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면 시작되는 새 학기는 2학기의 시작인 9월과는 다르게 활기찬 맛이 있었다.
그게 따사로운 봄볕 탓인지 아니면, 새로 들어온 새내기들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새 학기의 활기는 나와는 전혀 관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나이는 먹을대로 먹어버렸고, 봄이오면 개강한다는 것이 나에겐
별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단 나만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누가 새내기이고
누가 헌내기인지 구분하는 것은 매운 쉬운 일이었다.
개강의 첫 날에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혹은 따분한 표정으로 제 갈길을 바삐 가는 쉰내기 4학년.
아직 마저 빼지 못한 고딩물이 남아 있는, 이유 없이 설레고 좋아보이는 새내기 1학년.
그런 1학년들에게 어깨를 으쓱대고 있는, 자신이 호랑이인줄 아는 여우 2학년.
4학년을 보며 다가올 압박감에 조금 무거워 보이는, 매너리즘에 빠진 3학년까지.
2.
개강 첫 날에 가장 먼저 간 곳은 과실이었다.
쉰내기로서는 근처에 가기만 해도 새내기의 재잘대는 소리가 가득한 그곳에 발을 들이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잠시 휴학한 사이 내 사물함이 갈려(?)버렸으니.
개중에는 아직 필요한 전공서적이 있어서 꼭 찾아야 했다.
나름 과회장과는 친분이 있어 사적으로 전화해보니 회수해가지 않은 서적들은 모조리
과실에 모아두었다고 했다.
속으로 부들부들 거리며 과실 문을 열어 젖히자, 갑작스레 정적이 찾아왔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제, 제발 마저 떠들던대로 떠들어! 부탁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나인데, 어째서 이 순간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3.
안녕하세요!
속으로 뜨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의 인사를 시작으로 인사 파도타기가 이어졌다.
정신 없이 새내기들의 인사를 받고나자 나의 멘탈을 그로기 상태에 빠져버렸다.
헤롱헤롱.
과생활을 나름 열심히 했던 나로서 사실 딱히 새내기들이 불편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기는 개뿔, 매우 불편하다.
도대체 얘네랑 나이차이가 얼만지... 한 손으로는 셀 수도 없었다.
역으로 내 위에 이 새내기들과 나이차이가 나는 만큼의 선배들을 생각하자
등줄기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뜨악. 정말 얘네가 보는 나는 그냥 아저씨다. 아저씨.
나도 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구나 싶어 조금 우울해졌다.
나도 이런 상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스무살엔 정말 나도 상큼했으니 따지지말자.
4.
여차저차 내 책을 가방으로 주워담고 나가려던 찰나
과실에 들어서서 정적을 깨고 가장 처음 인사한 여자애에게 시선이 꽂혔다.
희고 예쁘장한 얼굴에 눈도 땡그랗게 크고, 쌍꺼풀도 짙었다.
새 학기를 맞아 염색한 치렁치렁 긴 갈색머리가 얼굴과 꽤 잘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완전 내 스타일인걸.
미친놈. 지금 애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과실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저런 새내기 여자애와 쉰내기인 내가 다시 만날 접점따위는 없을 것이다.
오늘 하루 보고 어쩌다 학교에서 오며가며 마주칠까 말까겠지.
5.
3월임에도 불구하고 개강 첫주는 꽤 쌀쌀한 편이었다.
첫주의 수업들은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금방 끝난다.
새내기들은 이쯤이 피크다. 본인의 의사인지 아니면 어깨에 힘이 잔뜩들어간
호랑이인줄 아는 여우들의 부채질인지 대부분 오리엔테이션을 빼먹고
선배와 혹은 동기와 하하호호 놀러 나갔다.
사실 나도 무진장 첫 주는 떼 먹고 그냥 쉬고 싶었지만, 왠지 등록금이라는 칼이
양심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아서 꼬박꼬박 첫주부터 출석에 임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은 것은 수요일의 어느 강의실에서 였다.
6.
어?
일전에 과실에서 봤던 완전 내 스타일이던 그 새내기가
내 수업이 있는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와 나는 같은 수업이었다.
어? 안녕하고는 강의실 중간쯤에 앉아있는 그녀를 지나
맨 앞자리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필기구와 공책을 자리에 앉아 꺼냈지만,
마음은 굉장히 동요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아니면 인연인가.
라고 까지하면 너무 거창하겠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만큼이나
동요했었다.
몰래 슥 고개를 돌려
옆 자리의 동기들과 재잘재잘 떠들어대고 있는 그녀를 훔쳐봤다.
다시봐도 어떻게 봐도 내 스타일이었다.
오 신이시여.
내 안에서는 맹렬한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라도 되는 것 마냥
치열하고 격렬했다.
