이트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밤중에 근교의 공동묘지에 가서 생긴 지 얼마 안 된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팔아먹는 짓 말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거 한 10 번만 하면 이번 달에는 월세를 낼 수 있겠지.’ 라는 죄책감 제로의 무책임한 즐거움만 떠올리면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불쾌감은 그저 군대 - 어째서인지 군대에 관한 기억은 이 18세기스러운 세계관에서조차 변하질 않았다 - 에서 했던 삽질을 꿈에서조차 한다는 부분에서만 치밀어 올랐다.
툭, 하고 삽 끝이 관에 닿는 소리가 들리고, 남은 흙을 정리하고 나니 소도둑놈같이 생긴 시체장사들이 관짝을 열어 시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흠칫 놀랄 만도 하건만, 나나 그쪽이나 익숙해서인지 별 말 없이 액수만 불렀다. 액수가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그렇게 좋은 값은 아니기에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너 이새끼, 니 선배들까지 엮어서 인생 조져주랴?’ 그래봐야 그쪽은 갑이고, 이쪽은 을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새벽 내내 파헤친 것으로는 사나흘 먹을거리만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돌아오던 길에 소매치기 당했다. 난생 처음 화가 나서 잠에서 깼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화를 낼 차례였다.
"다음 역은 소사, 소사역입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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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화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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