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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14:14
사실 역대급 숙청왕은 의외로 고려 공민왕이죠. 인당부터 시작해서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세운 홍언박 김용 유숙 유탁에 신돈까지... 조정이나 군부에서 어깨에 힘 좀 줬다는 사람치고 목 달아나거나 목 달아날까봐 돌아선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21/10/24 16:56
공민왕은 사실 권문세족 탓, 신돈 탓 해준 기존 연구자들에게 감사해야할판… 공민왕의 일생을 놓고 볼때 이분은 그냥 통수의 연속이에요 크크 이분의 통수 역사는 인당 이전에 조일신에서부터 시작이죠
21/10/24 17:20
영락제 세조는 명분0인 쿠데타였고 왕자의 난은 정실소생도 아닌 후처의 막내에게 세자 자리 준다는 게 정신이 나간 짓이라.. 크크
21/10/24 19:00
단종이 근본 of 근본이라서 피를 많이 볼 수 밖에 없었죠
단종 이후에 근본러가 조선 왕조에서 2명인가 3명 되나 그정도로 적을겁니다
21/10/25 01:34
근본러로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기는 한데... 최고 정통성은 단종이고, 그다음을 따지면 숙종일 겁니다.
숙종이 환국정치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저 정통성이죠... 숙종다음부터는 관점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해서 애매함 뭔가 하나씩 결함이 있지요. https://namu.wiki/w/%EB%8B%A8%EC%A2%85(%EC%A1%B0%EC%84%A0)#s-3 <- 단종편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21/10/24 14:38
아버지 옆에 새어머니가 붙어서 이불밑 송하로 친아들과 기존 아들 편가르기 하는거 보고 외척을 극혐하게 된거죠.
사실 태조의 세자책봉은 이성계와 목숨을 걸고 개국한 다른 아들들에게 반란마렵게 꼬드긴 격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정도전은 개국공신으로서는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불합격이죠.
21/10/24 14:56
그렇죠. 외척 숙청에다 장자승계 무너진 것도 그렇고 서자 차별하는 것도 그렇고
조선 초기에 어그러지는 거 보면 정도전이랑 강씨부인이 짝짜꿍해서 방석이 세자 앉힌 게 모든 일의 시작이더군요.
21/10/24 15:19
'이불 밑 작업'이라고 보긴 뭐한게, 신덕왕후가 경처 출신 왕후라 그렇습니다. 방석과 방번에게는 '조선 첫 왕비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유교적 명분이 있었죠. 왕자의 난 이전까지는 신의왕후는 왕후로 추증되지 못했거든요. 정말 이불 밑 야합이었으면 무인정사로 뒤집어질게 아니라 당장 세자 책봉 당시부터 왕자들은 물론 대소신료들로부터 온갖 말이 터져나왔을겁니다.
21/10/24 16:54
이 부분은 조금 복잡하더라구요.
경처의 자식이 순위였으면, 왜 방번이 아니라 방석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안되니까요. 그나마 이 부분에 대한 유력한 해답이 나머지 아들들은 고려 권세가들과 혼인관계로 얽혀있어서, 상대적으로 그 부분에서 깨끗(?)한게 방석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동북면 촌뜨기 이성계를 유력한 신흥무인세력으로 만들어 준게 그 혼맥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감탄고토라고 까도 할말이 없는.. 당대에 이성계 세자 책봉이나 신덕왕후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었음은 나중에 태종이 청계천 치수공사에 정릉 돌바닥 다 가져다 쓸 때 드러내놓고 반대한 이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기도 하구요.
21/10/24 17:02
반 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왕씨 학살을 철저하게 시행한 거 보면 진짜 고려쪽 혼맥이 닿아있는 사람은 배제한게 맞는거 같습니다. 감탄고토라고 하는데 이성계나 이방원의 생애를 보면 원래부터 그렇게 신의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보니 ;
그것보다는 방석을 세우려고 했으면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 공부를 철저하게 시켰어야 했다고 보는데, 일단 이성계 본인이 뼛속까지 무인 출신이라 그런 쪽으로는 영 신경쓰지 않았다는게 문제죠. 당시 기준으로도 이방석은 놀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막장 세자였고 반면에 상대는 아버지 밑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이방과나 고려 과거 급제 경력이 있는 이방원이다보니 솔직히 능력이나 제왕적 품성에서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죠. 쿠데타 이후에도 정도전과 이방석의 복권을 추진한 세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만 봐도요. 무려 왕이 밀었던 세력인데 끈 떨어지니 철저하게 버려짐.
