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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30 16:32:20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3. 양양-강릉 전투, 대한해협 해전
왜 이렇게 늦었냐구요? 전 잘못 없어요 ^-^ 문명을 탓 하세요~
그림자료는 늘 그렇듯이 천천히 할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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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이래 지형이 크게 변하거나 한 건 없죠. 현대전이 된 한국전쟁에서도 과거의 전쟁들에서 볼 수 있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태백산맥 동쪽, 동해안은 삼국시대에 치고 내려가기/올라가기도 쉽고 적은 병력으로 막기도 쉬운 곳이었습니다. 특히 신라, 현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오기에는 소백산맥이 막고 있는 지역보단 이 곳이 편했죠. 고구려는 이 길로 쭉 내려왔다가 신라가 막기도 하고, 고구려가 패하면 신라도 쭉 올라가기도 했죠.

이런 서쪽과는 뭔가 동떨어진 지역을 막고 있던 것은 8사단이었습니다. 이 8사단 방어선의 범위는 26km, 다른 사단들보다 수월했죠. 하지만 태백산맥을 이용한 게릴라를 북한에서 계속 투입했기 때문에 많은 병력이 이 게릴라 토벌에 돌려져 있었습니다. 또한 동해안인지라 북한은 수륙양공을 택했구요.

이 지역이 쉽게 뚫렸다면 포항까지는 그냥 내달리는 것이었고 포항이 위험하면 부산까지도 위험했죠. 이 역시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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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절불굴 부전상립百折不屈 不顚常立

8사단은 다른 전방 사단과는 달리 2개 연대를 보유합니다. 10연대와 21연대였죠. 이 중 10연대가 38선에 배치됐고, 21연대는 예비로 삼척에 있었습니다. 계획상으로는 유사시 21연대를 10연대의 좌측에 증원하고 후방의 광원리와 연곡천에 주저항선을 만들며, 강릉을 끝까지 사수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을 빼서 빨치산 토벌 중이었기에 당시 가용병력은 4개 대대 뿐이었습니다.

북한군의 주력은 1경비여단, 여기에 5사단 10연대와 포병, 자주포를 증원받았고 945 육전대와 766부대를 각기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시키는 수륙 협공이었습니다. 1경비여단장은 오백룡, 김일성파였고 5사단은 사단장 김창덕 소장부터 각 연대장까지 모두 조선의용군 즉 팔로군 출신의 정예였습니다. 병력은 총 만 천(+ 상륙병력 삼천) 정도, 저번 글에 2만 1천 정도로 했던 것 같은데 보니까 5사단 주력은 모두 서쪽으로 빠졌고 한 개 연대만 참가했네요 -_-; 아우


이에 맞서는 국군 8사단장은 이성가 대령, 독립운동가 이관석의 아들로 중국군 출신 -> 광복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국인 남경국민정부에서 일했습니다. (...) 베이징 방어군으로 실제 싸우거나 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_-; 그 자신이 속였는지 그냥 중국=광복군이라 여겼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그렇게 나와 있네요. 제가 모르는 게 따로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빨치산 토벌 중이라서 그랬을까요, 옆의 6사단을 본받아서였을까요, 8사단은 경계령을 풀지 않았고, 장병들의 휴가도 다행히 없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산골이라 복귀도 힘들어서 그대로 무너질 뻔 했죠. 하지만 각 부대간의 이동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포병대의 경우 장교들이 육본으로 교육 간 상태였습니다. 또한 개전 시점에서 날이 흐려서 적의 규모를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하지 못 했고, 주요 참모들은 육군본부의 교육 검열이 막 끝나서 잔치를 벌인 후 여관에서 자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10연대의 각 대대는 중대별로 분산돼 있었고, 북한군은 흐린 날씨와 어둠을 틈타 각 중대 사이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대로 예정된 주저항선까지 쭉 밀린 중대가 있는가 하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후퇴하던 이들이 있었고,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고 주변의 중대와 연결도 되지 않았던 중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포위당합니다. 이 중에는 아예 공격받지 않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중대도 있습니다. (...)

