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11/12 04:07:23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불굴 - 4. 어디까지가 한국인가
"적에게 휴식과 재편성을 할 여유를 주면 안 된다. 전 전선에서 즉시 공격을 재개한다." - 리지웨이

지평리 전투의 종결은 곧 중공군 4차 공세의 종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리지웨이는 중공군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선은 중부전선이었습니다. 적 4차 공세로 밀려난 부분을 만회해야 했죠. 그는 서울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적을 확실히 압도한 이후 천천히 탈환할 생각이었죠.

문제는 적 예비대가 언제 전선에 도착할 것이냐였습니다. 잘못하면 횡성의 참사가 또 나올 수 있었죠. 아군은 이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가지지 못 했고, 그럼에도 작전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리지웨이는 이를 위해 부대에 이런 지침을 내립니다.


"적의 계략이나 또는 강력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추격하여 적에게 유인당해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필요시에는 전투를 중단하고 부분적으로 후퇴하라."

언제나 적 예비대가 24시간 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작전을 하라는 것이었죠. 필요시에는 후퇴는 물론 작전 자체도 취소할 예정이었습니다. 부대간의 연결과 균형을 중요시했고, 이는 라운드업 작전보다는 썬더볼트 작전과 닮았죠. 이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라운드업 작전을 너무 쉽게 했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겠죠.

작전 개시는 2월 21일 10시, 첫 목표는 횡성이었습니다. 작전명 킬러의 시작이었죠. 너무 쉬운 말이라서 이런저런 번역명이 나오죠. 격멸, 섬멸, 도살 등으로요. 작전 목표는 지역 점령보단 적 섬멸에 집중하는 것, 9군단은 원주-횡성 방면으로,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은 제천-평창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미 9군단의 주공은 다시 투입된 미 1 해병사단, 미 24사단과 미 1 기병사단, 국군 6사단은 좌우에서 병진했습니다. 미 10군단의 주공은 미 7사단, 이들은 영월-평창간의 도로를 따라 진격합니다. 4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은 국군 3군단은 미 해병사단을 엄호했죠.

문제는 날씨였습니다. 적은 계속 철수하고 있었지만, 날씨가 추격을 방해하고 있었죠. 공격개시일인 21일부터 야간에도 온도가 영상으로 올라갔고, 22일부터 간헐적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항공정찰과 공군 지원을 방해했고, 녹은 눈으로 인해 도로 상태가 악화됐으며, 눈이 녹으면서 하천의 급류로 교량이 파손돼 갔습니다. 곳곳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터널과 도로, 철도가 끊겼죠. 미 1기병사단의 경우 하천의 범람으로 보급소가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24일에 9군단장 무어의 헬기가 남한강에 추락, 무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급히 스미스 해병사단장이 군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주공인 해병대의 작전이 더 어려워졌죠.

적의 저항도 없진 않았습니다. 북쪽으로 가면서 적이 주요 고지를 확보하고 맞섰고, 제 2전선부대, 빨치산 역시 계속 나타났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맞서겠다는 의지까지 보이진 않았습니다. 팽덕회는 춘계 공세까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려 했고, 저항은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했죠. 그런 점에서 날씨가 제대로 도와줬습니다.

3월 4일, 미 해병대는 마침내 횡성에 도착합니다. 이어 3월 6일까지 모든 부대가 횡성-평창의 목표선인 아리조나선에 도달하면서 킬러 작전은 끝이 납니다. 아쉽게도 악천후 속에 적의 주력이 미리 후퇴하면서 적 섬멸에는 실패했지만, 아군 역시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죠.

이제는 서울이었습니다.

-----------------------------------------------------------------------------------------------

리지웨이는 바로 다음 작전을 구상합니다. 이번에는 서울을 포함해 38선까지 탈환하는 것이 목표였죠. 하지만 서울에 바로 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선 전선의 중앙에 거대한 돌파구를 만들어 적을 양쪽으로 절단한 후 서울을 측면에서 포위해 탈환한다는 전략을 세웠죠.

작전명 절단(Ripper)였습니다.

