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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7/07/16 22:59:16 |
Name |
kama |
Subject |
[연재]Daydreamer - 14. 이방인(3) |
실내공간에 일정 수 이상의 인원이 몰려있으면 아무리 환기를 잘해놓고 냉방 기구를 구비해놓았다 하더라도 체온 때문에 실내 온도는 상승할 수밖에 없다. 내부를 꽉 채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하여 눈에 보일 정도로 열기를 내뿜고 있다면 더더욱. 지금 예선이 치러지고 있는 PC방은 시설 측면에서 나무랄 곳이 없는 장소였지만 그러한 내부의 열기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아아, 시드 받아놓기 정말 잘했어.”
성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선수들에게 휴식시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부담이 가는 연속된 예선 현장에서 시간이 주어진다고 맘 편히 밖을 돌아다니거나 할 수는 없는 법. 다음 상대에 대한 예측, 자신이 가져온 전략의 검토와 선택, 그리고 이를 통한 가상의 시합까지. 머릿속은 오히려 시합 때 이상으로 복잡해지고 다급해지기 마련이고 오히려 불안감과 긴장으로 더욱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나마 조가 앞쪽에 편성되어 있는 선수들은 형편이 좋은 편이다. 떨어지던, 올라가던 어쨌든 빨리 결과가 나오니까. 가장 먼저 치러지는 A, B조를 통틀어서 본선에 올라가는 것은 단 한 명. 뒤쪽 조 선수들은 패배로 짐을 싸서 쓸쓸히 일어나는 선수들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되며 불안감은 더 커져간다. 어느 스포츠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자신의 실력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물론 그건 상당히 힘든 일. 처음 도착했을 때는 여유를 부리며 그와 장난을 치기도 했던 베테랑 김진호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말이 적어지고 얼굴이 굳어지는 등 분위기에 잠식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 이방인은 또 하나의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작 자기 자신은 그걸 모르는 듯 보이지만.
“맹자 왈,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라 했지.”
“그건 공자에요.”
“음, 역시 성인끼리는 통하는 법이 있단 말이야.”
“그거랑은 상관없어요.”
오크가 트롤헤드헌터의 물량으로 나이트엘프를 찍어 누르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눴던 대화들. 예선이 진행되면 패배의 아쉬움은 증가되고, 승부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 일본인은 언제나와 같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시합에 임했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양상 끝에 다시 승리했다.
“말 그대로 즐기고 있어. 승패에는 처음부터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상대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혼자 신나하더군.”
기사 작성과 함께 통역 일까지 같이 맡고 있는 윤하 누님은 그렇게 말했다. 시합이 끝난 후에 나누는 이야기도 상대가 어떻게 반응해서 재밌었느니 하는 식의 내용들뿐이라고. 원래부터 이 안에 있는 인물 중 가장 이질적인 존재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독특한 존재였다. 문제는, 그걸 깨달은 사람이 자신과 같은 번외인들 말고는 없다는 점이다.
“머리가 굳었어, 모두.”
현호는 머리를 살며시 두드리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방금 전 시합을 봐도 알 수가 있지. 트롤 헤드헌터란 유닛은 장단점이 극명해. 그리고 이를 이용하면 타개책이야 많이 있어. 찌르기로 시간을 벌면서 상성인 곰으로 전환을 하던가, 범위마법이 있는 핏 로드를 세 번째 영웅으로 선택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나엘은 그대로 전형적인 매스(Mass)탈론 체제를 고집했어. GG를 치는 순간까지.”
“자신이 준비해온 플레이에 너무 목을 맸군요.”
“그래, 하긴 어쩔 수 없을 것이야. 무엇보다 연습 때 트롤 버서커를 사용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니까. 쳇, 그 정도 적응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정상을 노린다는 것인지.”
연습의 함정, 그는 그렇게 말했고 성훈 역시 그 의미를 이해했다. 물론 연습은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도한 연습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가뜩이나 워3는 마땅한 연습상대를 구하기가 힘들거든.”
