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둔 홍진호에 대한 얘기는 이미 앞서 한 바가 있으나(
https://pgr21.com/?b=6&n=44685), 그 글을 작성하고 나서도 뭔가 찝찝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글을 쓸때 마치 칼럼을 투고한다는 기분으로, 정말 언제 다시 읽어도 부끄럽지 않을정도로 정성들여서 글을 쓰자라는 자세로 글쓰기에 임합니다. 하나의 별난 취미생활이라고나 할까요. 저 글을 쓸때에도 그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기억을 더듬어내 만든 결과물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찝찝한 느낌과 불완전한 결과물이라는 느낌을 받은 이유는, 실제로 제가 정말로 홍진호의 은퇴를 보며 얘기하고 싶었던것들을 많이 하지 못하였고, 또 제 진심과 많이 동떨어진 글이 만들어 진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칼럼처럼 쓸려면 짧고 간결해야 한다' 라는 제 생각은 지켰으되, 그만큼 할 얘길 많이 못한거죠. 그러면서 홍진호라는 인물을 회고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를 내뱉어야 하는게 아닌가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중복주제지만 어쨌든 숫자 2와 관련이 너무나도 깊은 선수니까, 은퇴를 기념하는 글도 2개 적어주면 나쁠게 없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저는 다시, 그리고 두번 다시는 없을 홍진호에 대한 잡설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마 두서 전혀 없는 굉장히 긴 글이 될겁니다. 시간 때우기는 좋을수도 있겠네요.
"10년째 콩빠," "코카콜라배때 부터 콩빠"를 자청했던 저지만 사실 당시 홍진호를 코카콜라배에서 응원한 이유는 그에 대한 애정보다는, 고백하건데 임요환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더 앞섰기 때문이였습니다. 그 이유도 다른것도 아니라 임요환이 당시 제가 가장 좋아하던 기욤패트리의 아성을 넘어 E-Sports의 최대 스타, 가장 뛰어난 선수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임요환을 무찔러줬으면 하는, 반-임요환의 스탠스에서 출발한게 홍진호였습니다. 그 날 저는 스타역사에 길이남을 최고의 다전제 5경기를 목격하였고, 그 경기에서 느껴지던 홍진호의 패기, 승부사적인 면모, 전략, 기백.. 이런것들이 분명 매력적인 게이머였습니다. 졌지만 즐거웠다. 아마 응원하던 누군가가 지고도 그때만큼 뿌듯했던 기억은 없을겁니다.
그렇게 매력적인 게이머로만 여겨지던 홍진호를 본격적으로 응원하게 된것은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또다른 준우승을 차지했을 무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개인리그 5회 준우승" 이전에, 홍진호는 2002년 1월에 성학승을 상대로 KPGA 12월 챔피언쉽 결승전에서 맡붙게 됩니다. 일종의 왕중왕전의 느낌으로 기억하는데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페이스와 두대회 연속 스타리그 4강을 달성했던 홍진호는 이 결승에서 마저 성학승에게 3:2로 패배하게 됩니다. 아마 홍진호가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사실 이 무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때, 우승을 하고 기뻐하는 성학승선수의 옆에서 또 한번 씁쓸해 하는 홍진호를 보면서 내 스스로도 어느정도의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우승을 또 못하다니! 내가 홍진호 우승할때까지 계속 홍진호 응원만 해볼까?" 그땐 정말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게 악마와의 10년짜리 노예계약일줄은....
