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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4/09 19:03:45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진격의 이성계
http://office.kbs.co.kr/cyberpr/wp-content/uploads/sites/44/2014/02/140207%EC%A0%95%EB%8F%84%EC%A0%84_%ED%99%A9%EC%82%B0%EB%8C%80%EC%B2%A9%EC%8A%A4%EC%BC%80%EC%9D%BC%EB%8C%80%EB%B0%951.jpg?width=60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에서 내놓은 『고려시대 군사전략』는 현직 대한민국 군 관계자들의 눈으로 본 전쟁사의 흐름을 다르고 있다. 이 단행본에서는 고려와 몽골의 대몽항쟁에 관련된 시기에 즈음한 고려의 '군사력' 에 대하여 극도로 부정적인 평을 내리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고려 조정은 신속하게 3군을 북쪽으로 급파하여 수성전을 벌이면서, 몽골군의 진격을 차단하고 있는 북계 요진에 부응하도록 했다. 고려의 전략은 고려 북방의 여러 성들의 전투력이 효력을 발휘하고 중앙군이 제대로 기동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이다. 하지만, 당시 고려가 북계로 급파한 삼군은 병력 규모나 전투 능력 면에서 이 전략을 수행하기에 역부족이었던 듯 하다.' pp. 227


'몽골 전쟁 당시에 삼군의 규모가 얼마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무신정권 이후의 군방력 수준이나 초적까지 동원하는 정황을 놓고 판단해볼 때, 당시 삼군의 규모나 전투 능력에 선뜻 신뢰를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고려의 북계가 돌파당하고 중앙군이 안북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것은 미약한 군사력으로 전략을 뒷받침 할 수 없어서 초래된 결과라고 보여 진다.' pp. 228



하지만 대신 백성을 이주시켜 행한 성곽방어에 대해서는 '30년의 몽골 침공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고 평할 정도로 이러한 이주 - 방어 전략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확실히 이러한 백성의 이동과 산성 위주의 방어전략은 몽골의 침입을 막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실제 당시 고려 조정, 즉 최씨 정권에서 자주 사용하던 방어 전략은 산성 방어 전략보다 한층 강력한 이주 정책이었다. 이는 바로 섬을 위주로 한 방어 전략으로, 해전에 약한 몽골군의 단점을 이용하여 섬에 백성들을 밀어넣어 방어 전력으로 삼고, 여기에 더해 본래 백성들이 살던 내지에는 청야 작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 터전을 모두 앗아갈 정도로 강도 높은 대책이었고, 이 과정 역시 극도로 폭력적이었다. 실제로 이에 대한 반발은 극심하였으나, 최씨 정권은 불응자에게 극단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기를 싫어할까 염려하여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보다 먼저 최항이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주민들을 모두 몰아서 섬 안으로 들어가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워서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ㆍ아홉은 되었다. ─ 고려사절요 1256년


○ 송길유가 경상주도 수로 방호별감이 되어 각 고을의 인물을 검찰(檢察)하여 섬으로 들여보내는데, 영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때려 죽이고, 혹은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은 다음 별초를 시켜 양 끝을 잡고 끌어서 깊은 물 속에 던져 거의 죽게 되면 꺼내고 조금 깨어나면 다시 그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절요 1258년


○ 고주(高州)ㆍ화주(和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의주(宜州)ㆍ문주(文州) 등 15주의 사람들이 저도(猪島)에 옮겨가 사는데,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저도는 성이 크고 사람이 적어서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드디어 15주의 사람을 옮기어 죽도(竹島)를 지키게 하였다. 섬이 좁고 우물과 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옮기려 하지 않으니, 집평이 강제로 몰아서 들여 보냈다. 사람들이 많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옮긴 자는 10명 중에서 2, 3명뿐이었다. ─ 고려사절요 1258년




그런데 고려 말기의 전쟁사에 대해 여러 시각을 보던 중, 한 석사 논문 중에서, 이와 같은 언급을 보았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와 같은 이전의 전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덕산동(德山洞), 함흥(咸興)과 같은 평야에서 나하추 군대에 맞서 승리하였다.' ─ 1362年 李成桂와 納哈出의 戰鬪, 강수정


 즉 이성계는 일반적인 방어적 전술을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회전에서 적극적으로 맞붙어 나하추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1362년 벌어진 이성계와 나하추의 전투가 야전의 형태였음은 사료의 묘사상 분명하다. 이성계는 방어 전략보다도 오히려 기동력을 이용해 수차례 나하추에게 기습을 퍼부어 승세를 가져오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달단동에서의 싸움은 한번의 회전으로 승패를 결정지은 사투였다.


