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많이 봤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느꼈던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특징은 따뜻하면서도 냉담한 이중적 시선이었습니다. 묘하게 따뜻한 듯, 묘하게 온기있는 듯하면서도 슬쩍슬쩍 드러나는 객관적인 시선이나, 혹은 외부의 시선들이 개입되며 영화의 전체 분위기에 대해 의문점을 남기는 영화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괴물>의 구조는 같은 시간의 다른 시각을 보여줍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정 구간을 3번 보여주면서 퍼즐을 짜맞추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요. 그리고, 세 겹의 퍼즐을 끼워맞췄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어렴풋한 슬픔입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가진 분위기는 그런 점에서 전작들과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세 개입니다. 엄마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야기, 선생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야기. 재밌는 건, 엄마와 선생의 이야기는 퍼즐의 힌트만 보여주는 셈으로 그려진다는 점이겠죠. 영화의 가장 큰 그림은, 그리고 영화의 가장 큰 우주는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영화의 모든 어른들은 주석처리되고, 아이들만 남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중간까지는 <더 헌트> 내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류의 영화인줄 알았어요. 그렇기에 모든 잘못과 갈등을 주석처리 해버린 결말은 괜찮다 싶으면서도 조금은 아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또 결함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긴 하겠지요.
지나칠 정도로 팽창하는 우주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종말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되려 '빅 크런치'가 올 거라는 상황에서 낡은 기차에 앉아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냉소적인 말들을 할 뿐. 그렇기에, 영화가 끝에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영화의 끝이 그냥 여기서, 이대로 해피엔딩을 내줬으면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어찌보면 영화의 감정이 '묘한' 슬픔과 서글픔인데는 적절한 선에서 끊은 엔딩의 힘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떤 영화는 배우의 얼굴로 기억되고는 합니다. 저에겐 <그녀>의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그런 종류인데요, 이 영화, <괴물>에서도 두 아이의 얼굴이 꽤 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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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저녁에 한번 더 보러 갑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폭우 속에서 망연자실한 사람 중에 '요리'의 아버지가 있던 장면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이의 특정 모습, 특정 성향이 괴물로 겹쳐보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소중한 자녀였던건지...
한국에서 리메이크 한다면 요리 아버지 역할로는 배우 윤경호씨가 잘 어울리겠다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