올드팬들을 다들 잘 아시겠지만, 사실 홍진호는 개인리그 우승경험이 있습니다. 2002년 2월 조정현과의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말이죠. 사실 그 당시 추세만 하더라도 왕중왕전이야 말로 한시즌을 마무리하는 대회라는, 포스트시즌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기욤패트리가 최강자로 자리매김할수 있었던것도 하나로통신배 투니버스 스타리그 우승보다는 온게임넷 Final 2000에서 국기봉을 상대로 거둔 역스윕의 몫이 훨씬 컸다고 공언할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음 시즌 1번시드는 김동수가 아닌 기욤패트리였고, 홍진호 역시 네이트배 1번시드였던걸 생각해보면 분명 홍진호가 우승했던 그 시점만 하더라도 그의 "무관의 제왕" 딱지는 떼도 좋을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시간이 흘러 왕중왕전은 이벤트전이 맞다라고 정의가 내려지고, 2001년 포스트시즌 우승자였던 홍진호는 그저 또 다른 이벤트전의 승자로 불러졌기에 애석합니다만, 한편으로는 또 생각해봅니다. "만약 역사가 바뀌어 정말 홍진호가 개인리그 우승자로 인정됐다면, 지금의 홍진호는 존재할수 있었을까."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의 기간동안 홍진호를 응원한다는것은 팬으로서 참으로 즐거운 일이였습니다. 다들 좋아하는 임요환, 최강자 이윤열, 남성미 넘치는 박정석과 김동수에 비해 홍진호의 캐릭터라는것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참으로(믿긴 힘들겠지만!) 어중간했습니다. 당시 저그는 개인리그에서 대다수였지만 많은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종족이였고, 우승을 해본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물량, 전략, 컨트롤 - 어떤 한 분야에서 철저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사람도 아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진호가 참으로 멋있었던 이유는 그의 호감적인 외모부터 시작해서 누구와 상대해도 꿀리지 않는 실력, 그리고 "매너홍"라는 얘기를 들을만큼 팬들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그였습니다. 임빠와 임까가 대립하고, 달빠와 임빠가 온게임넷 게시판에서 서로 물어뜯어도 홍진호는 언제나 인정받았고 또 사랑받았습니다. 전성기때의 홍진호는 축구선수로 얘기하면 카카정도로 비교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물론 월드컵, 챔스, 리그 우승을 못한 카카지만요.
특히 뭐니뭐니해도 2003년의 홍진호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2년 모든 시즌에서 최소 4강이상 입상했던 홍진호의 꾸준함은 꾸준함을 넘어 압도적으로 바뀌던 시점이였으니까요. 토스가 몰살당하고 테란과 저그가 양분하던 2003년에서 저그의 자존심은 조용호-홍진호-박경락 / 소위 조진락이였습니다. 이 셋중에서도 우두머리는 홍진호라는 얘기가 다수였습니다. 특히 홍진호는 박경락에게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스타리그에서 승승장구 하는데, 그것을 상징하는 게임이 바로 올림푸스 스타리그 4강 1차전입니다. 기요틴의 세로방향에서 펼쳐진 이 경기에서 홍진호는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패스트챔버 공1업 저글링 올인빌드를 준비하고, 그것을 눈치챈 박경락은 성큰을 3-4개씩 건설하면서 방어태세에 돌입합니다. "이것만 막으면 내가 이긴다." 그게 박경락의 생각이였고 우리 모두의 생각이였습니다. 들킨 전략이니까 아마 왠만하면 막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홍진호의 링공업은 체감상 너무나도 빠르게 이루어졌고 이내 박경락의 기지를 초토화시킵니다. 말그래도 기세에서 찍어누른 압승. 이 경기를 시작으로로 홍진호는 박경락을 3:0으로 완파하고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결승에서 그를 기다리던 상대는 영원한 숙적 임요환을 꺾고 올라온 서지훈이였습니다. 임진록을 기대했던 수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지만 동시에 홍진호팬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드디어 우승을 거둘때가 왔다라는 기대감이 팽배했습니다. 