 그런데 이성계의 전투를 보자면,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앞서 나하추와의 싸움에서 '이전의 방어 전술을 고려하지 않았' 다는 말처럼, 이성계는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이와 같은 형태로 밀어부쳤다. 이성계의 주요 전투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
  • 홍건적 침공에서 개경 탈환.
  •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 격파
  • 1364년 덕흥군, 최유의 군대 격파
  • 1364년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난 진압
  • 1370년 1차 요동정벌
  • 1377년 지리산에서 왜구 격퇴
  • 1377년 해주의 왜구 격퇴
  • 1378년 해풍 전투
  • 1380년 황산 전투
  • 1382년 호바투 격퇴
  • 1384년 함주의 왜구 격파
  • 1388년 위화도 회군, 개경 공성전




고려 말은 한반도의 남북으로 끊임없이 외적이 쳐들어오는 난세였다. 따라서 이성계의 거의 대부분에 전공은 방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국가 방어전' 을 주로 수행한 이성계가 실제로 수세적인 전술을 구사한 사례는 '전무' 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공세의 입장에서 공성전이었던 두 차례의 개경 전투, 그리고 1차 요동정벌과 해주 전투를 뺀 이성계의 주요 전투들에 핵심적인 묘사는 다음과 같다.


1. 박의의 반란 진압

太祖以親兵一千五百人赴之, 儀已率其黨, 逃入江界, 盡捕誅之。

태조는 친병(親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니, 박의는 벌써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강계(江界)로 들어갔으나, 다 잡아서 이를 목베었다.


2. 나하추의 침입 격파

於是大戰良久, 互有勝負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이기고 짐이 있었다.


3. 최유, 덕흥군의 침입 격파

賊分爲三隊。 太祖居中, 手下老將二人爲左右, 各當其一隊奮擊之。

적병은 3대(隊)로 나누어 오매, 태조는 가운데 있고, 수하(手下)의 늙은 장수 두 사람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으로 삼아, 각기 그 1대(隊)를 대적하게 하여 용기를 내어 적을 쳤다.


4. 삼선, 삼개의 난 진압

與方信、貴, 三面進攻, 大破走之, 悉復和、咸等州。 三善、三介奔于女眞, 終不返。

한방신·김귀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전진해 공격하여 크게 부수어 그들을 달아나게 하고 화주(和州)와 함주(咸州) 등 고을을 수복하니, 삼선과 삼개는 여진 땅으로 달아나서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


5. 지리산 전투

遂鞭馬互馳, 觀其地勢, 卽拔劍用刃背打馬。 時日方中, 劍光如電, 馬一躍而登, 軍士或推或攀而隨。 於是奮擊之, 賊墜崖而死者太半, 遂擊餘賊盡殲焉。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6. 황산 전투

官軍乘勝馳上山, 歡呼皷譟, 震天地, 四面崩之, 遂大破之。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7. 호바투 격퇴

太祖縱兵破之, 胡拔都僅以身遁去。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바투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8. 함주 전투