제한된 맵, 제한된 전략. 그리고 제한된 연습 상대. 이런 상태에서 연습은 다각도에서 이루어지기 힘들다. 플레이는 단순해지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상이라 생각되는 패턴과 운영과 타이밍이 단단하게 박힌다. 가장 효율적인 게임 방식. 그것은 승리로 향한 가장 최적의 코스처럼 보여 진다. 상대가 자신의 생각처럼 움직여 주는 경우에는.
“결국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야. 상대는 프로그래밍처럼 틀에 맞게 움직여 주진 않는다고.”
연습대로, 실제로 대회에서 많은 상대들과 겨루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뜻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처음부터 짜여진 대로만 완벽하게 수행하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세계가 아닌 것이다. 어느 스포츠, 어느 세계이건 간에 최상위권에 속해있는 인간들은 그렇게 녹녹한 부류가 아니다.
물론 그 자신도 포함해서.
‘왜 현호 형이 그 일본인에게 주목하는지를 알겠어.’
한국 워크래프트3계, 아니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문제는 결국 정체다. 최상위권의 인물들이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격파하며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선수층의 얇은 현 상황에서 새로운 흐름이 이어지지 않으면 워크래프트3 자체가 붕괴되어버린다. 가뜩이나 군대라는 현실적인 벽과 부딪쳐야하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단순히 사람 이름과 얼굴이 바뀌는 것 정도로는 진정한 세대교체라 할 수가 없다. 새로운 흐름을 가지고 와서 기존의 선수들에게도 변화를 줄 수 있는 그런 선수가 필요하다.
‘새로운 개념, 새로운 운영.......그리고 그것을 받쳐줄 실력.’
그래, 실력. 이게 중요하다. 아무리 독창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선수라 하더라도 그것을 승리로 이끌 줄을 모른다면 승부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든 면에서 스즈키 유우지는 가장 확실한 존재가 된다. 처음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새로운 내용을 보여줬기에 상대가 알아서 쓰러졌던 것이라고. 하지만 게임이 반복되고 결국 B조의 1위를 차지한 지금에 와서는 달라졌다. 운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이지만 교전 시에 보여준 재능은 남다르다. 무엇보다 자신이 싸워야할 시기와 피해야할 시기의 판단은 정확했다. 고정된 패턴이 아니고 종족마저 랜덤인 상황이란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만약 현재의 독창성을 유지하면서 세세한 운영과 컨트롤을 가다듬을 수만 있다면 실로 놀라운 신성(新星)의 탄생으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들어.’
불쾌한 이유는 국적이었다. 일본인이 그가 많은 한국 선수들을 제치고 올라서다니. 굳이 일본과 한국의 과거사에 얽힌 원한관계나 그로 인한 현재의 앙숙 관계까지 떠올릴 필요도 없다. 세계 E-스포츠의 가운데에 서있는 한국에서도 나오지 않은 인재가 가장 척박한 지역인 일본에서 나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할 만 하다. 사람 자체는 좋아보였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음, 그러고 보니.”
B조 1위를 했다고 해서 본선 진출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각 조 1위끼리 최종 결정전을 펼치게 되고 거기서도 이겨야 본선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아직 그 일본인에게 이길 사람이 한 명은 남아있다는 소리인데.......
‘현호 형이 A조 결승의 대진표를 보고 살짝 웃었지. 그게 누구였더라? 딱히 주목할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계속 B조와 유우지의 시합만은 구경해서 그런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답답한 기분. 만화에서 보면 뭔가 충격을 받는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떠올리게 하던데, 뭐 만화니까 가능한 것이고 현실에서는 그렇게 쉽게.......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얇고 고운 음성. 여자? 그가 생각에 빠진 사이 그의 앞으로 다가온 사람은 확실히 XY염색체를 지닌 이였다.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외모의 소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살짝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그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 본격적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네, 아니.”
워크래프트3 속에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대를 손 안에 쥐고 흔드는 냉철함을 선보이며 ‘철의 미로’라 불리는 그였지만 현실에서는 이제야 성인의 영역에 턱걸이한 청년일 뿐이다. 나이에 비하여 영약하고 능글맞다고 스스로는 생각해왔고, 그 점에서는 현호나 진호도 인정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생활권 내의 일. 눈앞에서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존재는 이를테면 ‘미지와의 조우’였던 것이다.