주공운 중앙의 미 9군단, 목표는 덕소-가평-춘천 북방-한계리를 연하는 아이다호선이었습니다. 적을 절단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죠. 10군단은 9군단의 우측을 엄호, 1군단은 좌측을 엄호하며 서울 포위를 준비합니다. 국군 3군단은 운두령-황병산으로 진격하기로 했고, 1군단은 이미 목표선에 진출한 상태라 방어를 강화하기로 합니다. 모든 부대가 참가하는 대규모 작전이었죠.

여기다 해군은 남포와 원산에 함포사격을 실시, 상륙작전을 가장했구요. 공군은 적의 철도 파괴에 집중합니다.



3월 7일, 리퍼 작전이 개시됩니다.

9군단 예하 미 24사단의 목표는 용문산, 중앙의 미 1 기병사단과 국군 6사단은 홍천강 남쪽 산악지대로, 주공인 미 1 해병사단은 홍천을 목표로 진격합니다.

작전은 무난히 진행됩니다. 군단은 13일까지 1차 목표선(알바니선)에 도달했고, 여기서 횡성 전투에서 당한 아군의 시체와 유기된 전차, 야포, 트럭 등을 수거하기도 했죠. 이어 군단은 진격을 재개, 적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는 홍천 포위공격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적은 해병대에만 소규모 저항을 계속할 뿐 별다른 방어가 없었고, 오히려 철수 움직임을 보였죠.

이 때 팽덕회는 전경후중(前經後重), 전방에서는 지형을 이용해 UN군에 출혈을 강요하고 그 사이 후방의 주력이 포위기동해 격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고 철수를 지시했죠.

리지웨이는 이런 정보를 듣고 진격을 서두릅니다. 21일 미 1 기병사단이 마지막 목표선인 카이로선에 도달, 다음 날에 춘천시내로 진입합니다. 이어 해병대가 25일 (이 때 국군 해병대가 선봉에 섭니다) 카이로선에 도달하면서 중부전선의 리퍼 작전은 끝납니다.

----------------------------------------------------------------------------------------------------------

한편 미 1군단은 서울 탈환 작전을 벌입니다.

시작은 미 25사단, 킨 소장은 여유를 가지고 예행연습을 해 왔습니다. 목표는 현 양수리의 구실 선착장, 현재는 팔당댐으로 인해 수몰된 곳이었죠. 3월 7일 05:50이었습니다.

우선 96문의 야포와 15문의 전차포, 48문의 박격포를 동원한 포격이 개시됩니다. 적 역시 도하지점에 강력한 방어를 시도했고, 이 때문에 보트에 구멍이 뚫려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어를 뚫고 07:40에 도하를 완료했고, 정오쯤에는 근처의 고지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죠. 후속 병력의 도하도 완료됐고, 이들은 서울 동북쪽에서 적을 견제할 수 있게 됐습니다.

팽덕회는 이런 모습에 서울을 미련 없이 포기합니다. 9일부터 중공군의 후퇴가 개시됐고, 이에 맞춰 한강에 포진해 있던 국군 1사단과 미 3사단이 한강을 도하합니다.

리지웨이는 서울 시내에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울 북쪽으로 진격을 명령합니다. 공산군은 북한군 1군단이 문산에, 중공군 50군이 의정부로 후퇴해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죠.

16일, 국군 1사단이 영등포에서 도하, 서울을 다시 장악하고 북쪽으로 진출합니다. 이렇게 서울은 다시 한국으로 왔죠.

이 때 서울에 남아있던 인구는 20만 정도, 최소한의 시설을 복구하는데도 2개월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때문에 맥아더는 이승만의 서울 복귀를 막았고, 행정이 정상화될 때까지 피난민들의 서울 복귀도 자제하도록 홍보했습니다. 아직 마음 놓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땅은 회복했지만 공산군은 별 타격 없이 철수했으니까요.

-------------------------------------------------------------------------------------------------------------------------

서울부터 38선 근처까지 탈환에 성공한 상황, 이제 문제는 38선을 다시 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워싱턴과 맥아더의 주장이 충돌하죠.

맥아더는 50년 12월 29일 확전조치를 요구합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보복을 요구한 것이었죠.