賊徒分崩, 官軍乘之, 呼聲動天地, 僵尸蔽野塞川, 無一人得脫者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관군(官軍)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1부터 8에 이르는 모든 전투는 회전으로 마무리 되었다. 예외로 놓은 사례 중에 해주에서의 전투는 이성계가 궁지에 몰린 왜구를 상대로 퇴로를 막고 일방적으로 화공을 퍼부어 섬멸한 사례로 이 경우도 굳이 따지자면 회전에 해당할 것이다. 남은 사례는 두 차례의 개경 공성전이지만 이 경우 이성계는 공자의 입장이었으며, 1차 요동 원정도 몇차례의 야전과 공성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상 성을 공격하여 벌어지는 공성전을 제외하고는, 이성계의 모든 전투는 회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이성계의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병 집단이 주로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나타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이끄는 동북면의 기병 전력은, 최유 - 덕흥군의 침입에서 공민왕이 직접적으로 이성계게 기병 전력 동원을 요구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편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기병 전력이 확보되어 있었기에 이성계 역시 적극적으로 회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풍 전투 등은 전투에 있어서 기병 전력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기본적으로 회전을 펼칠 수 있는 나하추와의 전투나 해풍 전투 등 외에도, 기병 전력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회전을 밀어부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험한 산세에서 벌어진 지리산 전투와 황산 전투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지리산 전투에서 이성계는 전투에 앞서 자신의 비장을 보내 적을 공격하게 했는데, 비장은 "산세가 험하여 도저히 기병을 이끌고 올라갈 수 없다." 고 공격을 거부했다. 이에 이성계는 아들인 이방과를 보내 공격하게 했지만, 이방과 역시 마찬가지의 언급을 보였다. 이는 험한 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이성계가 기병을 동원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두 장수가 모두 손사례를 치자, 이성계는 그 직후 자신이 직접 말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달려 길을 뚫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옛날 내가 황산을 지나다가 이 비문(碑文)을 읽어 보고 또 아기발도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는데, 대체로 깊고 큰 골짜기로서 숲이 우거진 험악한 지역이었다. 왜인(倭人)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하였고 우리는 보전에 약하였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人力)으로 된 것은 아니다.


 험한 한서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는 황산전투 역시 마찬가지다.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황산전투가 벌어진 지점이 기병이 말을 달리기에 어려운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황산전투에 있어 기병이 움직이기 어려웠다는 것은 실제 전투의 기록에서도 짐작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태조가 하룻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황산 전투에 앞서 여타 제장들은 "적이 험지를 장악하고 있다." 라는 이유로 싸우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또한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후에도 고려군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왜구를 돌파하지 못하여 초전에서 패하고 있었으며, 이성계는 군대가 패하여 내려오는 상황에서 제장들에게 "말고삐를 단단히 잡아 말이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고 일렀다. 이는 기병전력을 이끌고 회전을 벌이는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기병 집단을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러한 기병 집단의 힘은 전투력에서도 나타났지만 기동력이라는 측면에서도 효과가 있었다. 계속된 기습으로 승기를 잡아온 나하추와의 격전은 전투에서 기동력을 발휘한 사례다. 또한 급하게 전역 지점으로 이동하여 작전을 벌이는데도 효과가 있었다. 기록상으로 나타난 이성계는 전투에 앞서 강행군을 자주 펼쳤다.


군대가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렀는데, 요성(遼城)에서 이틀의 행정이라 보급부대를 잔류시킨 후 이레 동안의 군량만을 가지고 행군하였다.


1차 동녕부 원정 당시, 이성계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요성에서 이틀의 거리인 나장탑에 우선 진을 쳤다. 이 나장탑의 위치에 대해,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동국병감 (東國兵鑑 1984) pp. 427 주석에서는 '요동성 동쪽 2백리 거리이며, 지금도 길 옆에 석탑이 있다' 라고 주를 달았다. 요성과 나장탑의 거리가 200리인데, 당시 고려군에게 이것이 이틀 거리였다면 이성계의 군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루에 100여리를 진군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일 40km의 속도로, 전쟁사 연구자인 이상훈은 그의 저자 『나당전쟁연구』에서 일반적인 군대의 이동속도로 30리(12km)~60리(24km)를 제시한 바 있다. 말하자면 일일 40km란 '일반적인 군대가 특별한 일이 없는 상황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거리' 의 '두배' 를 하루만에 주파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에 우리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 공포에 싸였다. 인열의 급보가 계속하여 이르니, 태조가 이틀 길을 하루에 행군하여 적과 지리산 아래에서 싸웠다. ─ 고려사절요 1377년


 이러한 강행군에 대한 기록은 그외에도 몇차례 찾아 볼 수 있다. 지리산 전투의 경우, 수도권 지방이 서해 연안의 왜구들에게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경상도 지역이 왜구에 허를 찔려 조정이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다가, 우인열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이성계가 중앙에서 군사를 이끌고 지리산 부근까지 진군한 왜구들과 맞선 전투이다. 이 당시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는 이성계가 이틀 길을 하루만에 주파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378년의 해풍 전투의 경우, 이성계가 갑자기 끌고 전투에 난입한 기병들이 승리를 결정짓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록 상으로는 이성계의 군대가 준비된 기습이었는지 아니면 뒤늦게 도착하여 전장에 난입한 병력이었는지 알기 힘들다. 만일 흩어져있던 병력이 급하게 구원을 하러 왔다는 해석을 하게 된다면, 이성계의 군대가 그때나마 도착했던것은 다른 병력들에 비해 기동력이 앞서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행군의 백미는 물론 위화도 회군이다. 위화도 회군 당시, 원정군은 400km를 10일만에 주파했다. 이는 일일 40km의 속력으로, 당시 회군 하던 병력이 장마철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우왕과 최영이 5월 28일 원정군이 지척에 있다는 속도를 듣고 지름길을 달려 다음날 아침 간신히 개경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거의 9일에 400km를 간 셈이다. 이성계는 이렇게 강행군을 동반한 기동을 꺼리지 않았고, 황산전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투에서 속전을 선호했다. 



