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여 살면 다툼은 항상 있는 법,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판단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래서 한자에도 일찍이 갑골문에서 죄인, 송사 등의 글자가 있었다. 그 흔적인, 죄인 두 사람이 서로 송사한다는 뜻의 송사할 변(辡) 그 자체는 현대에는 쓰이지 않으나 이에서 파생된 말씀 변(辯)은 지금도 법정에 가면 변호사(辯護士)라는 존재로 찾을 수 있다.
법정에 가면 원고와 피고가 있고 이들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있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문제를 종결하는 판사(判事)가 있다. 오늘은 판사에 들어가는 판단할 판(判) 자를 살펴보겠다.
판단할 판(判) 자는 판단하다, 판결하다, 분별하다, 나누다 등의 뜻이 있는 한자로, 절반 반(半)이 뜻과 소리를 나타내고 칼 도(刂=刀)가 뜻을 나타내는 회의자 겸 형성자다.
왼쪽부터 判의 소전, 예서. 출처: 小學堂
반 반(半)은 춘추시대부터 금문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여덟 팔(八)이 뜻과 소리를 나타내고 소 우(牛)가 뜻을 나타내는 회의자 겸 형성자다. 八의 원 뜻은 지금의 '여덟'이 아니고 '나누다'다.
왼쪽부터 半의 금문, 소전, 예서. 출처: 小學堂
半은 소를 나눈다는 데에서 본디 잘라서 연다는 뜻이었고, 그 뜻으로 고전 한문에서 쓰인 적이 있는 判의 원래 형태였다. 나중에 半이 주로 절반의 뜻으로 쓰이면서 원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刀를 덧붙인 게 判이지만, 判도 지금은 원래의 뜻보다는 확장된 인신의인 '판단하다'나 '판결하다'로 주로 쓰이는 형국이다.
半은 소를 쪼개면 절반으로 나뉜다는 점에서 '반으로 나누다'나 '절반'의 뜻으로 바뀌었다. 이 소는 物(물건 물)에서 보다시피 그냥 소가 아니라 물건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금문에서는 소 대신 斗(말 두)나 升(되 승)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절반이라는 양적인 뜻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소 대신 도량형의 기준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八과 斗가 결합한 半의 다른 형태. 출처: 漢語多功能字庫
이제 半에서 파생된 글자들을 살펴보자.
半(반 반): 과반(過半), 반(半), 반도(半島) 등, 어문회 준6급
반(半)으로 나뉜 사과. 출처: needpix.com
伴(짝 반): 반려(伴侶), 수반(隨伴) 등, 어문회 3급
사람이든 동물이든, 우리에겐 반려자(伴侶者)가 필요하다. 출처: your-daily-bread.com
判(판단할 판): 판결(判決), 재판(裁判) 등, 어문회 4급
叛(배반할 반): 반란(叛亂), 배반(背叛) 등, 어문회 3급
프랑스 혁명의 시작, 바스티유 감옥 습격.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拌(버릴 반): 교반(攪拌) 등, 어문회 1급화학실험에서 액체를 휘저을 때 쓰는 교반기(攪拌器).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泮(얼음풀릴/학교 반): 반촌(泮村), 입반(入泮) 등, 어문회 준특급18세기 조선 성균관을 묘사한 반궁도(泮宮圖). 출처: 우리역사넷
畔(밭두둑 반): 반묘(畔畝), 호반(湖畔) 등, 어문회 1급백두산 천지. 호수의 가를 호반(湖畔)이라 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絆(얽어맬 반): 각반(脚絆), 반창고(絆瘡膏) 등, 어문회 1급
상처에 붙이는 반창고(絆瘡膏).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胖(살찔 반): 반대(胖大), 심광체반(心廣體胖) 등, 어문회 특급
半(반 반)과 이에서 파생된 한자들.
대개는 半이 그저 소리를 나타낼 뿐 뜻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짜맞추기지만, 伴(짝 반)은 사람(人)에게 짝이란 나의 반(半)쪽 같은 존재 아닐까? 畔(밭두둑 반)은 밭두둑이란 밭을 쪼개는(半) 경계가 되겠다. 叛과 泮은 실제로 半의 뜻과 관계가 있는데 후술하겠다.
이 중에서 叛은 설문해자의 많은 판본에서 反이 소리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전통문화연구회의 《역주 설문해자주 3》에서는 단옥재의 주석에 근거해 半이 소리를 나타낸다고 하므로 이번 편에 포함했다. 反이 소리를 나타낸다면 叛 대신 反이 들어가는 다른 글자를 쓸 수도 있는데, 오히려 半이 들어가는 畔이 '배반하다'의 뜻으로 叛을 가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설문해자에서는 '반(半)으로 나뉘어 뒤집힌다(反)'라는 뜻으로 해설하는데, 한 집단이 반씩 나뉘어 한쪽이 뒤집히면 서로 배반하는 꼴이 된다.
泮은 어문회에서도 준특급에 나오는 만큼 상당히 낯선 한자라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원래는 옛날 중국에서 봉건제를 시행할 당시 왕과 왕 밑의 영주인 제후 사이에 차등을 둔 데서 비롯했다. 왕의 학교는 사방을 물로 두르게 했고, 제후의 학교는 서쪽과 남쪽만을 물로 두르게 했다. 이렇게 절반만 물로 둘렀기 때문에 제후의 학교는 半과 水를 합해서 반궁(泮宮)이라 했다. 한국의 역대 국가들도 중화 국가의 제후국을 자처했기 때문에 국립 최고 학교도 반궁이라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반궁은 성균관의 별칭으로 쓰인다. 위의 반촌이란 단어도 성균관 주변에서 성균관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말한다.
더 낯선 胖은 본디 제사지낼 때 고기 반쪽을 뜻하는 글자라서 제사 고기를 뜻하는 肉(고기 육)이 뜻을 나타내고 半이 뜻과 소리를 둘 다 다 나타내는 회의자 겸 형성자다. 그런데 유교 경전인 《예기》와 그 일부를 떼어낸 《대학》에서 '심광체반'(心廣體胖)이라는 표현으로 '마음이 넓으면 몸이 편안하다'를 서술한 이래 '편안하다'는 뜻이 붙었고, 여기에서 '살찌다'라는 뜻까지 나왔다. 한국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지만, 중국어에서는 비만을 '페이팡'(肥胖, 한국식으로는 '비반')이라고 할 만큼 여전히 잘 쓰고 있다.
요약
判(판단할 판)은 본래 '나누다'를 뜻하는 한자로, 半(반 반)과 刀(칼 도)가 결합한 글자다.
半(반 반)에서 伴(짝 반)·判(판단할 판)·叛(배반할 반)·拌(버릴 반)·泮(학교 반)·畔(밭두둑 반)·絆(얽어맬 반)·胖(살찔 반)이 파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