2003년 7월 13일 일요일에 펼쳐졌던 이 다전제의 첫 경기는 지금도 역대 최고의 명맵반열에 올라있는 노스텔지아였습니다. 앞마당 가스가 없지만 본진 9미네랄의 이점이 있는 이 맵에서 홍진호가 들고온 전략은 9드론후 앞마당. 그의 전략은 제대로 맞아들었고 주도권을 잡아가던 순간... 서지훈선수의 컴퓨터의 사운드 문재로 경기가 중단되었고 약 40여분의 점검후에 재경기선언이 되었습니다. 9드론 앞마당이 어느정도의 도박성 빌드인것을 생각하면 홍진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였고, 결국 그는 5경기에서 원래 쓸려고 했던 빌드를 가져와 다시 승리를 거두지만 패 하나를 더 보여준 셈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기분좋은 첫승을 가진 홍진호는 2경기에 돌입합니다. 맵은 최초의 컨셉형 맵이라고 불리우던 비프로스트 2.0. 서지훈선수가 가장 승률이 좋았던 맵이라 "서프로스트"라는 별명도 붙혀진걸로 기억합니다. 경기는 치고받는 공방전속에 홍진호의 스탑럴커가 적재적소에 터지면서 승기를 잡고 디파일러까지 떠서 서지훈의 본진을 공략할려던 참까지 왔습니다. 테란의 진형에 다크스웜이 쳐지기 시작했고, 홍진호의 저글링들은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으니 그의 승리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이던 순간.... 드랍쉽 한대분량 조금 넘는정도의 마린-메딕 특공부대가 비프로스트의 12시를 지나 홍진호의 제 2멀티, 그리고 본진을 타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저글링 랠리를 찍어놓고 극도로 가난하게 운영하던 홍진호였던지라 멀티의 견제는 예상치도 못했었고 또 너무나 뼈아팠습니다. 결국 홍진호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2:0을 눈앞에 두고 GG를 선언합니다. 게임스코어 1:1.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친 사람의 기분이 편할리가 없습니다. 기요틴에서의 3경기도 그래서 그런지 홍진호는 수세에 몰린채 경기를 시작합니다. 5시-7시에서의 경기에서 서지훈의 드랍쉽 담넘기가 계속해서 재미를 보면서 휘둘리던 상황. 그러나 휘둘리고만 있으면 홍진호가 아닙니다. 서지훈의 한방병력이 진출하는걸 틈타 오버로드의 기습드랍이 효과를 봅니다. 화력 대 화력싸움에서 상대하기 힘든 홍진호는 상대방의 눈을 멀게 하는 작전으로 컴셋-베슬을 잘라주기 시작하면서, 두선수는 처절한 승부로 돌입합니다. "이거 누구 목소리야?" 긴박하던 상황을 하나하나 일일이 중계하던 전용준 캐스터의 목이 얼마나 쉬었으면 해설하던 사람이 저런 말을 했을까요. 결국 이 경기는 럴커와 스커지를 활용한 홍진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현장의 긴장감과 처절함은 이 글에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벅찰정도로 엄청난 경기였습니다.
생각해보면 홍진호의 경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군요. 바로 처절함입니다. 홍진호는 항상 주도권을 쥘려 하며 행여나 먼저 선빵을 맞으면 방어를 하지 않고 같이 크로스 카운터 날리는것을 너무나도 즐겨하던 선수였습니다. 폭풍드랍, 빈집러쉬는 홍진호의 특기였는데 그렇기에 엘리전 양상이 많이 나오면서 처절하고 재미난 경기가 많이 연출되었던거죠. 어쩌면 이 이유, 저 이유 다 갔다붙혀도 제가 결국 홍진호의 팬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게임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였나 생각해봅니다.
3차전에서 정말 스타에서 보여줄수 있는 최고의 처절한 게임을 펼친 홍진호는 이후 4,5 차전에서 패배하면서 아쉽게 우승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다시 우승 좌절. 안타까움은 왜 없었겠습니까만,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애석한 마음이 강하게 들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그가 정상에 있는 한 기회는 계속해서 주어질것이고, 결국엔 우승을 하지 않을까 하는 굳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게 6시즌을 연속으로 4강진출한 선수에게 슬럼프가 언제 오기냐 하겠냐라는 생각이였던 거죠. 왜 그때는 그렇게 당연히 홍진호가 결국엔 우승할꺼라 생각했는지...