이 사실을 알고 사단 지휘부가 모인 것은 05:30, 이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늘 있었던 국지 도발로 생각하고 다시 자려고 한 모양입니다만... 06:00에 사단장 이성가가 작전회의를 열었죠. 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의 보고가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연대 규모의 적이 공격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방에서 후퇴가 계속되는 동안 회의는 4시간을 끕니다. 서울도 혼란에 빠졌던 상황, 그들이 전체적인 국면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결국 10:00에 이르러 약간의 결정이 내려집니다. 기존의 방어계획대로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강릉을 지키며 육본에 1개 연대의 증원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증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_-; 겨우 육본 작전국 교육과장 이치업 대령과 연락이 닿았습니다만, 그는 이렇게 말 합니다.

"지금 북한군의 도발은 38도선 전역에 걸친 것으로 강릉보다 서울 방어가 문제"

"병력이나 연락기의 지원은 어렵기 때문에 사단 방어계획에 따라 용전분투하라"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게 된 이성가는 10:00부로 사단장 독단으로 계엄령을 선포 (위의 결정은 10:00 이전이었나 봅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군수물자를 대관령 너머로 보내고 시민들의 피난을 결정합니다. 어떻게 된 게 서울의 군 수뇌부보다 일개 사단장의 결정이 더 낫습니까 -_-; 아무튼 여기에 악재가 하나 더 닥치니, 강릉 남쪽 정동진에 상륙한 적 병력 때문에 21연대를 북쪽으로 올리기는커녕 강릉을 지키기 위해 투입해야 됐던 것입니다. 어찌됐든 후방의 부대도 11:00~13:00를 전후해 배치가 완료됐고, 북한군의 공격이 거셌기는 하지만 8사단은 주 저항선을 계속 지키면서 주민들의 피난을 계속 시켰죠.

보병들이 앞에서 계속 막는 동안 포병은 정말 포신이 녹아내리도록 포를 쏟아냅니다. 학생들이 동원돼 이들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 주었고, 이성가 대령 역시 수시로 이들을 찾으며 격려했죠. 덕분인지는 몰라도 26일 아침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고, 주저항선도 뚫리지 않습니다.

날이 밝는 동안에도 진지 구축과 포격전이 계속됐고, 북한에서도 포격전을 개시해 아군 대전차중대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걸 노려 적 기병대가 측면공격을 가했지만 격퇴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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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적을 쉽게 막은 상황, 이성가를 비롯한 8사단은 반격을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그 자신부터가 적의 공격이 좀 세긴 하지만 일시적인 게 아닌가 고민하게 되었고, 후방 철수 명령을 괜히 내렸나 하기도 했죠. 여기에 17연대의 해주돌입 소식이 들려온 것도 컸구요. 이 때 육본에 "1개 연대를 증원해 주면 원산까지 반격할 수 있다"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_-;

이런 것도 있고 어쨌든 뻇긴 주문진은 탈환해야 했기에 10연대에게 주문진 탈환의 교두보가 될 천마봉 탈취 명령을 내렸고, 어찌됐든 밀려난 게 부끄러웠던 10연대장 고근홍 역시 천마봉에 적 병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27일 01:00에 무혈점령하는데 성공했죠. 비슷한 시각 동안 다른 전선 역시 반격을 개시해 주저항선을 확보합니다. 그 동안 북한군은 침묵하고 있었구요.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27일 05:00를 기하여 주문진을 공격한다."

주저항선을 지키기로 한 것은 공병대대 뿐, 나머지 병력을 모두 반격에 쓰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04:00에 적의 포격이 시작됩니다. -_-; 그것도 아주 미친 듯이요. 작전이 한 시간 먼저 시작됐으면 아군이 전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방어로 전환해 저항선을 지켰고, 이어서 시작된 적의 공격을 어느새 낮이 된 15:00까지 세 차례나 막아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위에서 말 한, 공격 받지 않아서 진지를 사수하고 있던 11중대는 이 때까지도 그저 38선 진지에 있었습니다. = =;;; 연락이 두절돼서 뭘 하지도 못 한 상태였죠.

천마봉을 점령했던 10연대 2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적의 포위를 뚫으면서 후퇴, 다른 병력들 역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부터 14:00부터 철수가 시작됩니다. 이제 이성가는 또 다른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어디로 후퇴할 것인가였죠.

