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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09 21:17:57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충무공의 후예, 해방(海防)병단 - 1


1950년 1월 24일, 호놀룰루의 교민들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다른 지역이라면 몰라도 미국의 교포들은 우익 쪽이죠. 해방과 3년 후의 정부 수립, 분단됐다는 것이 슬프긴 했지만 어쩄든 나라가 다시 세워졌다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도 그들에게 기쁜 날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이 그 곳으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뉴욕을 출발해 어느덧 한 달, 긴 여행길이었습니다. 아직 조국까진 먼 길, 하지만 수많은 태극기가 그들을 반기는 길이었습니다. 미 해군은 그들을 위해 특별히 넓직한 대형 부두를 빌려주었다고 하구요.

하지만 그들이 항구로 다가오는 동안, 환호는 순식간에 침묵으로 바뀝니다.

하와이에 있던 교민들은 그 동안 미 해군의 거대한 군함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1만톤쯤이야 우습죠. 1000톤 이하가 무슨 해군이랍니까. 그렇게 미 해군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다가오는 한국 군함은 참으로 초라했습니다. 450톤, 만재배수량 700톤, 길이 50m의 작디 작은 배였습니다. 함포도 달려 있지 않았죠. 그렇게 크고 큰 미군 배의 사이에 끼어 그 모습은 더욱 더 초라했습니다.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어디 기쁨의 눈물만 있었겠습니까. 해방이 됐지만 아직 가난하기만 한 조국, 그 시작이 이렇게 작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겠죠. 해군은 저 조그만 배로 그 위험한 태평양을 건너 왔고, 자기들도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사탕수수 밭에서 중노동을 하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같은 한국인이 그 고생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작은 배라도 당당하게 태극기를 붙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 날 해군은 한국 음식을 배 터질 때까지 먹었다고 합니다.

+) 이 때 부두가 울음바다가 됐다는 것의 출처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거기 있었더라도 울었을 것 같네요.

그로부터 5개월 후, 조국에 전쟁이 나기 직전인 6월 24일이었습니다. 이번에도 해군이 온다고 다들 몰려나왔습니다. 여기에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던 정일권 준장도 끼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많네요. 세 척이 왔어요. 그래도 여전히 작네요. 막 수천수만톤짜리 미 해군이 위풍당당하게 놀던 그 바다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궁금한 조그만 세 척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20세기까지 한국 해군의 별명은 큐트 네이비였습니다.

정일권은 다들 침묵하고 있었고, 그의 곁에 있던 하와이 영사도 그랬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러 왔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그 고함은 함성이 되었고, 이윽고 부두 전체를 메웠죠.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해군 만세! 만세!"

머나먼 이국에서 당당하게 태극기를 단 한국 해군 전투함 세 척이 태극기와 대한민국 만세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바로 PC-701 백두산, 702 금강산, 703 삼각산, 704 지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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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준장은 거기서 손원일 제독과 오랜만에 만납니다. 49년 10월 1일부터 어느덧 8개월째 타국에 나와 있던 해군 소장이었습니다.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하진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해군이 됐다면 싸울 수 있었겠지만 조선인에겐 그런 건 없었죠 -_-; 대신 그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가 독립운동가였고, 국내에서 붙잡힌 독립운동가가 그의 이름을 말 해 일제 경찰에게 고문당하긴 했습니다. 이 때 그의 매형이었던 윤치창 (그 유명한 윤치호의 동생입니다) 이 도와줘서 상하이로 돌아갈 수 있었죠.

웃긴 게 이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 다닌 사람 중에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 거기다 그의 동생 손원태가 김일성과 참 친한 사이라서 죽었을 때 북한에 갔고, 북한에서는 생일잔치를 해 주기도 했죠 -_-; 거 참 특이한 인연입니다.