안타까움을 논하는데 있어서 그 해 가을도 빼먹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전승준우승 시즌입니다만, 실제로 그때의 홍진호는 역사상 모든 저그를 통틀어봐도 본 적이 없었던 강력함을 지닌, 약점없는 선수였습니다. 스타리그 연속 4강진출 기록은 깨졌습니다만 어쨌든 맵탓이 컸다라는 여론이 강했으니까요. 그러나 MSL 결승전을 얼마 앞두고 홍진호는 처음 올라간 듀얼토너먼트에서 조정현과 베르트랑에게 각각 패배하면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스타리그 진출에 실패합니다. 어쩌면 홍진호의 전성기가 영원하지 못할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건, 정말 놀랍게도 그때가 처음이였습니다. 망치로 강하게 한대 맞은 느낌이였습니다. 항상 이기고 잘하던 게이머였기에 스타리그 진출도 당연하게 느껴졌건만, 사실 그게 그렇게 쉬운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은것에 대해서.
그래서 그런지 TG삼보배의 준우승만큼 충격적이고 안타까웠던, 그리고 비통했던 적이 없습니다. 아마 3:0의 스코어보다, 다섯번째 준우승이라는 사실보다, 우승을 내준 상대가 그 이전까지는 종적 자체가 없었던 최연성이라는 새로운 괴물이였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임요환/이윤열/박정석/홍진호. 이 넷이 다 해먹던 스타판에 이제 최연성이 있고, 강민이 있고, 박성준이 있었습니다. 더이상 홍진호의 우승을 기대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 된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저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홍진호가 가장 뜨거웠던 그 해가 채 가기도 전에, 스타판의 세대교체는 어느새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박성준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그가 저그 첫우승을 거머쥐던 시절의 느낌도 털어놔야 겠군요. 솔직히 기뻤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저그는 정말 저주받은 종족인줄 알았거든요. "저그의 첫우승은 홍진호가 해야돼!" 라는 생각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최연성을 3:2로 역스윕하던 순간 박성준선수 또한 저그의 첫우승의 주인공이 되기에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그가 우승할때 해설자들이 입모아 "홍진호의 업그레이드," "홍진호와 조용호의 만남" 이라는 수식어는 그닥 반갑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잘하는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응원하는 선수에 대한 자부심이 그런 표현을 거부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EVER04 8강에서 박성준을 만나 2:0으로 승리했을때는 박성준 선수가 우승했을때 보다 조금 더 기뻤습니다. 오랜만에 4강, 그리고 홍진호는 아직 세대교체의 바람을 맞지 않았다는 두가지 사실을 확인해주었으니까요.
이쯤되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다들 아실것 같습니다.... 네, 삼연벙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그날 사정이 있어서 생방송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스포일러를 최대한 당하지 않은채 다음날까지 기다렸습니다. 오전에 메신저에 로그인 하자마자 저와 같은 콩빠무리들에 저에게 죽일듯한 기세로 말들을 거는것이였습니다. 말걸지 말라고, 나 경기 아직 안봤다고 빛의속도로 얘기하고 로그아웃, 그리고 경기를 다운받기 시작했습니다.
아, 근데, 다운로드가 평소보다 너무 빨리 끝나는겁니다. 어, 이상하다 이럴리 없는데. 파일이 잘못됐나? 아님 인터넷 속도가 급빨라졌나? 라는 생각에 1경기부터 챙겨봤습니다. 그제서야 모든것을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파일이 잘못된것도 아니고, 인터넷 속도가 급상승 한것도 아니며, 동시에 왜 메신저에 그렇게 불이 붙었던건지.