그 때 21연대는 적의 상륙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빠르게 출동해 방어선을 짰고, 효과적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어선 내지 어뢰정에 탄 병력이 중화기 같은 걸 들기는 어려웠죠. 경보병이었던 적은 그 전투력보다는 후방을 혼란하게 하고 북쪽의 주력부대와 힘을 합쳐 국군을 협공하는 것에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쪽에서도 잘 막고 남쪽에서도 빠르게 방어선을 짜면서 그 목표 자체가 무력화 됐죠.

하지만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북쪽에서 철수를 결정한 이상 같이 후퇴해야 될 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관령으로 갈 것이가 강릉으로 가 방어할 것이가였습니다. 문제는 서울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죠. 결국 이번에도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역시 문제는 강릉 남쪽에 있는 적들, 이들도 있는 상태에서 남북으로 협공 받는 결전을 치른다는 것과 시가전이 되면 무조건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주목됐습니다. 이미 보급품도 대관령 너머로 옮겨놨겠다, 대관령 철수가 결정되죠.

철수는 다른 사단들에 비하면 정말 잘 실시됩니다. 하지만 역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죠. 가장 컸던 것이 병원에 있던 부상병들, 철수 중에 이들은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한편 본대와 연락이 끊긴 (위에서 끝까지 38선을 지킨 11중대라든가 (...)) 병력들도 본대에 돌아오지 못 한 채 따로 철수해야 했구요.

하지만 적의 공격이 언제 또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많은 병력이 낙오되지도 않고 재집결에도 성공한, 잘 한 정도를 떠나 개전 초의 모든 철수 작전 중에서 가장 잘 된 작전이라고 평가됩니다.

... 그래서인지 이성가는 다시 강릉 탈환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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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연대와 21연대는 각기 집결지에서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사기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데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고 일단) 이렇게 패하고 돌아갔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죠. 이건 사단장 역시 마찬가지였고, 강릉 공격을 구상하게 됐습니다.

"사단은 28일 08:00를 기하여 강릉을 공격하라"

주력은 후방에 투입됐던 21연대, 적은 이 날 04:00에 강릉에 진입했는데 아군의 역습을 전혀 대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군 포병대의 포격에 반응하긴 했지만 제멋대로였고, 21연대 2대대는 적의 저항을 뚫고 13:00에 강릉시내가 보이는 66고지에 도달했죠. 이 때 이르러 적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됐고 2연대는 적과 치열한 사격전을 벌입니다. 그 동안 좌측을 뚫고 간 1대대는 별 저항 없이 경포대 근처까지 왔지만 주공인 2대대의 진격이 느려지자 우선 거기서 멈췄구요.

바로 이 때였습니다.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육본의 작전지시이니 제 8사단은 즉각 원주로 이동하여 원주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사단이 지금 강릉을 공격중이고 접적 중인데 어떻게 오늘 중으로 이동할 수 있겠는가? 시간 여유를 달라고 말하였다. (김종오 대령은 육본의 명령이라고 하며 장창국 대령을 바꾸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장창국 대령과 통화해 다음날까지 원주로 이동한다는데 합의를 보았다. (중략) 혈기왕성한 젊은 장교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사단은 강릉을 탈환하고 38도선을 수복하거나 여의치 못 할 경우 오대산에서 유격전이라도 벌여 사단의 전투지대를 단독으로라도 고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작전지시에 순응키로 결심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다른 전선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육본의 정식 후퇴 명령에 따라 후퇴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8사단은 후퇴해 다음을 준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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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부터 강릉까지 이어지는 8사단의 전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일단 가장 큰 건 조공 오브 조공이라는 것이죠. 관심은 서울로 쏠리고, 전과를 말 하자니 옆의 6사단이 너무 잘 싸워 줬구요. 하지만 이 8사단의 활약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역시 많았습니다. 빨치산 토벌에 맞게 배치돼서 적의 상륙을 그대로 허용해 버렸고, 전방에서도 서로 연락이 끊기는 상황이 계속됐죠. 수뇌부에서 세운 예비대 투입 역시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뇌부가 그리 큰 혼란에 빠지지 않아 병력을 잘 투입할 수 있었고, 주민들의 피난도 비교적 잘 이루어졌으며, 후퇴 역시 잘 됐습니다. 결국엔 강릉 탈환까지 노릴 정도가 됐죠. 뭐 강릉을 계속 탈환하려다 혼자 남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진 모르겠습니다만 =_=; 하다못해 서부전선에서는 제대로 되지도 않았던 다리 폭파까지도 여기선 잘 됐구요.


