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평(中平) 원년(184년),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張角)이 위군(魏郡)에서 봉기하여, 신령(神靈)이 있음을 칭탁하며, 팔사(八使)를 보내 선한 도로써 천하를 교화하게 하고, 숨어서 몰래 서로 연결하며, 스스로 황천태평(皇天泰平)이 칭하였다. 3월 갑자일, 36만의 무리가 하루아침에 모두 일어나니 천하가 소리 내어 호응하고, 군현을 불태우며 장리(長吏)들을 살해했다.
한(漢)에서는 거기장군(車騎將軍) 황보숭(皇甫崇)과 중랑장(中郞將) 주준(朱儁)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격파하게 했다. 주준이 표를 올려 손견을 좌군사마(佐軍司馬)로 삼을 것을 청하니, 향리의 젊은 사람들로 하비에 따라와 있던 자들은 모두 손견을 따르기를 원했다. 손견 또한 여러 상인 및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역의 정병을 모집하니, 합쳐 천여 명이 되었고, 주준과 함께 힘을 합려 분격(奮擊)하니,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다.
- 손파로전(손견전) -
정보의 자는 덕모(德謀)이고 우북평(右北平)군 토은(土垠)현 사람이다. 처음 주군(州郡)의 관리가 되었는데 용모와 계략이 있고, (사람들에게) 응대를 잘하였다. 손견이 정벌하는데 따라가, 완(宛)현과 등(鄧)현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양인(陽人)현에서 동탁을 격파하였으며, 성을 공격하고 야전을 치루느라 몸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 정보전 -
한당(韓當)의 자는 의공(義公)이요 요서(遼西)군 영지(令支)사람이다.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하고, 힘이 세어 손견에게 총애를 받았고, 정벌에 따라 두루 돌아다녔으며, 수차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적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 한당전 -
황개의 자는 공복(公覆)이며, 영릉(零陵)군 천릉(泉陵) 사람이다.
처음, 군의 관리가 되었는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공부(公府)에 불려갔다.
손견이 의병을 일으키자, 황개가 이를 따랐다. 손견이 남으로 산적(山賊)들을 격파하고, 북으로 동탁을 패주시키면서, 황개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배수했다.
- 황개전 -
===================
이상의 관련된 열전을 살펴보면,
정보/한당/황개의 손견군 합류 시점은 184년에 장각이 황건의 난을 일으키자 손견이 주준의 부름을 받아 초모하여 합류하게된 것이 분명한데, 정보와 황개는 관리로서 손견군에 배속된 것으로 보이지만 한당의 경우 북방지역인 요서군 사람으로 북방사람이 남방으로 와서 손견의 부하가 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사실 당시엔 거주지 이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요즘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신분증도 있어서 고향을 이탈할 수 없었다. 관료의 경우를 제외하면 관우나 태사자 등의 경우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둘다 법을 어겼기에 처벌을 피하고자 망명한 것이 열전에 보인다.
한당은 위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 거주지를 이탈한 것에 대해 가설을 세워보면,
1. 북방의 강자인 흉노족은 이미 권력쟁취로 인해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어 북흉노는 서북 지역으로 기반을 옮겼고 남흉노는 후한 정부에 복속되어 사례, 병주, 기주 지역 등에 잡거하던 상황이었고 그들이 원래 통치하던 지역은 선비족이 점거하였다. 한당의 고향인 유주 요서군 지역은 북방 이민족인 선비족이나 오환족의 침탈로 고향을 이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 황건 세력의 봉기에 의한 원인이나 결과로 그랬을 가능성.
3. 후한 정부 정치의 문란으로 지방에서의 수탈로 인해 유민, 도적, 이탈자 발생의 가능성.
위의 가설중 하나 이상의 원인이 해당된다고 생각함.
p.s 연의에서의 손견의 4천왕중 조무는 사실 단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