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소희가 날 좋아한 것이.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고백받는다는 것은 분명 기쁘고, 설레는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손끝에 맴돌았다.
- 저희는 자리 파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먼저 들어가볼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아."
문득 확인한 폰에는 수영이의 톡이 와있었다.
잔뜩 분위기가 뒤숭숭한 채로 끝났을 수영이 쪽을 생각하니 그제야 잊고 있던 미안함이 몰려왔다.
- 다시 들어가보려고 했는데... 다들 헤어졌어? 오늘은 나때문에 미안해.
다음에 볼때는 진짜 재밌게 놀자.
"하아."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소희의 감정... 수영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내 감정까지.
온갖 것들이 내 속에서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어지러운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마침내 집 앞 놀이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도저히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그네들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홀린듯이 미끄럼틀과 그네에 앉아 사색에 잠겨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소희가 나를 좋아한 것은.
차라리 장난이었다고, 지금이라도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깔깔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희의 반응을 돌이켜보면 절대 장난일 리 없다고 생각한다.
생전 나조차 처음보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런 진지한 소희의 모습이 장난이었을 리 없으니까.
은소희가 나를 좋아한다. 그러면 이현우 너는 어때?
소꿉친구로서 소희라면 누구보다 좋아한다. 여자로서는?
모르겠다. 단순히 좋다 싫다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소희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주어야할까?
역시 모르겠다.
"하아..."
"무슨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어? 땅 꺼지겠네."
순간 소희 같은 말투에 흠칫 놀라 뒤를 보니, 소희 대신 서있는 것은 소민이였다.
"소민이냐..."
"뭐야 형. 그 미지근한 반응은?"
평소라면 보자마자 소민이를 잔뜩 귀여워(?)해줬겠지만, 오늘은 영 내키지 않는다.
"무슨일 있었지?"
"응?"
"있네. 있어."
소민이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 일은 무슨. 그건 그렇고 너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애가 이렇게 혼자 돌아다녀도 되는거야?"
"나야 뭐 건강하지! 건강빼면 시체라고."
"깁스한 다리로 잘도 그런 말 한다."
소민이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남매는 항상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재주를 가졌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데 형. 누나도 그렇고... 나한테 다 말해봐."
"소희가? 아, 집에 들어갔어?"
"들어오자마자 그런 누나는 처음이었다고... 딱 봐도 오늘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싶더라니까."
설마 눈물을 흘리며, 잔뜩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왔다던가...?
"문도 쿵쿵 닫고 잔뜩 화가 난 것 같아서, 방에서 혼자 뭘 부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소희가 울고불고 질질 짤리가 없지. 이럴 때 마저 당당하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아. 그러니까... 소민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소민이에게 툭 털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늘어놓았다.
마침내 소희가 짜증 가득한 고백을 내뱉던 부분에서 소민이는 '맙소사!'하고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형도 진짜 큰일이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내가 눈치가 없다니?"
군대에서도 눈치로 먹고 살던 사람인데!
"아니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여자에 대해서만 이렇게 둔할 수가 있는거야?
이러고도 여자친구는 잘 만나온 거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
"형 진짜로 우리 누나가 형 좋아하는 거 몰랐어?"
진짜 몰랐는데요...
"어."
"내가 아니어도 그렇게 누나가 눈치를 줬는데도?"
"..."
"세상에 이 형 좀 봐라? 형! 우리 누나가 형 말고 다른 사람한테 쿠키니, 음식이니 요리해주는 거 봤어?"
"저번에... 소희가 우리 과실에 놀러왔을 때?"
"아오, 그건 형이 있으니까 그런거고, 나랑 형빼고 다른 남자한테 해주는거 봤냐고."
그러고보니, 없는 것 같다.
"그게 아니어도 참... 형처럼 남자를 편하게 대하는 경우도 없는데..."
"나야, 소꿉친구니까 그렇다고 생각했지."
"소꿉친구여도 그렇지, 곰곰이 생각해봐, 우리 누나가 형한테 외모적으로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잖아. 소꿉친구한테 굳이 그래야할 이유가 있나?
좋아하니까 그런거지. 여자가 매번 그렇게 치장을 하고 누굴 만나는 건 굉장히 정성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고."
소민이 얘기를 듣고 있자니 할 말이 없다.
구구절절 다 맞는 소리니까. 그러고보니 대강입은 소희의 모습을 본 기억이 어렸을 적부터 한 번도 없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긴 아주 오래 전 부터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중간 중간 남자친구도 잘 만났던 것 같은데..."
"그야, 그건 우리 누나의 소심한 복수랄까. 형이 여자친구가 생기니까.. 말도 못하고?
물론 하나도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애초에 우리 누나를 조금이라도 쪼잔하고 소심하게 만드는 건
세상에 형 하나밖에 없단 말이지."
그래서였나. 소희가 유독 연애를 해도 길게 못가고 금방 금방 헤어졌던 건?
매번 벌써 헤어졌냐는 물음에 '질렸어~'라고 해맑게 답하던 소희의 모습 뒤에는 그런 면이
숨겨져 있던 걸까.
소민이와 얘기를 하고 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뭐랄까... 갑갑한 것 조금 나아졌지만, 보이지 않는 부담이 조금 생겼다고나 할까.
"어찌됐든 누나가 형한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상 언젠가 이런 날이 올줄 알았지."
"하아."
"솔직히 말하면 난 형이 우리 누나랑 사귀었으면 좋겠어."
"?"
"늘 말했듯이 나한테 매형이 생긴다면, 형밖에 생각나지 않으니까?"
배려심 많고 한 편으로는 유약해 보이는 소민이었지만, 이럴때는 제 누나와 남매 아니랄까봐 똑 부러진다.
항상 당당하고, 밝게 빛나는 뭔가가 느껴진다.
"이만 나는 들어가볼게. 누나나 내가 당장 어떻게 말해도 없던 감정이 생기는 건 아닐테니까.
그래도 우리 누나만한 여자도 없어. 성격이 좀 괴퍅해서 그렇지. 형이 누나를 거절한다고 해도
원망같은 건 안하니까, 다만 많이 고민하고 고민해서 누나에게 대답해줘."
"다리는 아픈데, 부축해줄게."
"됐어. 형은 여기서 고민 좀 많이 하고와. 같이 가다 누나한테 걸리면 쁘락치 소리 들을까 겁난다."
얘는 언제 이런 말을 배워서는.
혼자 용케 집으로 들어가는 소민이가 사라지고 그대로 그네에 주저 앉는다.
그렇게 하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