국군 장병들의 목숨을 건 눈물 겨운 투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18포병대대의 활약입니다. 이에 맞서 포병대대원들은 아예 군번줄을 땅에 묻고 싸우기도 했고, 적이 다가오자 폐쇄기의 공이를 빼내 포를 쓰지 못 하게 하다가 후퇴가 늦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관측병이면서도 끝까지 포격을 유도하다가 피하지 못 해 전사하기도 했고 후퇴하는 상황에서도 "와이어 드럼은 통신소대 재산이자 무기"라면서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전투면에서도 적이 코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직사로 맞섰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나무에 터뜨려 공격력의 확대를 노렸으며, 철수 시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아군 보병을 엄호하기도 했었죠. 후방에서 안전하게 있어야 됐을 포병이 오히려 앞에서 싸운 것이었습니다.

6월 29일, 8사단의 병력을 다시 파악했을 때 6195명이 나왔습니다. 2개 보병연대 5600여명에 포병대대까지 합쳐 7000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고 아예 낙오됐던 여러 중대들을 생각한다면 이 철수는 패해서 후퇴하는 것이 아닌 정말 작전상 후퇴라고 봐도 될 정도죠.

정작 이렇게 편제를 갖추고 후퇴한 게 6사단 외에 1사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반대로 1사단이 와해된 후 재집결한 것이지 제대로 후퇴한 것은 6사단과 8사단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곧 지연전에 투입돼 많은 활약을 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죠.

딱히 특별한 영웅이 나오지도 않았고, 특별히 엄청난 공을 세운 부대가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잘 수행했고,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했습니다. 북한의 계획은 26일에 8사단 전체를 전멸시키고 강릉을 점령, 29일에는 병력을 나눠 한 쪽은 대관령을 넘어 수도권의 후방을 포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쪽은 29일까지 미친듯이 달려서 포항까지 닫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다는 점은 역시 동해안 축선을 무방비로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강릉 남쪽으로 정규군이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서술하겠습니다.

이런 뭔가 위험한 철수였지만 동해안이 아닌 내륙으로의 철수는 오히려 국군에 큰 이점을 가져다 줬습니다. 다른 사단들은 시흥에서 재편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편제를 갖춰서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동부전선의 6, 8사단 뿐이었거든요. 만약 8사단이 동해안으로 빠져버렸다면 이미 큰 피해를 입은 6사단 홀로 북한군을 막을 뻔 했습니다. 동해안은 큰 위험이 없었고, 중부지방 역시 6, 8사단과 재편된 국군이 나서면서 지연전을 할 수 있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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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동해안의 얘기를 마무리 해 보죠.


백두산함은 전국의 주요 항구를 순회하며 한국 최초의 전함을 국민들에게 보여줬고, 이걸 살 수 있게 해 준 이들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진해로 돌아온 것은 6월 24일 밤 11시 30분이었죠.

마침 비상경계령도 풀렸겠다, 오랫동안 바다에나가 있던 승무원들은 외출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복귀령이 내려진 것은 오전 10시쯤, 곧 해군본부의 작전 명령이 하달됩니다.

"진해통제부사령관은 701함을 기함으로 예속 함정 2척을 동해에 급파하라. 701함장은 통제부사령장관으로부터 YMS-512과 518을 인수 지휘해 즉시 동해안으로 출동, 제 2정대 사령과 협력해 해상경비를 강화하는 동시에 적을 포착하는대로 격침하라."

+) 512정의 함명은 구월산, 518정은 영광이었습니다. 둘 다 소해정 출신입니다 -.-a

출동태세가 완료된 것은 12시, 함장 최용남 중령은 이를 보고했고, 오후 3시 백두산함은 512정과 함께 진해항을 떠납니다. 518정은 아직 완료가 안 돼서 뒤늦게 쫓아갔죠. 이들의 목표는 강원도 동해시의 묵호항, 하지만 목표는 곧 바뀝니다.