- 중국 해안 봉쇄
- 중국 공업의 전쟁수행 능력을 폭격으로 파괴
- 자유중국 부대로 UN군 증원
- 자유중국군에 중국 본토에 대한 견제공격 허용

이에 대한 트루먼은 맥아더를 말리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군사력이 건설될 때까지 적대행위 지역의 확대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중략) 그로 인해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행위에 말려든다면 결코 이롭지 못 하다."

맥아더의 이런 요구는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특히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만해졌으니 더해졌죠.

중공군 개입은 그들의 전투력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북한과의 전쟁을 넘어서 중국이 참전했다는 의미가 더 컸죠. 이대로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진격할 수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전쟁이 끝난다고 확신할 수 없었죠. 중국이 언제 전쟁을 포기할 지가 문제였고, 중국이 참전한 마당에 다시 38선을 넘을 경우 소련이 직접 참전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 소련 공군은 중공군인 척 북한군인 척 참전했고, UN군은 그걸 알면서 무시해 왔습니다. 확전을 막기 위해서였죠.

+) 스탈린은 직접 참가는 끝까지 무시했고 실제 북진해도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당장 중공군의 전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피해를 철저히 막고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병력은 54만, 아군의 두 배나 됐고 특히 750기나 되는 공군이 투입되면서 항공 우세도 확신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반면 다른 UN군들은 물론 미군도 더 이상의 증원을 원하지 않았죠. 2차대전이 끝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을 때였습니다. 북한군 정도라면 될 지 몰라도 중국은 얼마든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지원은 소련이 할 것이고, 모택동은 병력 투입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요. 참전한 이상 최대한 얻어내야 했고, 중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건 인구 뿐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럼 전쟁을 어느 즈음에서 끝내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 해 "대한민국"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냐는 것이었죠. 전쟁 전에는 38선 이남이었습니다. 북진을 개시할 때는 한반도와 부속도서(...)였죠. 그렇다면 지금은?

기준이 될 만한 건 역시 38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남침으로 38선은 무너졌고, UN군도 중공군도 38선을 한 번씩 무시했습니다. 이 때도 양 쪽 다 38선은 더 이상 국경이 아니라고 생각했구요.

일단 나올 만한 것은 청천강-원산 선, 한반도가 가장 좁아지는 북한의 허리였습니다. 압록-두만강까지 못 갈 바에야 이 곳이 가장 나았지만, 이것으로는 공산군이 납득할 가능성이 없었죠.

따라서 미국은 "38선 부근 북쪽까지 공산군을 몰아내고 명예로운 휴전을 한다"는 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이후엔 외교를 통한 평화통일을 시도한다는 것이었죠. 이렇게 전쟁의 목표가 확실히 정해집니다.


"UN군이 38선에서 정지해서는 안 되며, 한만 국경선까지 진출해야 한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3월 22일 "국경선까지의 총진격"을 결의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24일에는 성명까지 발표하면서 이를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뭐 힘이 있어야죠 -_-; 거기다 지금 신경쓸 게 더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문제는 맥아더였습니다.

맥아더가 미국 정부의 명령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 휴전선의 모태라 할 만한 캔자스선 도달 이후에는 대대급 작전만 벌이라며 제한을 시도하긴 했죠. 하지만, 역시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트루먼은 3월 20일 이를 훈령으로 맥아더에게 전달합니다. 맥아더의 반응은 예상 외, 혹은 예상대로였죠.


"더 이상의 제한을 가하지 말라. 현재의 제한사항만으로도 적을 북한지역에서 몰아내는데 곤란을 느끼고 있다."

워싱턴은 이를 맥아더의 확전 의지로 받아들이고, 이를 막기 위해 급히 대통령의 성명을 준비합니다. 헌데 맥아더는 경악할 만한 짓을 저질렀죠.

"제공권ㆍ제해권을 우리들이 장악하고 있다. 더구나 적은 지상화력에서조차 열세하기 때문에 여기서 생기는 전력의 격차는 적이 아무리 광신적으로 용감하고 인해전술을 취한다 하더라도 없애지 못한다."

"현재 유엔군은 그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은 국제법을 무시한 기습을 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 한국을 정복하려는 그들의 기도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만일 유엔이 현재의 제한을 풀고, 유엔군의 군사행동을 중국의 연안과 내륙으로 넓힐 것을 결정한다면 중국은 곧 군사적 붕괴의 위기에 빠진다는 사실을 중국 자신이 통감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3월 23일, 맥아더는 돌연 이런 내용의 성명을 발표합니다. 물론 뒷부분에는 그래도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며 팽덕회에게 휴전회담을 제안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걸 따지기엔 앞부분이 너무 충격적이었죠.