신기한게, 사실 그 날 삼연벙을 목격한 직후의 느낌이 어땠는지 최대한 떠올려볼려해도 기억이 잘 안납니다. 임요환에 대한 분노? 홍진호에 대한 안타까움? 또 결승진출을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좌절? 아니라면 그냥 이 사태가 발생한것에 대한 일종의 무기력? 많은 감정이 오간것 같습니다만, 깊게 곱씹어 보면 아마 가장 큰 감정은 이것이였습니다.
"후회"
홍진호의 팬이 된것을 후회한다. 그러니까 코카콜라배 이후, 아니면 KPGA 12월 결승이후, 콩빠가 된걸 스스로 선언한 이후에 느꼈던 최초의 감정이자 가장 비참한 느낌이였습니다. 분노, 안타까움, 좌절, 무기력, 짜증...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치 홍진호를 좋아해서 생긴 감정이였던겁니다. 솔직히 부산에 태어나서 롯데빠로 살아가는것에 대해 후회해본적은 참 많고 지금도 가끔 하고 있습니다만, 홍진호에게는 이런 감정이 처음이였습니다. 그때부터 스타가 보기 싫어졌고, 보더라도 홍진호를 열심히 응원하던때처럼 볼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스타 커뮤니티의 판도도 미묘하게 바뀝니다. 2004년 스갤 태동이후,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까임의 중심에는 임요환이 있었고 임요환이 있었으며 임요환도 있었습니다. 머리크기로 까이고, 장밍루한테 졌다고 까이고, 억대연봉인데 벤치에 앉아있다고 까이고, 삼연벙 썼다고도 까이다가 어느순간부터 "근데 당한놈이 더 멍청이지" 하면서 홍진호가 까임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동시에 콩간지와 콩댄스가 각광받게 되면서 각종 짤방들과 합성들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정은 2005년이였습니다. WCG 어뷰징으로 악명이 높아져 "어뷰콩"이라는 별명이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수선수에게 2:0으로 예선에서 완패, 그 다음날 올라온 "육회식사후 설사"라는 기사.... 예전같은 성적도 보여주지 못하던 홍진호는 이제 게임으로 즐거움을 주는 선수가 아닌 행동으로 웃음을 주는 광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최연성/이윤열을 넘어 박태민과 박성준, 그리고 마재윤이 양지에서 활기를 치고 있다면 음지에서 계속해서 까이던건 홍진호였습니다. 깔것 이것저것 찾다보니 결국 그의 준우승경력도 까이기 시작한건 말도 할것 없습니다.
네, 솔직히 이 무렵부터 스타 많이 안봤습니다. 2006년에는 아예 보질 않았습니다. 사실 홍진호가 4강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욱과의 4강전은 생방으로 봤지만, 그 외에는 보질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말로 그 동안 보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왔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홍진호가 몰락하고 웃음거리고 변질되기 시작한 무렵부터 보지 않았던걸로 봐서 결국 직접적인 원인은 홍진호선수의 부진이 맞나봅니다.
그렇게 한 3년정도가 흘렀습니다. 스타판의 소식은 어느정도로 알고있었지만 홍진호의 이름은 경기장 어디에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여전히 까임의 대상이 된다는것과 동시에 간간히 나와서 1,2승을 챙겼는데 그게 고작이라는 말도. 솔직히 저 역시 사적인 자리에서는 콩까는 재미로 분위기를 띄우고는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던 와중에 홍진호선수가 공군에 입대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임요환이 제대할 무렵과 미묘하게 맞물려서 바통터치 한다는 말이 있고, 무엇보다도 비교적 약팀인 공군에 가면 홍진호의 경기를 볼수 있지 않을까라는 얘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11월의 어느날, 책상정리도중 서랍 깊숙히 잠들어있던, 몇년전부터 쓰지 않던 외장하드 하나 발견했었습니다. 옛생각이 새록새록 나서 열어보니 홍진호의 코카콜라배, 그리고 올림푸스배 시절 경기들을 모아둔 폴더가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3년간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조롱하기만 하던 홍진호라는 사람이, 원래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전율을 선사하던 최고의 프로게이머중 한명이였다라는 사실을. PGR 추게에 있는 '홍진호는 기억될까'(
https://pgr21.com/?b=1&n=484) 라는 글은, 그렇게 잊고 있었던 홍진호라는 프로게이머를 다시 되찾기 위한 제 스스로의 숙제이기도 했습니다.