아무튼 그는 중국 중앙대학교 해양과를 졸업, 상선 승조원이 돼 식료품 수출입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경성의 경제가 최악에 이른 걸 알게 되고 사정을 알아 보러 직접 국내로 들어오려 했는데, 베이징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듣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었죠. 그는 다음 날 서울에 도착했고 그 다음 날인 17일부터 그렇게 꿈엔들 잊을 수 없었던 숙원을 시작합니다. 그의 나이 37세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온갖 군사 단체가 만들어졌지만 당연히 해군 쪽으로는 없었습니다. 땅과 바다는 넘사벽이니까요. 그는 고민 끝에 매형 윤치창과 가까운 연희전문학교 교장 유억겸 (뭐 친일파로 분류되네요 -.-) 을 찾아갑니다. 그는 민병종을 소개해 줬고, 둘은 곧 의기투합해 벽보를 붙입니다.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 있는 동지들을 구함"

이 때 그의 부탁으로 벽보를 다니던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의 김영철은 종로 4가에서 벽보 하나를 보게 되죠.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키자. 조국의 바다를 지켜 나갈 충무공의 후예를 모집함"

그는 곧바로 이 벽보를 붙이고 간 젊은이를 붙잡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긍모,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오사카 상선학교를 졸업 후 여수-하카타간 정기기선의 기관사로 있던 이였습니다. 그 역시 바로 참가합니다.

+) 이 역시 학교 나왔다고 친일파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진 좀 아니지 않습니까 -_-; 네 유학 간 걸 보면 가난하진 않았겠지만, 돈 좀 있다고 친일로 모는 건 -_-; 그럼 충무공 이름 들이댄 것도 민족반역자의 헛소리라 할 건지...

여기에 손원일은 조선총독부가 설립했던 해운기업 조선우선주식회사를 접수하고 역시 진해고등... 에 아무튼 거기 출신 신기슈마루 1등 기관사였던 한갑수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후자는 성공하지마 전자는 사장 김용주가 반대해서 실패했죠.

이렇게 5명으로 해사대가 결성됩니다. 놀랍게도 이혁기의 국군준비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직된 군사단체였습니다. 에 뭐... 다섯 명이었지만요 =_=

해군의 시작은 이렇게 미약했습니다.

이후 열흘 동안 30명이 더 모여들었고, 이후 1주일 동안 200명의 지원자를 모집, 경력과 면접으로 총 80명을 선발했습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정긍모의 친척에게서 안국동의 한옥 한 채를 빌렸습니다. 주위에선 미친 놈들이라고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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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중요한 것은 돈, 또 돈이죠. 손원일이 아내를 위해 들고 온 돈은 여기서 다 써 버립니다. 대원들 밥 먹일 돈도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결국 건준으로 찾아가는데 건준도 좋아했죠. 하지만 미군정 이후 좌익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손원일도 9월 30일에 탈퇴합니다. 그 역시 반공주의자였죠.

이후 조선해사보국단 자치위원회 위원장 석은태를 찾아갑니다. 일제 때 선원의 후생복지사업기관으로 설립된 반관반민 단체였죠. 석은태는 설득돼 두 집단은 합쳐져 조선해사협회를 창설합니다.

그 1주일 후부터 손원일은 좌골산경통으로 한 달 가량 눕습니다. 그 동안의 과로와 함께 일제 때 고문의 후유증이 나타난 것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석은태의 자금도 동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정긍모가 신문의 공고 하나를 보여줍니다. 귀환동포구제회에서 선박 기술자를 모집한다는 것, 거기다 그 회장은 일전에 만난 유억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사협회 회원 40명이 일할 자리를 얻은 거죠. 이후 이들이 부산으로 가 곧바로 일본인이 버리고 간 배를 정비, 동포들의 귀환을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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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 손원일은 군정청과의 접촉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해사국장 칼스텐 소령을 만나 담판을 짓습니다. 이 때 그는 해안경비대 얘기를 꺼냈지만, 이걸로 성이 찰 리가 없죠. 계속되는 설득 끝에 후에 해군 전환을 약속하고 우선 해안경비대로 시작하자고 합니다. 드디어 그들이 정식 조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45년 11월 11일 오전 11시, 70명의 대원들은 옛 충훈부 건물에서 해방 병단 창설식을 가집니다. 뭐 미국에서는 그냥 코스트가드라 불렀습니다. (...)

11이 세 개나 들어간 이유는 빼빼로가 좋아서가 아니라 十자와 一자를 합친 士라는 것이었죠. 해군은 신사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육군은 이제 막 군사영어학교 만들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아니 아직 사설 군사단체 해산도 안 된 상태였어요. 미군정에 정식(이라 하긴 아직 좀 그렇지만)으로 인정 받은 유일한 단체였던 것이죠.

