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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0/31 02:22:37
Name 月燈庵
File #1 사진.JPG (390.6 KB), Download : 48
Subject [일반] 신해철 에게 보내는 반성문.


정확하진 않지만 MBC FM에 <하나둘셋 우리는 하이틴> 이라는 유치 발랄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억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신해철 이라는 뭔가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남자 DJ가 있었단 사실을 기억 하시는 분들이 있을런지요.
그리고 그게 그의 생애 첫 DJ 로서의 발걸음 이었다는 것 역시.

무한궤도가 뭔지 몰랐고 우연히 돌린 라디오 채널에서 멋진 저음이 나오길래 처음에 일반 대학생 DJ 인줄 알았습니다.
그 미성이 어린 제게는 신기하기만 하여 하이틴도 아닌데 그 프로그램을 저녁 마다 방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이 사람이 대마초로 체포 됐다는 겁니다. 대마초? 세상에 그런게 있어? 그게 나쁜거야?
뭔지도 모르고 더이상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단 사실 하나가 슬펐습니다.
그렇게 슬퍼 하는 초등학생은 반 에서 저 하나 였습니다. 괜히 반 애들에게 말했다가 놀림만 된통 당했지요.

그렇게 잊혀질 무렵...웬 남자 가수가 하나 튀어나와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란 곡으로 가요톱텐을 비롯한 챠트를 휩씁니다.
이 가수가 그 때 그 DJ 였단걸 막 스타가 된 시점, 신문 기사를 읽고 알았습니다. 
충격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반가웠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 사람 fan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제 팬으로서의 행보는 길지 않았습니다. 
1997년 12월 31일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넥스트의 해체 공연을 기점으로 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치가 떨리는 배신감,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많은 팬들이 각자의 길로 흩어졌거든요. 
이렇게 폭발적인 애증을 한 몸에 다 받아낸 뮤지션이 과연 한국 음악 역사에 얼마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아무튼 저는 배신감 이라는 후자의 감정으로 팬심을 차츰 덜어냅니다.

제게 최고의 신해철 앨범이 무어냐고 하면 주저 없이 <라젠카>를 꼽습니다.
넥스트의 해체를 발표 하면서 그가 했던 말은 오랫동안 회자 되었지요. "넥스트로 더이상 올라갈데가 없어서 해체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저는 이 말을 아직도 그의 음악적 재능이 라젠카로 정점을 찍고 내려옴을 선언 및 예견한 말이었다고 여깁니다.
당사자는 몰랐겠지만요. 그렇게 라젠카 이후 나온 앨범들은, 글쎄요, 사그라드는 팬심과 더불어 제 귀에 맴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이후 그의 행보와 발표한 음악들은 사실 잘 모릅니다.

안티와 논란을 항상 등에 지고 다녔던 그에게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는...누가 그러는데 "위악적" 이라고 하더군요.
최근 그에 대한 누군가의 회고 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심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언행은 거칠었고 문득 생각해보면 "뭐야 이거 완전 궤변이잖아!" 라고 할만한게 적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그에 대한 애정을 무관심과 냉소적 시선으로 바꿔가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팬심이 사라지고 제가 나이를 먹어가며, 또 그래도 일부 남아있는 애증의 감정 덕분에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 할순 없는 선에서.
그의 행보를 돌아보고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그가 이해가 되는 겁니다.

열혈팬을 자처 하던 어린 시절, 일반 인간 이상의 거대한 존재로 경외감 마저 들던 신해철이.
그냥 평범한 아저씨, 동네 선배, 누군가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아버지로 보이면서.
아하...결국 이 사람도 나랑 같은 아주 평범한 인간이구나.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자존심 강하고 성질도 보통이 아니지만, 돌아서면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저 실수투성이의 인간.

최근 출연한 <비정상회담> 에서 "난 그저 큐트한 아저씨" 라며 수줍게 웃는 그를, 20대 때 그리 사랑하다 미워하게 된 신해철을,  
이제 인간적인 연민과 이해가 담긴 편안한 마음과 시선으로 보게 되더군요.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요.
"그래, 이제 다 잊고 저 양반이 뭔 짓을 하던 지켜봐주자" 그렇게 마음 먹은지. 얼마 안됩니다.
그런데 그가 훌쩍 가버렸네요.
같이 늙어가는 처지 라며 이제 웃으며 "아이, 아저씨 왜 그래~" 편하게 말을 걸어보려 했는데...

오늘 그의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리고 어느 팬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해주신 저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거기 모인 분들과 함께 따라 부르며
그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마 제가 그를 따라갈 때 까지 속으로 끝없이 용서를 구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어렴풋이 직감한 순간 부터 갑자기 제 삶의 하나 하나가 거꾸로 테이프를 돌리듯 돌아가더라구요.

알고보니 신해철 이란 사람은 저 초등학생 때 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마치 당연한듯한 무게감 으로 제 사춘기와 청춘의 거의 절반을 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제 책장에는 그와 비슷한 정치적 성향의 책들이 가득 하고, CD장과 mp3 들은 90%가 Rock 입니다.
가까운 20년 지기들은 당시 넥스트 팬클럽에서 만난 사람들이구요.
오늘 저기서 따라 불렀던 곡들에서 그가 제시 했던 인생과 행복의 기준과 가치, 
그게 지금 제가 동생들과 후배들에게 말하는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좋든 싫든 제 삶의 대부분을 그에게 빚지고 의지 하고 살아왔네요.

이건 반성문 입니다. 
황망하게 갑자기 그를 잃고 나서야.
현재 이 시간이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내주기 몇 시간 전 이란 사실에 커다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가 내 삶에 항상 머물러 있었다는걸 매우 뒤늦게 깨달아버린 한심한 작자의 반성문 입니다.

저라는 사람이 여기 까지 오도록 이끌어준 아버지와 스승 같던 존재가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열정 가득한 삶의 막을 내렸습니다.

때론 절망 가득한 순간에, 포기 하지 말라며 아프지 말라며 특유의 성질머리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퍼붓던.
희망 이란게 얼마나 인간의 삶에 커다란 것 인지 끊임없이 강조 하던 그가 가버렸습니다.

내 청춘은 끝난지 한참 됐단 사실을 그의 죽음으로 이제사 체감 합니다.
그의 부재와 더불어 이 상실감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사실, 지금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다시 그와 같은 거대한 존재를 찾을런지 모르겠네요. 
그가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지금은 그저, 하얗게 질려버린 채로, 신해철 아저씨 미안해. 미안해. 그 말 밖엔 안나오네요. 마지막으로 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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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31 05:28
수정 아이콘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더욱 절실히 깨닫습니다.

더욱...
서윤아범
14/10/31 07:36
수정 아이콘
딱 제 마음이네요 해철이형 보고싶어요
류현진99
14/10/31 11:39
수정 아이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시대에 조응하고, 때로는 시대을 앞서갔고, 때로는 시대에 일갈했던 신해철의 팬이었다는게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따라다닐 겁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저는 신해철의 best 음반 3장은 myself live1991, next 2집 part 2, 정글스토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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