제 글 덕분인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도 그 무렵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무렵부터 홍진호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게 된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제가 살면서 제일 잘한일중 하나가 '홍진호를 기억될까'라는 글을 썼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간혹 해봅니다.
공군에서의 홍진호를 지켜보는것, 처음에는 정말 답답했다고 고백합니다. 프로브 한기에 드론 2기가 죽고, 센터게이트에 손 하나 못써보고 지지를 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좀 안쓰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홍진호의 이름이 엔트리 예고에 올라오면, 그날 저녁(혹은 낮)에는 아무런 약속을 잡지 않은채 홍진호의 경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더라도 어쨌든 그가 게임하는 모습을 보는게, 7~8년전의 저를 떠올리게 하고 또 혹시 모를 기적을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2009년 6월 20일 경기는 그래서 참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순간적인 환호와 감동으로 따지면 아마 콩빠가 된이후 최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홍진호가, 김택용을, 그것도 가장 홍진호스러운 스타일로, 역전승을. 리버를 잡고 저글링이 캐논을 부순후 날라오던 뮤탈리스크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내가 이걸 볼려고 어쩌면 10년간 홍진호팬을 한걸지도 모르겠구나" 라는 묘한 생각과 함께.
그 후의 홍진호는 예전같은 강력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간혹 그때의 감동을 되새겨주곤 했습니다. 신상문, 김윤환, 진영화, 전상욱, 그리고 이제동. 홍진호가 공군에서 승리를 거둔 몇몇 상대들입니다. 이겼던 경기가 손꼽을 만큼 부족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1승 1승이 더 감동이였고 가치있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공군에서의 홍진호를 지켜보는것 또한 그래서 참 즐거웠습니다. 당연히 지겠지라는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라는 기대감이 언제나 들게 해주었고, 실제로 그것이 실행될때의 쾌감이란 항상 옛날의 홍진호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전역하기 직전 마지막 10경기 4승 6패. 전 홍진호가 그래서 KT에 복귀하면 종종히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꺼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제대 이후 단 한번의 경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공군에서만큼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홍진호 본인 스스로 많이 지쳐버렸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서 이젠 슬슬 선수생활을 접을때가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일 은퇴식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밝히지만 지난 10년간 저는 매일같이 홍진호를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에게 실망한적도 많고, 안타깝다고 느끼던 때, 심지어는 그의 팬이 된걸 후회했던적도 있다고 얘기하는게 더 진심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것 같습니다. 애정에서 애증의, 결국엔 다시 기억되기에는 내 인생 최고의 프로게이머로. 지금 홍진호를 생각하면 지난 짧지 않은 10년간, 내 성장과 동시에 그를 지켜보던 시간들이 찰나와도 같이 느껴집니다. 아이돌을 그렇게 좋아해본적도 없고, 연예인이라고는 좋아해도 그냥 평범하게 좋다정도의 느낌만 받는데, 이렇게 홍진호에 대한 제 기억들을 일일히 나열해 보니, 참으로 희로애락이 함께한 10년이였구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이런식으로 제 안의 모든 기억들을 끄집어내니 확실히 보내는 마음은 더 시원하고 후련하네요. 이젠 정말 프로게이머 홍진호를 보낼 준비가 된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잡설을 늘어놓았으니 이젠 지겨워서라도 다시는 홍진호에 대한 글을 쓸 일은 없겠지요. 안녕 진호형, 혹시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술 한잔 해요. 술은 제가 살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