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이하 <엣지러너>), <빌리 엘리어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뒤엎은 네트워크도 사라지고
의리의 절규가 네온사인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랑이 씁쓸한 낭만이 된 시대에
한 사이버 웨어가 빌딩 숲 사이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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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하는 콘텐츠는 익숙함과 신선함 사이의 절묘한 지점을 포착할 줄 안다. 그 지점을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고 한다. 익숙하지만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그런 지점이다. <엣지러너>는 이 이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다.
<엣지러너>의 스토리는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소년의 성장물이라면, 후반부는 정통 누아르다. 그리고 둘 다 아주 판에 박힌 스토리를 보여준다. 성장물에서는 엄마의 죽음과 학급에서의 방황을 극복하며 엣지러너 크루라는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동료, 역경, 성장 등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는 그럭저럭 긍정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하지만 누아르로 장르를 선회한 후로는 사랑, 음모, 배신이 난무하며 비극으로 점철된다. 누아르 특유의 음울하고 처절한 감성이 가득하다. 스토리도, 스토리에 담긴 감성도 클리셰 범벅이다. 하지만 엣지러너가 진부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그 이유는 2%가 다르기 때문이다. 2%는 바로 세계관이다.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관에 뻔한 클리셰를 던져 놓았더니 기가막힌 작품이 튀어나왔다. 익숙함과 신선함 사이의 절묘한 지점, 스위트 스폿을 획득한 작품이 되었다.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는, 아니 극찬을 보내고 싶은 그런 작품이 나왔다.
많은 흥행작들이 이 공식을 따른다. <아바타>는 <포카혼타스>를 판도라에 끼얹은 작품이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스파이 무비에 캡틴 아메리카를 끼얹은 작품이다. 잘 만드는 게 쉽지 않지만, 잘만 만들면 성공이 보장되는 창작 공식이다. <엣지러너>는 그 창작 공식을 성공적으로 적용한 영리한 작품인 셈이다.
다만, 깊이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이버 사이코처럼 사이버펑크 세계 속에서 고민할 거리를 던지기는 하지만, 그냥 던지기에서 끝난다. 냉정하게 말해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처럼 철학적인 사색을 갖춘 작품에 비하면 깊이가 무척이나 얕다. 그런 생각거리를 전개를 위한 소재로만 소모한 점이 <엣지러너>의 가장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엣지러너>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뻔하다고 할지라도 어떤 스토리 라인을 특정 세계관과 접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장르 특유의 감성을 아주 잘 포착했다. 특히 누아르 감성이 절절하다. 사나이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겨울비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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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고, 우리는 그 욕망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산다. 나이트 시티는 그 꿈에 무척이나 충실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그런 행동이 비난받지 않는 곳. 그래서 패러데이나 키위를 단순히 나쁜 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의리가 허무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살아간 죄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그나마 공상의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이 정도지, 만약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굉장히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뇌를 선사할 수도 있다. 그 지점을 잘 포착했던 작품으로 <시티 오브 갓>이나 <가버나움>을 추천하고 싶다)
이처럼 냉혹한 나이트 시티에 아주 특별한 놈이 등장한다. 데이비드의 특별한 점은 사이버 웨어를 견디는 힘에 있지 않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위해 살았다는 데 있다. 엄마의 꿈을 위해 아카데미에 다녔고, 메인의 꿈을 위해 크루를 이끌었으며, 루시의 꿈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런 데이비드를 어리석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사랑의 애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심지어 부부의 연을 맺어도 그렇다. 아내의 꿈이 무엇인지, 남편의 꿈이 무엇인지 물어봤을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걸 넘어서 상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더 드물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람은 정말 정말 드물 것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 상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나이트 시티에서? 이 정도면 나이트 시티의 전설이라고 부를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뜬금없어 보이지만, <엣지러너>를 보면서 <빌리 엘리어트>가 떠올랐다. 빌리의 아버지가 파업을 포기하고, 주변으로부터 배신자라 손가락질 받으면서 광산으로 돌아갔던 이유... 발레리노로 대성하는 빌리의 꿈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것, 이것만큼 애절한 사랑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나이트 시티는 그런 애절함이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다. 루시의 꿈을 이뤄주려던 데이비드의 절규는 결국 쓸쓸한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사랑은 나이트 시티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낭만이라 부를 만큼 아름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누구보다 특별했고, 전설이었다. 이제는 사랑 따위에 심드렁해진 아재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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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와 루시가 가지고 있던 꿈이 서로를 만나면서 바뀌어버렸는데
(데이비드가 살아가길 바라는 루시 / 루시를 달에 보내주고 싶어하는 데이비드)
계속 엇갈린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안타깝고 씁쓸했네요
그런 방향에서는 서로의 꿈을 제대로 알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과거의 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할지..
목적과 수단이 반대가 되어버린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