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태어나 처음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협재의 바다도 곶자왈 숲도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똥별도 아름다웠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내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노지’라는 개념이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날 저녁, 흑돼지를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한라산 소주 한 병 주세요, 라는 내 주문에 종업원은 ‘노지로 드릴까요, 찬 거로 드릴까요?’라고 되물었다. 노지라니? 잘 모르겠으니 일단 차가운 걸로 달라고 했다. 숙소에서 ‘노지’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이슬 로에 땅 지. 이슬이 드는 바닥을 뜻하는 노지는 냉장고가 아닌 야외에 보관한 미지근한 소주를 부르는 애칭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제주도에서는 노지를 마시는 거지.
이튿날 곶자왈 숲에서 한가로이 귤을 까먹으며 노지에 대해 생각했다. 술과 음료는 대부분 차게 마실수록 시원하고 편해지며 미지근하게 마실수록 향이 풍성해지고 강해진다. 수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귤도 마찬가지다. 냉장고에 보관한 귤은 잘 상하고 향도 약해진다. 하지만 소주는 음식과 함께 편하고 기분 좋게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지 향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지 않은가? 비취빛 바다를 구경하고 바닷가에서 갈치조림을 먹으며 노지에 대해 생각했다. 술 본연의 향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곁들여 먹는 음식의 향미가 가벼워야 한다. 하지만 눈앞의 갈치조림이나 어제의 돼지고기, 그리고 제주도 해산물의 향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왜 노지인가. 초가을 제주도의 밤은 약간 쌀쌀했지만 서울보다 따듯했다. 맑은 하늘로 별똥별이 떨어지고는 했다. 그런데 왜 밖에다 소주를 보관해서 굳이 미지근한 소주를 마시는 것일까. 물론 동유럽 사람들도 동유럽 소주인 보드카를 상온에 보관해서 마시지만, 거기는 추운 나라고 제주도는 따듯한 곳인데.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노지의 근원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지가 더 맛있다’는 속편한 이야기 말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찾기 힘들었다. 더 정교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술꾼이자 바텐더고, 노지는 내 제주도 여행의 중요한 질문이 되었으니. 인터넷을 뒤지고 여기저기 질문을 남기고 제주도 출신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왜 제주도에서는 노지를 마시지? 답은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노지는 제주도의 식문화와 상관이 없었다. 노지는 섬 특유의 물자 부족에 기인한 ‘조냥정신’이라는 절약 정신과 관련된 것이었다. 전기가 모자란 옛 제주에서 술을 냉장고로 차게 마시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고, 그로부터 미지근한 술에 대한 예찬이 발생했고, 그것이 전통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여러 다른 이론도 있었지만. 내 생각에는 이게 가장 합리적인 이야기 같았다.
나는 친구들과 손님들에게 제주도 여행 이야기를 하며 나의 ‘노지의 근원을 찾는 여정’이라는 또 다른 여행에 대해 떠들어대곤 했다. 한 친구는 ‘제주도까지 가서 술 생각만 하다 왔냐? 마음을 비우고 평온하게 여행을 즐기지.’라고 이야기했다. 글쎄. 노지가 아니었어도 협재의 해변은 찬란했을 것이고 곶자왈 숲은 평온했을 것이며 제주도의 가을밤은 따뜻했을 것이다. 갈치조림과 흑돼지도 맛있었겠지. 하지만 노지에 대해, 나의 일에 대해 고민하며 바라본 바다와 숲과 밤에는 나만이 아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여행에서 평온을 찾기에 나는 아직 어리다. 다음에 언제 어디를 여행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음 여행에서도 술을, 나의 삶을 고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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