“혹시 예선에 참가하신 분인가요?”
“네, 예선에 참가.......는 아니지만 관계자입니다.”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한 그는 그제야 자신이 PC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고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예선.......응원하러 오신건가요?”
“네, 그런데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뭐, 원칙상으로는 관계자들 외에는 출입불가이긴 하죠.”
그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PC방 내부를 바라보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틈타 안보이게 한 번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런데 별로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오는 사람도 없거든요.”
좋아, 좋아. 그는 속으로 되새겼다. 서서히 침착함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선수들 시합하는 장소에만 들어가지 않고 방해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 정도는 지켜줄 수 있죠?”
성훈은 씩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동시에 슬쩍 목을 쓰다듬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분명 선수와 관련이 있는 사람 소수 정도는 암묵적으로 허용해 왔었으니까. 다만 자신이 그러한 결정권을 지닌 스태프가 아니라 그녀와 마찬가지로 단지 구경 온 사람에 불과하다는 점이 걸렸다. 유명 게이머라고 하더라도 대화 운영과는 별개의 인물. 스스로 침착하다고 인식하려고 너무 나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눈앞의 소녀를 살며시 쳐다보았다.
‘에라, 이제 와서 쓸데없이 문제 삼지는 않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에스코트를 하는 신사처럼 딱딱한 모습으로 그녀를 PC방 안으로 안내했다.
시합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오히려 너무 전형적인 양상이라 지금까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경기만 계속 보아온 그에게는 약간 낯설게 마저 느껴지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양쪽은 모두 안정적인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깔끔하고, 실수가 없는 운영과 조작들. 유우지의 시합이 무규칙의 길거리 싸움과 비교할 수 있다면 지금 벌어지는 A조의 최종결승전 내용은 기교파 복서들의 철저한 아웃복싱 싸움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복싱과 달리 게임에는 판정이 없다. 아무리 현란한 발놀림으로 점수를 많이 얻었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상대를 링 위에 눕혀야만 승리를 챙길 수 있는 전장인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확실히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스펠브레이커가 진열을 갖추고 벽을 형성한다. 나엘의 동물농장 체제는 강력하고 밀리 공격에 큰 피해를 입는 스펠브레이커였지만 프리스트의 회복을 받는 스펠브레이커는 상징인 방패처럼 굳건히 진형을 유지한다. 서로 마법이 난무하고 또 이 마법들을 뺏고 취소시키는 현란한 효과들이 난무하지만 처음부터 마나 회복 오라를 받는 휴먼의 병력이 점차 마법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간다. 소수의 모탈팀이 끊임없이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은 주력 유닛이었던 드라이어드의 활용을 어렵게 만들고, 재훈련의 책으로 떨어지는 3레벨 블리자드의 위력은 높은 드루이드 오브 클러마저 견디지 못한다. 결국 나엘은 진형을 물리면서 유리한 위치에서 다시 한 번 싸우려 하지만 소서리스의 슬로우 마법은 그런 후퇴마저 힘겹게 한다. 견디지 못하고 포탈을 이용하여 본진으로 퇴각하는 나이트 엘프의 병력. 하지만 손해를 본 상태에서 본진으로 물러나는 것은 회복을 위해 링 구석에 몰려 오로지 가드만을 올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가드를 굳건히 하고 상대의 빈틈을 노려 한방 KO가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샌드백을 자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휴먼은 시간을 주지 않고 그대로 거칠게 달려들었고, 건물을 이용해서 방어하려 노력하지만 역부족이었다. GG.
결국 나이트 엘프를 지휘하던 남자는 화풀이하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게임을 빠져나와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탈락의 아픔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고통이 큰 법. 반대로 격전 끝에 위로 올라가는 마지막 동아줄을 부여잡은 사람의 기쁨은 더더욱 커진다. 살짝 얼굴이 상기된 상태로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진희란 이름의 선수를 현호는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빠르기는 했지만.’