자, 이렇게 11월 12일 오전 6시에 진해역에 도착했습니다만...  여기서부터 또 고난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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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에 도착한 손원일은 곧바로 미군정관 에드워드 대위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그는 손원일을 무시했죠. 칼스텐 소령에게 직접 전화하라고 했지만 그냥 쫓아냅니다. 내일 얘기하자면서요.

아니 당장 묵을 숙소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어요. -_- 대원들은 속았다면서 손원일을 당장 데려오라고 난리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죠.

"여러분의 불평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막지 않겠소. 앞으로도 이런 고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해군 건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분간,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지난날 독립군과 같은 희생정신으로 뭉쳐야합니다."

이 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건 17명, 손원일과 다른 간부들은 그들이 돌아갈 여비도 자신들 돈으로 내 줘야 했죠. 그리고 참 악으로 깡으로 다음 날 다시 에드워드를 찾아갑니다. 못 견딘 에드워드는 옛 일본 해병단 건물을 내 주고 여기가 지금 해군 전투병과학교 자리라는데... 여긴 부두가 없어요.

손원일은 다시 에드워드를 찾아가 옛 일본 해군 항무부가 쓰던 건물을 내놓으라고 닥달했고, 마침내 에드워드가 gg 칩니다. 정해진 길로만 다닌다는 조건으로 내 준 거죠. 여기를 노렸던 이유는 일본이 공출했던 물자가 쌓여 있어서 그랬습니다... 마는 가 보니까 다 없어져 있어요. 거기다가 누가 한 건지 몰라도 (일본에 대한 한이라도 풀려고 했겠죠 ㅡㅡ) 유리창을 다 깨버려서 겨울 동안 난로도 없이 담요를 둘둘 말고 살아야 했답니다 =_=

육군한테도 제대로 안 하는 미군정이 이들한테 잘 하겠습니까. 기껏해야 미국산 밀가루를 줬는데, 언제는 상한 걸 줘서 해군의 전 병력이 (...) 복통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가서 밀가루 대신 쌀을 달라고 했는데, 해방 후의 혼란 아시잖아요. -_-; 쌀 구학디ㅗ 어려워서 전라도까지 가서 구했답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설 군사단체 해산 및 군사경비대 창설 계획이 시작됩니다. 손원일은 급히 서울로 올라가 칼스텐 소령에게 이전의 약속을 확답 받습니다. 46년 1월 14일, 군정법령 42호가 공포되고 해방병단은 정식 군사단체가 되죠. 현 해군 군수사령부에 해방병단 총사령부가 설치됐고 그는 명실상부한 해방병단 총사령관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앞길 역시 딱히 -_-;

해방병단 몫으로 배정된 예산은 약 13만 8천원 가량, 전체의 1%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 3억 2000만원이 배정됐지만 경무국에서는 이걸 계속 안 주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시 상경해 국방사령관 시크 장군에게 따져서 5월부터 제대로 된 돈을 받을 수 있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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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의 내용을 더 디테일하게 보고 싶으시다면 여길 봐 주세요. 너무 잘 정리해 놓으셔서 거의 복붙 = =a
http://cheonji.egloos.com/5120012

1차 출처는 해군에서 낸 [손원일 제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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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해군의 상황도 (아직 시작도 안 한 - -a) 육군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군정의 지원으로 그나마 나아졌지만 여전히 열악했고, 옛 일본군 창고를 뒤지며 최대한 먹을 것을 구했다고 합니다. 훈련복도 일본 육군 전투복, 모자는 계급도 없는 일본 것, 군화는 육군 것 이런 식이었죠. 군가도 일본 거에 가사만 바꾼 거였습니다.

이걸 지적한 것이 손원일 제독의 아내 홍은혜 여사였습니다. 이런 일을 벌인 남편이 참 미울 법도 하건만 그녀는 오히려 여기에 함께 하며 교양 과목인 음악을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걸 지적해서 새로 만들어진 곡이 "바다로 가자"입니다. 그 외에도 해사 교가도 만들었다고 하죠.