전쟁에 대한 목표가 수립되던 그 때, 현지의 사령관이 독단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정부를 무시하고 이걸 발표한 게 컸죠. 군인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따로 행동할 경우 생기는 문제는 굳이 말 할 필요 없고, 맥아더는 예전부터 그런 문제를 저질러 왔습니다. 거기다 외교에 관련된 얘기는 하지 말라는 지침도 이미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 이후 맥아더는 이걸 사령관으로서 일상적인 거라고 했습니다만 -_-a;

미국군 통수권자인 트루먼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문민통제를 어긴 것으로 보이기도 했죠.

해임의 명분은 명령 위반, 개전 직후 독단으로 38선 이북 폭격, 중공군 개입 직후 UN군 부대까지 국경으로 진격, 독단으로 확전론 주장 등이었습니다. 4월 11일, 트루먼은 공식적으로 맥아더를 짜릅니다. 흥미롭게도 캔자스선을 굳히는 불굴 작전의 개시일이었죠.

+) 근데 이게 또 11일에 페이스 육군부 장관이 직접 도쿄로 가서 정중하게 전달하려던 걸 한 라디오 기자가 알아내서 미리 소식을 내 버렸고, 급히 11일에 기자회견으로 짜르게 됐죠. 미 정부로서는 나름 생각해 준 것이었지만 -_-a 맥아더는 예상한 건지 쇼맨십인지 쿨하게 물러났습니다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렇게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미군의 원수이자 일본 최후의 쇼군 맥아더는 이렇게 죽지는 않고 사라집니다.

자... 맥아더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맥아더는 38선 이남의 미군사령관으로 분단에 관여했고 (이건 미국 자체의 문제지만) 한국을 무시했습니다. 반면 전쟁이 터지자 바로 한국에 왔고, 한국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죠.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을 주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을 무시하면서 전쟁을 악화시켰고, 그 이후에는 확전을 주장했죠. 이것도 양면입니다. 한국을 위해서도 한 말이었지만 확전으로 전쟁이 어떻게 끝날 지 모를 경우 가장 피해를 입는 것 역시 한국이었죠.

저는 그래도 맥아더를 꽤 좋게 보는 편입니다만... 둘 다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죠. 그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나 "민족의 통일을 막은 미 제국주의자" 수준만 아니면 된다고 봅니다. 미국에서의 평가 등까지 따지면 너무 얘기가 길어질테니 이만하겠습니다. 아무튼 더그 형, 태평양 전쟁부터 정 많이 들었는데 이젠 빠염이네요.

여담으로 그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제한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일방적으로 적을 몰아낼 수 없는 제한전, 우리 편이 완전히 정의가 될 수 없었던 한국전쟁은 그로서는 꽤나 고달픈 전쟁이었을 겁니다.

그 이외에... 이 맥아더 해임에 관한 러시아 쪽의 주장이 재밌네요.

"그러나, '맥아더'장군의 퇴임과 '리지웨이' 장군의 극동군 사령관 임명은 미국의 군사 정치적 상황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으며, 예전과 같이 미국의 정치는 극동지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냥 상대 진영이니까 해 본 말인지, 속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명분상 한 말인지, 진짜 확전돼서 미국과 중국이 더 큰 피해를 입길 원했는데 그게 안 돼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뭔 일이여?"

맥아더의 해임 소식이 기자들에게서 먼저 나왔듯, 리지웨이 역시 정식으로 UN군 사령관에 임명되기 전에 기자들이 먼저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리지웨이를 대신해 미 8군 사령관이 된 것이 바로 제임스 밴 플리트였죠.

이렇게 미국은, UN은 전선의 사령관을 교체하면서 전쟁의 방침을 굳힙니다.

...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빨리 끝내줬으면 합니다만 -_-;

------------------------------------------------------------------------------------------------------------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런 건 어떨까요? 여기서 걸린 것이 한국의 통일이 아닌 독립이었다면요. 북한이 김일성의 독립 정권이 아닌 중국이나 소련의 점령지였다면?  둘의 무게는 다르지만 통일이 되지 않았으니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는 말도 있으니 비교해봐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어차피 남이 해 주는 상황인 건 같으니까요.