7.
악마 : 꼬셔버려 확.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래 맞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데 나이가 어디있어.
천사 : 안돼. 제발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쟤는 이제 막 고딩티를 벗어난 새내기란 말이야! 그런데 너는 어때?
시무룩... 맞아 나는 이제 졸업을 앞 뒨 쉰내기지.
악마 : 졸업이면 어때! 완전 니 스타일이잖아. 뭐라도 안해보면 두고두고 후회할껄?
음 맞는 말이야. 일리가 있어.
천사 : 들이댄다고 다 되니? 괜히 쪽팔리러 차이고 과내에서 로리라고 소문나지 말고 자제해.
큭. 뼈아프다. 그래 이제 졸업이 코앞인데 괜히 우리 과의 고영욱을 자처할 필요는 없겠지.
악마 : 개소리하지마! 남자라면 직구! 돌직구다 어서 가슴이 시키는대로 해!
천사 : 공부나해! 공부나. 너 같으면 같은 과랍시고 모르는 아줌마가 와서 들이대면 안부담스럽니?
빠 빠밤 빠 빠밤 빠바바밤.
그래 결심했어!
8.
일전에 내가 아는 형이 이런 말을, 아니 정확히는 그 형의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모름지기 남자는 10세부터 100세까지 스무살의 여자를 이성으로 본다.'
정말 명언아닌 명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슨소리하냐고? 그래 나 지금 자기합리화한다.
욕해도 좋다. 뭐라고 하든 완전히 내 스타일인 저 새내기에게 들이대기로 결심이 섰다.
들이대다가 까여도, 이상한 소문이 난다고 해도 지금 눈앞에 있는 유혹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연애의 마성이란 게 보통 그런 것이니까.
9.
따사로운 봄 날. 싱그러운 새 학기시즌.
뭔가 있어보이는 군필 선배.
얼마나 새내기를 꼬시기 좋은 조건인가!
선배의 권력을 이용해 새내기의 전화번호를 강탈하기란
어찌나 쉽던지 치느님에 맥주 넘기기보다 쉬웠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 아이에게 비춰지는 나는 그저 에이션트 드래곤... 고대의 유물
삼엽충 그 이상이다.
한낱 화석에 불과한 내가 이 아이에게 남자로 비춰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나는 네게 그렇게 멀기만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어필하기 위한 친분이 필요하다.
그래 잠깐이면 돼...
친분! 친분을 쌓자....
10.
동서고금 예로부터 사람과 사람간의 친분이나 신뢰따위를 쌓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선배로서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그림은 보기에도,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그림이
아니기에 같이 밥을 먹는 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클리어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있다. '단 둘이' 어떻게 밥을 먹냐는 것이다.
쓸데 없이 다른 혹을 줄줄이 달고 의심없이 밥을 먹으며 친분에 물꼴르 틀 것이냐,
아니면 단박에 단 둘이 밥을 먹자고 돌직구를 날릴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11.
쓸데 없이 병신같지만, 나로서는 등줄기에 땀이 주륵흐를 만큼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전자는 친분을 쌓더라도 그저 선배로써,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게 될 확률도 다분했다.
후자는 새내기가 부담을 느끼고 나를 회피할 리스크가 있지만, 확실하게 이성관계를 원하고 있다고 어필할 수 있었다.
'시간되면 밥사줄게 밥먹자.'
'아 그럼 혹시 제 친구랑 같이 가도 되요?'
어째서 이 놈의 새내기들은 밥을 사준다는데 제 혼자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걸까.
선배들의 지갑이 화수분도 아닌 것을.
어찌되었든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거 빠르고 간결하게 돌직구를 날리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설프게 선후배로 친해져봐야 패스트푸드다. 뭔 소리냐고? 영양가 없다고!
12.
'아니 단 둘이 먹고 싶은데?'
사실 연애는 꽤 많이 해봤지만, 매번 이런 순간에는 아이처럼
두근두근거리며 상대의 답장을 기다리게 된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도박을 하는 것 같기도하다.
이런 두근거림이나 설레임이 썸의 묘미겠지만.
답장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대로 이 아이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이며 거절한다면
깔끔하게 포기하자. 단순히 내 욕심때문에 이제 막 대학교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의 생활을 망칠 필요까진 없으니까.
는 개뿔. 제발 제발 제발! 너에게 닿기를!
제발 단 둘이 먹겠다고 해줘.
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왕이면
잘됐으면 좋겠다.
'음... 알겠어요 언제가 괜찮으세요?'
오우 지져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 참고로 난 무교다.
13......
은 나중에 마저 쓰도록 하겠습니다.
흑흑. 목이 땡기고 뻣뻣한 것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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