사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시드를 받은 자신이나 성훈을 비롯해서 예선 첫 경기에서 탈락한 사람들까지 재능이나 게임 감각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실 큰 차이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냐는 부분. 연습에 적합한 환경을 구축했는가, 혹은 그런 환경 속에서 집중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연습을 지속하는 게 가능한가, 혹은 시합에 나와서 중압감을 얼마나 느끼고 그걸 극복할 수 있는가 등등. 이런 가지가지의 요소들이 섞이면서 실력의 격차를 생성하고 결국 상위권과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하위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천천히 경험을 쌓아가면서 격차를 극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느 순간 깨달음을 가지고 어느 한 순간에 치고 올라오는 상황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격차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사람도 존재한다.
진희의 경우, 소질 자체는 눈에 띄었다. 그가 이 선수를 주목하게 된 그 시합, 라이센 신을 예선에서 꺾었던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재능을 설명하는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저 그런 레벨인 상태로 지속되고 있었다. 스타일의 정체라고 할까. 하지만 진희가 그를 찾아갔던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상에서 승리의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안정적인 경기력으로 그 재능을 맘껏 발휘하고 있었다. 스즈끼 유우지라는 의외의 인물이 현재 예선장을 뒤흔들고 있어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가 속한 조가 만만한 조도 아니었고 이겼던 선수들도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의 성장은 분명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현호는 그렇게 판단했다.
“저 여자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는 휴게실에 앉아있는 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여자친구는 프로선수에게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관리가 필요한 인간관계인 만큼 시간을 투자해야하고 집중을 분산시키는 식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더욱이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빠지고. 하지만 반대로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의욕이 고취되는 경우도 있다. 역시나 개인 차이.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의 문제로 그러한 점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라 할 수 있다.
“여자친구는 아니에요. 아는 선배라고 하더군요.”
“호오.”
현호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이야 다 큰 척 하지만 성훈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어린티를 다 벗어내지도 못했던 시기였다. 성훈이 좀 과도하게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음을 내보이려 한다는 정도야 그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잠깐 동안에 잘도 알아냈네.
“확실히 워3팬은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자신이나 성훈을 모를 일은 없으니까. 자만이 아니다. 자신들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워3를 좀 한다는 선수들이 대부분 모인 이 장소에서 워3를 즐겨 하고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의도적으로 가만히 있으려 한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여성은 그저 방금 승리를 따낸 진희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네. 단지 응원하러 온 것이라 해요.”
“그렇군.”
젊다는 건 역시 좋은 것이야. 그런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소녀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괜히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무엇보다 예선 상황에 좀 더 생각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훈도 이제는 부끄럼타는 사춘기 소년도 아니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살짝 옮겼다. 현호와 달리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시드를 얻은 자신들 때문에 이번 예선에 통과하는 사람은 3명뿐이다. 그리고 조는 6개. 즉, 각 조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진출전을 치러야한다는 말이다. A조 승자는 안정적인 경기력에 일취월장한 실력을 선보인 휴먼의 이진희, B조 승자는 파악이 불가능 정도로 독특한 운영과 뛰어난 경기감각으로 파란을 일으킨 이방인 랜덤유저 스즈키 이치로. 둘 모두 소년의 모습을 벗어내지 못한 고등학생들로 현재보다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선수들. 어느 한 쪽이 떨어진다는 점은 이 두 명의 신예를 관심 깊게 지켜보던 그로선 안타까운 일이였지만 동시에 그만큼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승부의 세계. 한 쪽이 올라가면 한 쪽이 떨어지는 것은 순리지.’
손가락 끝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껴진다. 시드라는 것은 누구나 얻고 싶어 하는 권리이긴 하지만 이럴 때는 승부의 장소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살며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위에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그만큼 선별된 상대와 겨룰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하나의 권리인 것과 마찬가지.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는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혹시나 미처 만나지 못하고 누군가가 중간에 떨어진다면 그만한 자격이 없다는 소리. 그러면 아쉬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누가 그와 나란히 설 것이니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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