20:10, 백두산함의 견시가 검은 연기를 발견합니다. 부산 동북쪽 54km이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죠. 최용남 함장은 뒤따르는 512정은 예정대로 북상시킨 후 이를 추격합니다. 온통 까만 색에 선명과 국기도 보이지 않는 선박, 발광신호를 계속 보냈지만 응답 없이 그저 계속 남하할 뿐이었습니다. 아직 그들에겐 정식 교전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고 육지의 상황도 몰랐던데다 저 선박이 진짜 적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확인해 봐야 했죠.

가까이 가서 조명을 비춰 본 순간, 백두산함의 승무원들은 기겁합니다. 갑판에는 완전무장한 병력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양현에는 기관포가 장착돼 있었으니까요. 최용남 함장은 급히 불을 끄고 거리를 벌립니다. 그리고 해군본부에 연락하죠.

"확인된 선박은 북한의 1000톤급 수송함정이며, 약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남하 중에 있음.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됨"

격침 명령이 온 것은 26일 새벽 00:10이었습니다. 정선하라고 해서 정선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둘 경우 이들이 어디로 갈 지 몰랐죠. 최용남은 모든 장교를 사관실로 불러 냉수를 나누어 줍니다.

"이게 살아서 마지막일 수도 있다. 싸우자."

+) 근데 이것도 일본 따라하는 것 같아서 마냥 좋게 보이진 않아요 -_-; 근데 이거 말고 결의를 다질 만한 게 딱히 생각나진 않네요

3인치, 76mm 주포가 불을 뿜은 것은 00:30, 이에 따라 적함에서도 함포와 기관포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훈련은 너무 부족했고, 포탄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런 함포전은 단 한 발이라도 정확하게 맞추는 게 중요했습니다. 함장은 위험을 감수하고 최대한 접근 (457m) 하게 했고, 마침내 직격타가 나옵니다. 적함은 기동이 멈췄고, 백두산함에서는 만세 소리가 나왔다고 하죠.


백두산함 승무원

하지만 적의 전투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적이 쏜 포탄이 조타실에 명중,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고, 주포 장전수 정병익 중사도 흉부에 파편이 박혀 쓰러졌으며, 기관사 김종식 소위는 오른쪽 발꿈치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백두산함의 공격은 계속됐고, 마침내 주포가 망가질 때까지 싸웁니다.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은 시점, 적함은 천천히 침몰합니다.

"침몰하는 적함을 보면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식당으로 내려갔어요. 중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응전하던 이들은 심한 출혈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적함의 격침 사실을 확인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숨졌어요. 그 목소리는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해요."

이 무장수송선에 타고 있던 적 병력은 무려 600명, 이들은 부산에 침투할 예정이었습니다. 만일 이게 제대로 되었다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또 모를 일이죠. 부산은 워낙에 후방인지라 게릴라 침투가 어려웠습니다만, 한창 나라가 혼란상태에서 최후방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면?


최악의 경우 부산에 막 상륙해 정황을 알아보려던 미군이 공격받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을 포기할 수도 있었겠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요인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부산 시민은 물론 피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인 공격이 가해졌을지도요. 게릴라전이 무서운 것은 대체 적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민간인의 피해가 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잘 진압했더라도 그 피해는 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미국의 전사가 노먼 존슨은 이 해전을 "6.25 전쟁의 승패를 가른 분수령"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해전이었지만, 그 영향은 너무나도 큰 해전이었다는 것이죠.

적도 함포를 가지고 있었고 (85mm라는 증언도 있지만 57mm 쪽이 맞는 듯 합니다) 백두산함이 제대로 된 함포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겼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근접전으로 진행됐다면 병력이 많은 북한 쪽이 유리했겠죠. 그리고 24일에 백두산함이 진해에 들어오지 못 했다면 역시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 해전의 상징적인 의미와 전략적인 의의가 꽤나 크기에 가려진 해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묵호항에 있다가 개전 후 북상해 상륙하는 북한군에 맞서 싸운 YMS-509정이죠. 함장 김상도 소령은 긴급출동 전문을 받고 05:00에 출발, 07:20에 옥계 해상에 이르러 적 함정을 발견해 수하를 했지만 대답은 포탄이었습니다. 이에 교전이 시작됐는데 국군의 함포는 37mm, 반면 북한은 40mm 2연장 기관포였습니다.