글쎄요... 저 같은 경우는 이런 경우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실제 그 상황에 처한다면, 혹은 지금도 일제든 뭐든 한반도 전역이 식민지였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힘으로 하는 게 아닌 남이 해주는 상황에서 세계대전을 각오하는, 핵까지 쓰일 지 모르는 확전을 요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핵이 이미 한 번 쓰여서 2차대전 말 일본에 대해서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핵을 써서라도 혹은 미군 희생이 얼마나 되든 일제를 패망하고 한국을 독립시켜줘야 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망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한편 1월 말부터 "전략도서 확보작전"이 시작됩니다. UN 해군의 엄호 아래 국군 해병대가 벌인 작전이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동서해안의 왠만한 섬들을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특수부대가 내륙에 침투하면서 공산군은 많은 병력을 해안가에 보내야 했습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같은 새로운 상륙이 있을까 걱정해야 했죠. 이후 휴전협상으로 서해 5도 이외의 모든 섬을 포기하고 내려옵니다. 그 때 국군에 협조했던 도민들의 상황이야 굳이 말할 필요 없겠죠.

UN군은 국군이 바다로 북진하지 않을까 걱정해 북방한계선을 만드니 이게 바로 nll이죠. 요새 얘기 많이 나오니 살짝 다뤄봤습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하죠.

---------------------------------------------------------------------------------------------------------

뭔가 이 글에 많은 걸 집어넣었는데, 하나만 더 집어넣죠 뭐 -_-a


3월 27일, 1군단장 김백일이 항공기 사고로 사망합니다.

주인공은 못 됐지만, 언제나 조연으로 많은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는 줄 수 없네요.

흥남 철수 작전에서 그의 공을 말한 적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 사람을 살렸다는 것은 결코 작게 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군이라도, 나찌 독일군이라도 이건 인정하고 좋게 봐야 된다고 보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많습니다. 일단 친일파 문제, 백선엽, 정일권 등에 비해 그는 꽤 깊숙히 들어가 있습니다. 뺑뺑이로 간도특설대에 들어간 사람과 간도특설대를 만든 사람을 같은 시선에서 볼 수는 없죠.

그리고 창군 때 그는 만주군 파벌을 이끌었습니다. 애초에 이걸 이끌었던 원용덕이 이승만의 딸랑이로 산 걸 보면 그보다는 능력이 있긴 했을 겁니다만, 그의 능력을 높게 볼 수는 없습니다. 개전 때의 행적은 채병덕과 다를 바 없고, 채병덕이 물러나면서 그가 국군을 장악했죠. 채병덕이 모든 책임을 지면서 그의 과는 가려집니다.

뭐 인간관계는 좋았던 모양입니다. 만주군 출신 후배인 백선엽, 정일권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니까요. 하지만 파벌 만들기 수준이었죠.

이후, 그의 죽음을 슬퍼했던 백선엽과 정일권은 각기 파벌을 만들어 싸웁니다. 오히려 이런 선배들의 몰락이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을테죠.

--------------------------------------------------------------------------------------------------------------------

절단 작전이 끝났을 무렵, 적은 문산과 의정부 일대에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공세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특히 문산 방면에 있던 적이 임진강을 배후로 배수진을 친 걸 감안해 정면에서 들이치고 임진강에 187공수연대를 투입, 포위 섬멸을 시도하죠. 작전명 용기(Courageous)였습니다. 187연대의 공수 작전명은 토마호크였습니다.

국군 1사단은 이와 연결하기 위해 "또" 문산으로 진격, 미 3사단은 의정부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폭우 및 항공기의 고장 등으로 187연대는 뒤늦게야 투입됐고, 그 전에 북한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철수합니다.

"빨리 도망가는데 놀랐다. 틀림없이 상당한 적이 아직 남아 있을텐데..." - 백선엽

반면 의정부 쪽을 공격한 미 3사단은 강력한 저항에 부닥칩니다. 개전 때도 북한군의 주공이었던 의정부였기에 그랬겠죠. 이 곳을 방어하던 중공군 26군이 큰 피해를 입은 뒤에야 철수했고, 포천을 탈환한 건 28일이 돼서였죠.