21/10/24 18:19
방번은 아내가 왕우의 딸이라 밀린게 크죠. 고려랑 확실히 결별하고 왕씨까지 청소해야되는데 차기 대권주자가 공양왕 아우의 사위라면...물론 감탄고토라고 까도 할 말은 없죠.
다만 당시 고려 말은 경처와 향처가 동시에 존재하는, 유교적으로는 원래 존재해서는 안되는 예법이 존재하는 아노미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신덕왕후측도 밀어볼 유교적 명분은 확실히 있었다는 겁니다. 방석이 왕과 왕비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명분이 그것이고(방번은 위에서 말한 소거법으로 제외되고...) 굳이 야합이라고 할 것도 없이 대놓고 밀어 붙여도 먹힐만한 내용이었던거죠. 그게 통할 정도로 생전의 신덕왕후의 위상이 굳건했습니다. 오죽하면 정몽주 때려죽이고 이방원이 이성계한테 탈탈 털릴 때 이방원이 겨우 한 마디 한게 신덕왕후한테 SOS 친거였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방석을 후계자로 공인한건 말이 나왔겠지만 반대로 조정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문제였는데도 '공식적으로는' 그 정도 파장 없이 방석이 세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아예 명분이 없는 조치는 아니었다는거죠.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되면 이방과, 이방원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적자들도 할 말이 생기죠. '우리야말로 적자인데 사실상 서자 취급을 받으라고?'가 그거죠. 경처, 향처라는 애매한 관계에다가 원래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왕비 아닌 정처'가 존재하는 상황이다보니 반대쪽도 마찬가지로 주장할 유교적 명분이 존재했다는겁니다. 이성계는 여기서 기존 신의왕후 자녀들의 적자 지위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교통정리에 실패했고(사실 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반대파를 찍어눌러야할 신덕왕후는 요절해버렸으며 정도전, 남은은 이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다보니 실력과 명분이 있는 신의왕후 출생의 왕자들이 결집하는걸 못 막았던거죠. 그러나 어쨌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고, 신의왕후를 추존하면서 그 시점을 기준으로는 방석, 방번의 명분도 상당부분 훼손되어 버린데다가, 여기서 신덕왕후를 옹호하는 측은 그야말로 왕가의 정통성을 건드리는터라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태종은 신덕왕후를 직접 강등시키는 조치는 못 취하고, 간접적으로 신덕왕후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폄훼하는 조치로(청계천 치수공사가 그거죠) 우회하여 존재감을 무력화 시켜야 했습니다. 여기서 반대의견을 낼 사람이 있을 수 없죠. 모가지 날아가는데...
21/10/24 18:36
신의왕후가 왕비 추존이 안되었기 때문에 방석의 세자 옹립을 '이불 밑 작업'으로 보기 어려운 게 아니라,
애당초 신의왕후가 절비 추존은 되면서 왕비 추존이 안된 것부터가 방석을 옹립하기 위한 '이불 밑 작업'인거라.
21/10/24 18:47
신의왕후가 절비 추존에 그친게 예법에 명확하게 어긋난 것이라면 실록에 왕후 추존에 관한 논의가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또 신덕왕후는 굳이 이불 밑 작업 할 필요 없이도 권위가 굳건했고요.
21/10/24 14:50
그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치력만렙에 정치 자체를 (정치질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치를) 잘한 왕이었던거지 좋은 남편이나 좋은 시아버지였다고 볼수는 없죠 (근데 막상 실록보면 그렇게 민씨 다 죽여놓고도 원경왕후의 병에 근심하거나 하는 등의 기록들이 보이는거 보면 참..크크)
21/10/24 14:55
와이프 입장에서는 진짜 최악의 남편인게,
왕되기 전에는 스스로도 왕자의 난도 도왔고, 외척들도 왕자의 난의 공신들인데 그렇게 죽여버리고, 본인도 찬밥대우 제대로 받았죠.
21/10/24 15:39
날린게 정몽주-정도전이라 임팩트때문에 킬방원소리가 나오게 된듯.
