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훌쩍 키가 컸음에도 흔치 않게 여성의 선이 완연했으며, 행동거지와 스타일, 말씨 등 모든 행위에는 내 또래는 물론이고 오늘날 극히 드물어 찾기 어려워진 우아함이 가득했다. 그녀의 그러한 모든 것에 마음이 뺏겼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건 한 차원 높은 선함을 지닌 깊은 눈빛에 있었다.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악의보단 선의를 먼저 보는 만큼 내 주변 이들 거의 모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량하다 여긴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들의 선함은 특별한 장점이 아닌 평범히 정제된 태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요컨대 나는 성선설자인 것이 아니라 그저 대개의 발화를 호의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그것이 편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 발화들의 의도도 보통은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선하다는 것이 누군가의 특별함이 되려면 평범한 선량함, 즉 사회적 예의와 일반적인 배려를 초월하여 상대방의 근원에 도달해야 한다. 그 사람의 말과 글은 그러한 진심과 상대방의 평안을 온전히 바라는 태도가 담겨있었으며, 또한 (최소한 동류로서의 동질감으로부터 비롯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 점에서 그 사람은 확실히 특별했고,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실 분명 그보다 미인인 이들도, 보다 구김없이 건강하고 긍정적인 여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을 안 이후로 그녀는 항상 내게 있어 여성의 최고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수년 간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신곡> 또는 <데미안>의) 베아트리체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사모했다. 하지만 이것이 로맨틱한 감정인 것은 단연코 아니었고, 외려 여신숭배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녀의 말은 내게 신탁과도 같았으며, 한동안 나는 그 신전을 지키는 사도가 된 느낌에 젖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일련의 감정은 베르터(베르테르)보단 단테의 그것에 가까웠던 셈이다. 하지만 신탁이란 쉬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동안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의 신전은 점점 낡아갔다. 다만 으레 그렇듯 그런 과정이 내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건 그저 무채색적인 나에게 잠시간 와준 달콤한 착각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간과한 것, 아니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녀 역시 내 또래의 젊은 여성 중 한 명일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범용히 여기는 평범성을 그녀 또한 지니고 있을 것이며, 내가 발견한 특별함이 결코 그 사람의 전부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실은 그 사람은 별 것 아니었다’라는 식의 폄하는 결코 아니다. 단지 내가 실제로 사모하는 것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됐을 뿐이다. 내가 사모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한 베아트리체였다.
그것을 깨닫고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움에 틀림없다. 여전히 내개 실재하는 여성의 최고점은 변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만난다 한들 이전과 같은 떨림과 설렘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고, 착각 속의 사제 노릇도 그만 두게 될 터이다.
이제 나에게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이 발견했다 믿고 있는) 그 특별함이며, 그것이 얼마만큼 진실인지도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요컨대 남겨야 할 것은 현실의 그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향한 선망이다. 플라톤주의자로서, 짝사랑 상담에 으레 따라 붙는 ‘너의 감정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 상상에 불과하다’는 말들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남겨둘 것이 있다면 어쨌든 그것 역시 분명한 진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