리지웨이는 곧바로 다음 작전을 구상합니다. 맥아더와 그와의 공통점은 미국 우월주의,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죠. 맥아더는 그 미 정부도 무시한 반면, 리지웨이는 그걸 충실히 따랐습니다. 사람을 잘 고르긴 했습니다. (아직 맥아더가 짤리진 않았지만요)

리지웨이는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명령받았고, 다음 목표를 정합니다. 임진강-연천-화천-간성-양양으로 이어지는 캔자스선이었죠. 미국이 휴전 제의를 위해 필요로 한 선이었고, 현 휴전선의 모태입니다. 휴전을 하려면 일단 북진은 계속해야 했죠.

작전 개시일은 4월 3일, 작전명은 "전선의 요철을 정리한다"는 뜻에서 러기드(Rugged)작면으로 정해집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이미 갈만큼 갔기에 중부전선이 중요했죠. 리지웨이는 국군 1사단과 미 3사단에는 방어를 맡기고 미 24, 25사단을 투입합니다. 적의 저항은 별로 없었고, 6일에 캔자스선까지 진출할 수 있었죠. 다만 미 1 기병사단만 강력한 저항을 만납니다.

이 때 중공군은 화천댐을 방류하는 것으로 맞섭니다. 애초에 화천댐을 폭파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적에게 이용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해서 그대로 둔 상황이었죠. 이 때에서야 화천댐이 목표에 포함됐고, 그걸 알게 된 중공군은 급히 후퇴합니다. 하지만 남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맞서면서 화천댐 확보에는 실패했죠.

한편 중부전선에서는 미 2사단이 화천저수지로, 미 7사단이 양구로, 국군 5사단이 인제로 진격합니다. 이 역시 순조롭게 진행됐고, 11일까지 대부분 캔자스선으로의 진격에 성공합니다.

이제 리지웨이의 눈에 들어온 곳은 중공군의 부대가 집결한 평강-철원-김화였습니다. "철의 삼각지대"였죠.

---------------------------------------------------------------------------------------------------------------------------



철의 삼각지대에 중공군 대부대가 발견됩니다. 이 곳은 원산과 서울의 중간 지역으로 도로와 철도가 발달된 요충지였죠. 서울을 확실히 확보하고 휴전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캔자스선 8~10km 북쪽에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작전명 불굴(Dauntless)였습니다. 캔자스선의 전초선이었죠. 작전 개시일은 4월 11일, 바로 이 날 맥아더가 짤립니다. -_-a 한편 작전기간 동안 중공군의 방어가 이제까지보다 거세져 갔죠. 14일 리지웨이는 마지막 군단장 회의를 소집하면서 방어 계획을 세웁니다. 철의 삼각지대 점령은 필요하지만, 유사시 방어까지 생각한 공세였죠.

와이오밍선 남쪽에는 유타선이 설정되고, 유타선을 넘을 경우 군단에 사전 통보, 와이오밍선을 넘을 경우 사전 승인을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를 받은 것이 새로운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였죠.

적의 방어가 강화돼 가는 가운데 20일 모든 부대가 연천, 금학산, 문혜리, 사창리 등을 점령하며 유타선에 도달합니다. 리지웨이는 아직 적의 공세가 없을 거다고 생각해 21일에 와이오밍선을 향한 작전을 개시하죠.

하지만 단 하루만에 공산군의 강력한 방어에 부닥칩니다. 포로들 역시 거대한 공세를 진술했구요. 리지웨이는 지체하지 않고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언제 어디로 올 것이냐였죠.

중공군은 2월 공세 이후 2달을 참아왔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고, 아군의 공세 동안 최대한 주력을 보존할 수 있었죠. UN군이 38선을 다시 넘은 이상,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거기다 최소한 서울을 확보해야 그들의 명분도 설 수 있었죠. 이제 그들의 턴이었습니다.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 혹은 춘계 공세가 시작됩니다.