그리고 외척에 대한건 진짜 신경질적으로 처리했죠. 근데 장인 살아있었으면 장인도 날렸으려나?? 장인 겸 스승인데...
21/10/24 15:43
저 난리를 겪고, 직접 치르고도,
장자도 아니고 삼남인 세종에게 왕권을 넘겨준 거 보면 대체 얼마나 능력치가 차이가 났길래
21/10/24 16:06
뭐 사실 태종도 장자도 아니고 실력(?)으로 왕자리까지 오른거 보면 의외로 왕위 계승에 있어서는 실력을 따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열상 양녕이 폐해지면 효령이 뒤를 이어야될텐데 술 좀 먹을 줄 안단 이유로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준걸 보니.. 덕분에 양녕이 아닌 충녕의 처가가 박살난거 보면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네요..
21/10/24 18:41
아. 이 부분은 오늘날과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술 못먹는다 = 종교가 있다.
그 옛날에 90까지 살았고 80대까지만 해도 정정하던 타고난 강골인 효령대군인데 건강 때문에 술을 못마셨을리는 없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유교국가 조선에서 불교도를 왕위에 올릴 수야 없었겠죠.....
21/10/24 18:00
심온 건은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게, 태종 시대에 충녕대군의 존재감이 급부상하자 박은이 심온에게 충녕을 자제시키라 충고했는데 심온이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저는 이걸 태종이 심복 박은을 통해서 심온에게 경고를 날렸는데 심온이 그걸 눈치 못챘거나 혹은 세자, 나아가 왕의 장인이 되고픈 마음에 무시했다고 보거든요. 아마 이때 태종은 충녕에게 보위를 물려준다면 심온은 제거해야 겠다고 마음속으로 결론내렸을 겁니다.
21/10/24 18:57
태종이면 조선왕조에서 죽인 숫자는 하위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거 같은데 확인할 길이 없네요
태종은 최소한 동복 형제는 안 죽였고, 이방번은 셀프로 죽는 선택지를 골라버린...
21/10/24 19:06
아마 그렇겠죠
태종은 임팩트 있는 수장 몇 명 날리고 자기 외가랑 셋째 며느리쪽이랑 반역한 조사의 정도 날린게 끝이니까요 진짜 킬러면 이방간도 뎅겅 이숙번도 뎅겅이죠
21/10/24 19:28
연산군이 죽인 선비보다 중종이 죽인 선비가 더 많다라는 썰도 있...
기묘사화로 조광조일파를 박살내고 작서의변으로 그 반대편도 박살내고 마지막에는 최강 권신 김안로도 박살내고. 아마 좀 더 살았으면 문정왕후네도 박살내지 않았을까...
21/10/24 20:19
중종은...대중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가장 다른 왕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숙종은 그나마 최근에 조명이 된반면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되어 꼭두각시였다. 이런 이미지가 강하죠. 근데 현실은 막말로 중종한테 찍혀서 살아남은 신하가 있긴 한걸까.. 싶죠.
21/10/25 00:33
중종이 우유부단한건 맞는것 같은데 그정도로 왕권이 약해진 시대가 아니죠. 사실 명종 이래 전란 이후~ 숙종전까지나 신권이
좀 강했다정도로 콧방귀 뀌는거지 세도정치전..아니 세도정치기에도 실상 왕권자체는 그다지 약해지지 않았다는거죠. 이게 다 여인천하때문이다.....
21/10/24 19:31
저렇게 외척들 숙청하고도 결과적으로는 세종이라는 역대급 먼치킨 군주한테 왕위를 물려줘서 조선 발전의 토대를 쌓았는데...문제는 불과 100년도 안 되서 그놈의 수양대군이...
21/10/24 22:40
소신에 따라 굉장히 합리적 실리적으로 처리한거죠.
친형제는 죽이진 않았고 양녕 문제 처리하는거 라던지 인간미가 없었던것도 아니구요. 킬방원은 사실 정몽주 죽인 이미지가 8할은 만든거 아닐지..근데 정몽주 저렇게라도 안죽였으면 더 큰 피바람이 불었겠죠.
21/10/25 00:02
팬픽이긴하나 육룡이 나르샤의 선죽교 씬이 이걸 참 잘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자네가 가질것은 오직 천년의 악명.. 자네는 이 정몽주라는 이름과 천년동안 얽혀 회자될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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