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이정재, 정우성 주연의 영화 헌트를 봤습니다.
보고 나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영화를 웬만큼 잘 찍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사실 저는 헌트가 첩보물인 줄은 알았어도 그런 반전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도 이 영화가 흥행하는 내내 그걸로 논란이 났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신기할 정도로 다른 반응이라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그러니까, 설강화와 다르더라는 말입니다.

(이 아래부터는 헌트와 설강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지수와 정해인 주연의 드라마 설강화는 민주화운동 왜곡, 안기부 미화 등의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던 드라마입니다.
이유는 극중 배경이 1987년인데 지수의 배역이 여대생이고, 정해인의 배역이 남파공작원이고, 극중 안기부가 남파공작원을 잡으러 다니고, 대학생들은 남파공작원을 민주투사인 줄 알고 숨겨주기 때문에, [ 6월 민주항쟁 북한개입설 ]이 연상된다는 것이었죠.
이 외에도 정의로운 안기부 요원이 나온다, 안기부의 무자비한 고문 장면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여주인공 이름이 민주투사 이름이다(라고 해서 이름 수정해서 방영), 텐센트한테 천억을 투자받았다더라, 설강화는 중국어다, 등 다종다양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반박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이들 중 대다수는 사실 헌트에도 적용이 됩니다.
정우성은 물론 주인공격인 이정재도 안기부 소속이고, 그냥 소속인 정도가 아니라 부장 바로 아래급인 차장들이죠. 그리고 이 투톱 주연은 대북공작, 방첩작전 등에 열심이지 간첩조작을 하는 장면은 특별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초반에 동림 찾으면서 한 명 고문하긴 했는데, 결국 동림으로 확정하지 못해서 계속 동림을 찾는 게 내용이니 간첩조작은 아닙니다.
그리고 조유정도 있죠. 이 캐릭터도 참 반전인데, 결과적으로는 운동권 학생들이랑 어울린 것도 맞고 같이 술 마신 것도 맞습니다. 조유정이 끌려와서 조사받을 때까지만 해도 안기부의 간첩조작이 드디어 나오는 건가 했지만, 아니 이게 맞다고요...? 솔직히 그 순간에 진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설강화 폐지론에서 주장하던 [ 일 잘하는 안기부, 운동권과 협력하는 간첩, 안 보이는 간첩조작 ]이 다 나온 셈이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이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과연 설강화와 헌트의 차이점은 무엇이었기에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도 정반대의 반응이 나온 것일까요?

우선 설정과 플롯만 보면, 방금 쓴 대로 둘 간에 본질적인 차이점이랄 게 없거나, 오히려 설강화 쪽이 더 논란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일단 [ 6.29 이후가 배경 ]이라서 민주화운동을 다루지도 않고, 안기부가 간첩조작 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대쪽같은’ 안기부 요원은 상부에게 팽 당하거든요. 반면에 헌트는 5.18과 6.10 사이가 배경이고요.

그래서 로고스 대신 [ 에토스 ]가 문제였던가를 생각해 보면, 이건 좀 가능성이 있습니다. 설강화는 JTBC 드라마지만, 헌트는 이정재가 감독을 하고 정우성이 주연을 한 영화니까요. 그러니까 이정재나 정우성이 민주화운동을 왜곡할 리는 없지만, JTBC는 할 수 있다(?)는 심리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기엔 JTBC도 진보 논조가 강했던 방송사 아니었나 싶지만, 그런 것은 모회사가 중앙일보라는 점에 주목하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쓰면서도 느껴지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일단 악감정이 있는 다음에야 작동하는 것이지, 설마 이것 때문에 의혹을 제기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이처럼 로고스도 에토스도 불충분하다면 아마 [ 파토스 ]의 지분이 큰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데, 이유는 설강화 논란이 방영 전부터 이미 불거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째서인지 유출된 시놉시스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왜곡 걱정을 하고, 여주인공 이름 바꾸라고 하고, 방영하지 말라고 했는데, JTBC는 오해라고 하면서 (이건 아마 여주인공 이름 교체 작업 때문일 수도 있는데) 방영 연기만 했죠.
하지만 그래놓고 나온 설강화는 원래 우려와 전혀 달라진 점이 없는 것[ 처럼 보였 ]기 때문에, 이미 화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하고 의혹을 제기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확실히 JTBC가 성의가 없었던 게 맞아요. 1화 시작할 때 6.29 민주화 선언 듣고 환호하는 호수여대 운동권들 모습만 좀 보여줬어도, ‘보고 까자’는 여론이 더 많았을 텐데 말이죠.
이처럼 방영 이전부터 악감정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때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설강화를 보았던 것이라면, 그 사람들이 설강화를 두고 간첩이 안기부를 비판했다고 간첩 미화다, 안기부 요원이 안기부를 비판했다고 안기부 미화(?)다, 마작이 나온다고 친중이다 등 온갖 무리한 비난을 가했던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됩니다.
반면에 헌트의 경우에는 시놉시스 유출도 없었고, 개봉 이전에 내용을 두고 역사왜곡을 우려하던 사람도 없었고, 따라서 제작진이 미숙한 대응으로 갈등을 키우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별 논란이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꼽자면, 장르의 차이도 중요한 변수였다고 봅니다. 영화의 호흡과 드라마의 호흡은 다르고, 달라야 하는 법인데, 설강화는 이 점에서도 미비한 감이 있었죠.
저는 사실 ‘보고 까’려다가 결국 16회차를 다 본 입장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설강화가 의외로 저력이 있었던 드라마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화 이전 10화 정도가 수작급으로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과 마지막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화야 그거 보면 끝이니 용두사미여도 그렇다 쳐도(그렇다 칠 수 없지만) 초반 회차들은 그러면 안 되는데, 너무 늘어지게 진행했죠.
그거 때문에 1화에서 하차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방영 당시의 여론이 그 정도로 치우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후반 회차에 나오는 비판에 반대되는 내용도 더 주목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JTBC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심지어 다시보기도 디즈니플러스 독점으로 하는 바람에 유언비어 유포만 더 쉬워졌죠.
반면에 헌트의 경우에는 영화이기 때문에 중도하차가 사실상 불가능했고, 일 잘하는 안기부나 운동권 속 간첩이 실제 등장한다고 해도 영화의 전체적인 의도는 [ 독재정권 비판 및 전쟁 반대 ]라는 점이 다 본 사람에게는 대부분 느껴졌기 때문에, 굳이 이를 문제삼지 않을 만큼 관객들이 설득이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으로부터 도출되는 사실은, 앞으로 5공 시절을 안기부와 엮어 다루려는 제작사가 있다면 미리 1회부터 의도를 명확히 하는 장면을 다수 삽입하거나, 아니면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