1. "군사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 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 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 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師旅之命, 係於糧餉。 雖百萬之師, 有一日之糧, 方爲一日之師; 有一月之糧, 方爲一月之師。)


2. "전하(殿下)께서 반드시 큰 계책을 성공시키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에 어가(御駕)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출사(出師)하면, 볏곡이 들판을 덮어 많은 군사가 식량이 넉넉하게 되어 북을 치면서 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殿下必欲成大計, 駐駕西京, 待秋出師, 禾穀被野, 大軍足食, 可以皷行而進矣)




기동을 통한 속전주의와 한번의 회전으로 인하여 빠른 결말을 자주 짓던 이성계는, 이와는 별개로 보급 문제에 있어서는 꽤나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1의 내용은 호바투를 물리치고 올린, 변경 안정을 위핸 대책인 안변책의 내용 중 일부다. 이 당시 이성계는 아무리 백만의 병력이 있더라도 이를 유지할 군량이 업삳면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하며 군사 문제에 있어 군대를 키우는것보다도 먼저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는 일을 강조했다. 또한 2차 요동정벌 직전 사불가론을 내세운 이성계는, 우왕이 이를 거부하자 타협책으로 가을에 공격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당시 군량 문제를 거론했다. 장수로서의 이성계는 기동과 보급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자면 빠른 기동도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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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엔
14/04/09 19:05
수정 아이콘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군벌화를 제대로 했다는 증거 중 하나로도 이야기되더군요.
我無嶋
14/04/09 19:28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요.. 사실 매번 신불해님 이성계 관련 글을 보면서 놀라웠던건
전부 기병화된 병력도 아닌데 매일 40km를 주먹밥 먹이면서 뛰라니까 뛴다는게...아무리 군인은 까라면 깐다지만 놀라운 부분이었는데
(그리스 사람은 마라톤 한번하고 죽었다는데 이성계 병력은 수천명이 매일 뛰는데 전투까지 수행한다는게 참..)
"군벌화"라는 단어 하나가 그 놀라움에 대해서 정리를 좀 해주는 기분이 드네요.
영원한초보
14/04/09 20:14
수정 아이콘
그 당시 군장 무게가 궁금하네요
일단 무기는 k2보다 무겁겠지요?
단독군장이면 정예병들은 40km할만 할텐데
요정 칼괴기
14/04/09 21:50
수정 아이콘
누가 그러더군요. 군장 무게 면에서 고대 병사들이나 현대 병사들이나 줄어든 건 없다.
물건이 가벼워진 대신 다른 걸 군장에 넣기 때문에...

아마 비슷할 겁니다.
영원한초보
14/04/09 21:52
수정 아이콘
그렇겠네요 역시 군인은 최대치로 굴려야...
14/04/09 19:0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거 성격 되게 급하네요..;; 이리 번쩍 저리 번쩍
14/04/09 19:10
수정 아이콘
매번 외적이 쳐들어오면 잘해봐야 수성하다가 논밭 다 잃고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던 당시 고려 사람들에게 적이 오면 금세 요격해버리는 이성계 같은 장군은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겠네요.
신불해
14/04/09 19:16
수정 아이콘
실제로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太祖素得人心, 又士卒精銳, 戰無不克, 州郡望若雲霓。)

이건 어느정도 미화라고 최대한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별도의 기록이 또 있는데,

"민간에서는 양백연 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차라리 왜적을 만날지언정 원수(여기서 말하는건 군사제도상의 원수직)를 만나지는 말아야 한다." 하였다. (民間聞伯淵等來 語曰 寧逢倭寇 勿逢元帥)

외적을 막는 고려군의 민폐가 오히려 극심했던 만큼 최대한 빨리 승부를 결정짓는 이성계의 전투 방식이 적어도 백성들에게 불호가 되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14/04/09 19:1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역시 이성계!
최종병기캐리어
14/04/09 19:26
수정 아이콘
13세기 전세계에서 몽고군을 제대로 막은 곳이 없었고 고려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봅니다. 야전을 할 상대가 아닌거죠...