============================================================

다다음편에는 현리 전투를 쓸 수 있겠네요 (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Paranoid Android
12/11/12 04:41
수정 아이콘
어헣이늦은시간에 ..
선리플후감상해봅니다 [m]
Je ne sais quoi
12/11/12 08:4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청평에 처가가 있는데 자주 등장해서 개인적으로 더 흥미롭게 읽고 있네요 ^^;
12/11/12 10:36
수정 아이콘
`4월 11일, 트루먼은 공식적으로 해임됩니다.` 이거는 오타...인가요...?
12/11/12 12:49
수정 아이콘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늘 궁금한 것이 만약 맥아더의 제안이 받아들여서 중국까지 포함된 전쟁으로 발전했다면 어땠을까요?

세계대전으로 비화됐을지, 현재 중국의 위상은 어떨지, 한국은 통일할 수 있었을지..구소련은 참전했을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당시에 중국까지 포함한 확전조치가 받아들여졌으면..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4732 [일반] [펌글] nll 분쟁 1차 2차 연평해전, 남북문제에 대하여. [29] sungsik7276 13/06/24 7276 8
44729 댓글잠금 [일반] 발췌본 입수 - 노무현 "서해평화지역, 반대하면 하루아침에 바보" (댓글 잠금) [479] 효연짱팬세우실15667 13/06/24 15667 4
44724 [일반] 박선원 당시 비서관, 사전회의 비망록 첫 공개 - 노, "nll은 영토선.. 어떻게 할 수 없다" [214] Victor8303 13/06/24 8303 2
44677 [일반]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천주교 시국선언+ 촛불집회 시작/가두시위학생 연행 (추가 및 수정) [35] 곰주7152 13/06/22 7152 3
44672 [일반] 국정원 '남북정상회담 대화 발췌본' 자의적 해석 넣어 작성 [33] litmus5732 13/06/21 5732 0
44073 [일반] 일베 보고서 [172] 마술사얀14610 13/05/27 14610 40
42130 [일반] 이명박 대통령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가 화제입니다. [131] 타테시12319 13/02/05 12319 0
40336 [일반] 안철수 후보 정책공약 : 안철수의 약속 (3) 에너지, 미디어, 안보, 외교 [13] 타테시3864 12/11/13 3864 0
40319 [일반] 사망유희1편 <변희재vs진중권> 감상 후기 [84] 시크릿전효성7474 12/11/12 7474 0
40311 [일반] 불굴 - 4. 어디까지가 한국인가 [8] 눈시BBbr6607 12/11/12 6607 0
39994 [일반] 정문헌 의원은 말을 바꿨을까? [199] 스치파이7114 12/10/30 7114 1
39921 [일반]  진중권 대 일베네티즌의 토론회 곰티비에서 하네요. [157] Crystal12610 12/10/26 12610 0
39813 [일반] 박근혜 후보 "정수장학회 관련없어 - 최필립 퇴진요구 거부" [188] 타테시10237 12/10/21 10237 1
39792 [일반] 2012년 10월 19일 오늘의 여론조사 : SBS, MBC 양사의 여론조사 [9] 타테시5207 12/10/19 5207 0
39760 [일반] 오늘 '세상에 이런 일이' '당나귀는 사랑을 싣고' 보셨나요? [6] 가라한5379 12/10/18 5379 1
39745 [일반] MBC 전재호 기자의 막장뉴스 [33] 무플방지위원회9603 12/10/18 9603 0
39743 [일반] 2007 남북정상회담에서의 nll 포기 발언 관련 대화록과 관련한 정쟁 [89] 타테시4737 12/10/17 4737 0
39694 [일반] 종편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MBC [126] 무플방지위원회8832 12/10/15 8832 0
39663 [일반] [오늘의 리얼미터 여론조사] 잦아드는 역풍 [39] 어강됴리5668 12/10/13 5668 0
37930 [일반] 폭풍 - 3. 양양-강릉 전투, 대한해협 해전 [16] 눈시BBver.26928 12/06/30 6928 7
36202 [일반] 해방 후 - 조선 공산당의 몰락 (2) [19] 눈시BBver.26314 12/03/25 6314 6
26747 [일반] 대북정책 어떻게 해야 할까요? [93] 나이로비블랙라벨4985 10/11/30 4985 0
26680 [일반] 연평도 사태와 <의형제> [4] 쌈등마잉3760 10/11/27 376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