6월 15일은 해방병단 대신 조선해안경비대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제 해군까진 한 걸음이었습니다. 해사에서의 교육도 계속 돼 1기생들은 미 구축함에서의 훈련도 했고, 장교가 급히 필요한 육군에 비해 널널하기도 해서 군사영어학교 편입생 22명 포함해서도 절반 정도만 임관했죠. 이 과정에서 좌익들도 최대한 내쫓았구요.

마침내 정식 해군이 된 후, 이들은 맥아더 라인 경계 임무를 맡게 됩니다. 일본 어선 조업과 밀수를 막는 것이었죠. 이러다가 여순 사건이 일어났고, 뭔가 애매한 해안 포격과 상륙을 하면서 해병대의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한편 38선 인접 해역 경비 역시 시작됐는데, 배 안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좌익 승조원들이 정장과 부장을 죽이고 속초로 도망간 것이었죠. 48년 5월 사이에 두 건이 터졌고, 49년 5월에도 다시 일이 터집니다. 이 무렵 육군 2개 대대가 월북하면서 군이 아주 난리가 날 때였죠.


한편 부산항에 있던 302정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당시 정장으로 있던 공정식은 부장 김점복 소위의 반란 계획 때문에 위험할 뻔 했지만, 다행히도 그 사실을 눈치 챈 다른 이들이 배를 일부러 고장낸 다음 신고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죠.

"저를 믿고 배를 맡긴 정장님을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승조원들이 정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 정장님을 죽이면 더 어려워질 것 같아 외출나간 사이에 거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가 아끼던 부장을 잃습니다.

"승조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졌던 그는 사관학교 때 성적도 좋았다. 사상이 뭔지, 체제가 뭔지, 우리는 아까운 청년장교 하나를 그렇게 잃었다"

한편 좀 어이 없는 일도 벌어졌는데, 정부수립 1주년을 맞이해 관함식을 준비하고 있던 해군은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는 인천경비부에 책임이 있어서 급히 찾았지만 없었죠. 납북이었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육군과 해군 총참모장들이 김일성만 도와주니 말이야. 동해에서는 태극기 단 함정이 올라가고, 서해에서는 성조기 단 보트가 올라가고…. 이래서 되겠는가?"

이승만의 분노는 꽤 컸습니다. -_-; 다행히 첩보부대의 활약으로 황해도 몽금포에 있다는 걸 확인, 함정 6척으로 회수 작전을 감행하죠. 다행히 전사자는 없던 모양이고, 북한 경비정 4척을 침몰시키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모가 밝혀졌는데...

범인은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안성갑 하사,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른 이유는.................. 어떤 여자와 눈이 맞았는데 하필 그 여자 오빠가 남로당원 orz 원래 미인계로 접근한 건지 그냥 걸린 건지 몰라도 이거 훔쳐 오면 결혼시켜주겠다는 거였죠. 이후 해군 함정을 끌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왔다가 붙잡힙니다. 사랑에 홀린 이 시대 최후의 로맨티스트인 건지 아니면 그냥 바보인 건지 orz;;;;;

아니 그보다 미군 거라고 끌고 가는 놈이나 그거 없어졌다고 국가 단위로 움직이는 거나 뭔가 orz;;;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지만요.

아무튼 이 몽금포 작전은 북에서 남한의 북침에 대한 근거로 두고두고 써 먹었습니다. 당연히 국군에서는 그 동안 흑역사가 돼 왔죠.

이런 과정 속에서 해군은 제대로 된 전투함을 원했습니다. 당시 주력은 일본과 미국의 소해정 -_-; 나머지는 증기선이거나 상륙용이었습니다. 손원일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오른 후 심심할 때마다 전투함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 정도를 받은 것도 계속 미국에 빌어서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사정으로서는 이런 걸 자체 건조는 물론 구매도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에 미국은 "전투함은 외국에 팔지도 양도하지도 않는다"는 정책을 결정해 버립니다.

여기까지 온 상태에서 이승만은 손원일에게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름 유명한 일이 벌어집니다.

"해방헌금" 운동이었죠.