이성계가 대단하긴하지만 급이 다른 애들이라...
신불해
14/04/09 19:36
수정 아이콘
당시 고려 조정에서 한 이주 정책은 멀쩡히 잘 사는 사람들을 때려 죽이고 협박하고 줄에 묶어서 섬에 버리고, 굶어 죽건 말건 방관하는 식입니다. 실제로 청주 지역 같은 경우는 거의 모든 백성이 이러한 이주 정책 때문에 죽거나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최씨 정권이 하던건 강화도에서 자기 집 크게 만들거나 좋은 나무 가져와서 심는 정도였고.
최종병기캐리어
14/04/09 19:49
수정 아이콘
청야전술자체가 그런 전술이죠. 단기간에 소개해야하니... 그래서 최후의 저항이 아닌이상 잘 쓰지도 않고...
석신국자
14/04/09 20:10
수정 아이콘
최씨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되는 요소들을 다 제거 했죠
심지어 변방에 군사력마저도요 거란 최전성기때도 막어고 금나라는 아예 고려를 처다보지도 않았지만
고려는 너무 처참하게 당했죠 뭐 1차는 침입은 나름 잘 막았지만 나머지는 뭐...
알킬칼켈콜
14/04/09 19:26
수정 아이콘
그리고 먼 훗날 왜군은 초식동물이니까 가서 풀 뜯어먹으면 된다고 말하는 어떤 대한의 독립투사를 장군으로 모시게 되는데..
Starlight
14/04/09 19:52
수정 아이콘
저런 분이 왜 문과출신 아들은 못이기셨는지 궁금하네요.
한국화약주식회사
14/04/09 19:59
수정 아이콘
문과로 장원급제했지만 아들도 한 성깔했고 무술도 잘했죠
문무겸비라고 해야하나...
로하스
14/04/09 20:04
수정 아이콘
아내 강씨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을 상당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정도전마저 죽자 그냥 모든걸 다 놔버린 듯합니다.
14/04/09 20:10
수정 아이콘
정도전 죽은 건 실각한 것과 동시이죠. 따라서 옳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로하스
14/04/09 20:23
수정 아이콘
정도전죽고 6일있다가 이성계가 왕에서 물러났으니 이성계가 그렇게 빠르게 왕에서
물러난덴 정도전의 죽음도 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14/04/09 20:32
수정 아이콘
정도전 죽은 건 1차 왕자의 난 때입니다. 사실상 그 때 실각했다고 보는 게 맞죠. 그 후 6일(맞나?) 있다가 왕에서 물러난 것은 이방원 측의 압박에 의한 당연한 수순이구요.
석신국자
14/04/09 20:14
수정 아이콘
함흥에서 아들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로하스
14/04/09 20:24
수정 아이콘
네..전 거기까진 생각을 못하고 정도전죽고 이성계가 바로 왕에서 물러난 것만 생각했네요.
기아트윈스
14/04/09 20:12
수정 아이콘
이방원은 다른 능력보다 정치력이 정말 타고난 케이스 같아요.
아빠가 두 손 들 정도로 말이죠.
Korea_Republic
14/04/09 20:19
수정 아이콘
천부적인 재능인거 같아요
바스테트
14/04/09 22:52
수정 아이콘
한국 왕조 역사상 이방원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는 왕도 없을 겁니다...
난멸치가싫다
14/04/09 20:26
수정 아이콘
국사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14/04/0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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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군사적인 업적들을 보면 이양반은 창업군주가 되는 바람에 되려 지휘관으로서의 평가가 좀 묻힌 느낌이 많이 들더군요.
사티레브
14/04/0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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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성계가 출전할때
내래 한마디만 하갓어 듁디 말라
했었군요
싸우다가 죽지말라는게 아니라 싸우기전까지 죽지말라는거였어
14/04/10 11:57
수정 아이콘
싸우기 전까지 죽지말라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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