화력에서 밀리는 상황, 여기서도 접근전이 시작됐고, 50여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 함정은 북으로 도주합니다. 하지만 509정 역시 피해를 입어 묵호항으로 돌아갔고, 09:50에 다시 출항해 15:00에 상륙중인 북한군을 공격,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발동선 1척을 나포했죠.

대한해협 해전에 가려졌을 뿐, 이 옥계 해전이 최초의 해전이자 승전이었습니다. 물론 그 영향 자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509정 혼자 할 수 있는 건 제한돼 있었고, 바로 이를 지원하기 위해 백두산함과 다른 2척이 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아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홀로 고군분투한 것 역시 기억해야겠죠.

이후 해군은 미군이 증원됨에 따라 연안 방어와 섬 등을 탈환하는 데 집중했고, 전쟁 동안 북한 연안의 많은 섬들을 점령하면서 게릴라전을 수행, 북한과 중공군은 해안에 많은 병력을 배치해야 했습니다. 이후 이 섬들을 휴전 협정 때문에 대부분 포기하고 서해 5도만 남겨뒀죠. nll이 북방한계선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던 그 때, 해군은 이렇게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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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주공 오브 주공인 의정부로 가 봅시다. 휴... 우황청심원 같은 거 준비해 두셨죠? 보다가 건강에 무리가 가더라도 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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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30 16:5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12/06/30 17:04
수정 아이콘
게릴라 600명이 진짜 부산에 드랍되었다면... 후덜덜하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12/06/30 17:20
수정 아이콘
해군출신으로 대한해협 해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워낙 많이 공부해본 해전이라서 이젠 지겨울(??) 정도입니다 흐흐흐

여기엔 안써져 있는 이야기지만 그때 당시엔 정밀한 레이더와 사통장치의 의한 포격이 아닌 손으로 포돌리고 해야 했는데

밤바다 가신분 알겠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배 조명 끄면 그야말로 암흑이죠. 근데

북한 수송선은 전등 하나가 안꺼지는 고장(??)을 당해서 좋은 표적이 되었다고 하죠.

이 이야기는 나중에 실무에서 등화관제의 중요성을 배울때 지겹도록 듣습니다...흑흑

그리고 의정부가 설마 그 유명한 축차투입 조공의 무대인가요? 혈압약 단단히 준비해야 할듯...
스타나라
12/06/3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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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줄...심히 불쾌하군요! 우린 기다리느라 건강이 나빠질 판이라구요!

덕분에 좋은글 읽고 있습니다^^
사티레브
12/06/30 17:21
수정 아이콘
한턴에 못읽겠네요
다음턴에..
Tristana
12/06/30 19:46
수정 아이콘
6, 8사단 모두 현재 5군단 예하 사단들이네요..

6사단 신교대에서 정신교육할 때
가장 많은 북한군을 죽인 사단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는데 -_-;
또 뭐 있더라... 압록강 제일 먼저 가서 이승만한테 물 떠준 부대...

1부 마지막인 6. 춘천-홍천 전투가 6사단이 나오는거였나..
전역한지 좀 되서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잘 보고 있습니다.
HealingRain
12/06/30 19:46
수정 아이콘
간만에 주욱~ 달렸네요 하하. 역시 눈시님 글은 몰아봐야 제맛입니다. 2차대전 글도 다시 정주행 하다 뭔가 아쉽다 싶어 아예 존 키건의
2차 세계대전사까지 질러버렸네요. (화물연대 파업으로 배송이 안되고 있다니!!)
그나저나 문명하신다니... 글 빨리 올려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예여 ㅜㅜ
Je ne sais quoi
12/06/30 23:04
수정 아이콘
와... 저런 해전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정말 상대적으로 작은 일이 결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예군요.
12/06/30 23:08
수정 아이콘
현재 강릉-삼척-동해쪽을 맡고 있는 23사단 출신 예비군인지라 제목이 눈에 띄어서 봤는데
역시 묵호항, 옥계항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이 가장 재미있었네요. 크크.
작은 해전 하나가 6/25의 승패를 갈랐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으_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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