그는 49년 6월 1일부터 장교는 봉급의 10%, 수병은 5%씩 떼어 군함을 살 돈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충분히 살기 어려움에도 다들 협조했고, 여기에 해군부인회가 나섭니다. 홍은혜가 이끄는 부인회는 각종 현물을 모아 바자회를 열었고, 밤새 재봉틀을 돌려 작업복, 장갑 등을 군에 납품합니다.

그러기를 불과 4개월, 1만 5천 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거금이 모입니다. 해군 장병 및 가족들의 협조와 국민들의 모금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죠.

손원일 제독은 이를 이승만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이승만은 그 때 잘 했다면서 큰 봉투 하나를 줍니다.

"애드미럴(-_-) 손이 미국에 가서 군함을 사 오도록 해"

그 안에 들어 있던 돈은 무려 4만 5천 달러였습니다.

여러분께 이승만의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근데 이건 잘 한 거 맞아서요. -_-; 이승만이라고 국방에 아예 관심이 없었겠어요. 애초에 미군이 국군을 제대로 지원 안 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허구헌날 나오는 이승만의 북진통일 드립이었으니 이걸로 퉁 칩시다.

이승만이 이런 거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해군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육군을 자극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육해공군이 아니라 해륙공군이라고 했고, 이는 해군에게 큰 자부심이 됐습니다.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반일주의자였고 (버르장머리 드립을 한 대통령이 더 위일지도 모르겠지만 ㅡㅡa) 한국전쟁 초기 일본군 참전 루머가 돌자 일본군이 오면 일본 먼저 공격하겠다고 한 양반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일본군이 한국에 있는 재산을 되찾으러 오지 않을까 걱정했고, 독도를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죠. 이 때문에 해군에 꽤 큰 관심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관심 뿐이었지만요. -_-; 그래서 해군은 규모가 작음에도 진급이 육군에 비해 그리 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육군보다 먼저 대장 만들어 줄 기세였죠.

아무튼 이 덕분에 그의 손에는 6만 달러라는 거금이 모였습니다.

이제 그토록 바라던 군함을 사러 가야 했습니다. 이 때가 1949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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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은 해군으로 입대해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공정식 장군의 회고를 참고했습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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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06/09 21:40
수정 아이콘
보트 없어졌다고 국가 단위 사고가 되다니 참... -_ㅜ
Langrriser
12/06/09 21:48
수정 아이콘
본격 한국군 낚시전설의 시작, 유대인 선주를 상대로 투스타 손원일 제독께서 보여주시는 능력이 나오겠군요.
물고기 잡고 논밭에서 농사지으며 삼도수군을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의 후예가 맞는가 봅니다 크크;;;;
사티레브
12/06/09 22:41
수정 아이콘
오 이런 역사의 각론같은 역사 좋아요!
Dreamlike
12/06/09 23:38
수정 아이콘
아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해군의 창군 과정 이네요 ㅠㅠ 이런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감사하네요 정말 [m]
소년A*
12/06/10 00:22
수정 아이콘
아... 이 다음이 바로 그 이야기군요. 그 눈물 없이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그 일화...
언제나 이런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12/06/10 00:38
수정 아이콘
해군제독이 국왕(?)에게 하사금을 받아서 직접 돈들고 배를 사러 가다니... 이 무슨 대항해시대 게임도 아니고..
양정인
12/06/10 01:10
수정 아이콘
그놈의 '돈' 이 뭔지 ㅠㅠ
지금도 그 놈의 '돈' 때문에 하고싶은 훈련도 못하고 ㅠㅠ
57thDiver
12/06/10 07:41
수정 아이콘
백두산 마스트는 해사에 아직 남아있죠.
우리나라도 어서 대양해군으로 나아가길..
복제자
12/06/10 10:18
수정 아이콘
아아... 국방일보에서 일주일에 무조건 적어도 한번이상은 언급되는 그분 이야기군요 ㅠㅠ

아니 일주일이 아니라 3일에 한번이려나...
12/06/10 13:27
수정 아이콘
저렇게 어렵게 들어온 pcc ㅠ_ㅠ 그런데 막상 전쟁터지니 공짜로 그냥 퍼다주는 흑흑흑 ㅠ_ㅠ
그래도 백두산함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공산화 될 확률이 상당히 높아질뻔했죠 정말 백두산함은 값어치 이상활약했던 고마운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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