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글을 첫글로 했냐면 얼마전 도쿄 올림픽에서 태권도 경기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비판적인 글이 많이 오가는걸 봤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태권도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태권도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태권도를 다루는 김에 가라데 그중에서도 극진가라데도 다룹니다
위의 영상은 극진가라데와 itrf태권도 사범의 이야기입니다
태권도 역사를 축약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itf태권도 사범은 태권도의 역사를 삼국시대부터라고 알고 있던 분입니다
한국인들 상당수가 태권도의 역사를 그때부터 시작한 무술로 알고 있고 태권도는 우리의 전통무술로 알고 있습니다
국기원 사이트나 한국 포털 사이트, 한국 언론사에서는 태권도를 전통무술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도 무술을 수련하는 분들이 있을겁니다
그런 분들은 태권도의 진짜 역사를 아실테고 피지알 회원분들 상당수가 진짜 역사를 아실겁니다
그럼 태권도는 어디서 시작된 무술인가?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시작된 무술입니다
해방 후 5대관이라고 불리우는 청도관, 송무관, 무덕관, 조선연무관 권법부, ymca 권법부가 중심이 되어서 태권도 이름을 만들고 협회를 만든 최홍희가 창시자가 됩니다
물론 최홍희도 가라데 수련자였습니다
이때 최홍희가 이렇게 주도할수있었고 협회를 만들수있었던건 최홍희가 현역 군장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생기면서 한국에서 가라데는 이제 가라데가 아닌 태권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제 잠시 가라데 이야기, 극진가라데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가라데는 그럼 어디서 왔는가?
중국의 남권이 오키나와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게 대세입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가라데 혹은 오키나와 테라고 합니다
백학권의 투로(태권도식으로 말하면 품새) 영상을 찾아보면 아실수있는데 오키나와 가라데 카타(태권도식으로 말하면 품새)와 많이 흡사합니다
이 오키나와 가라데가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 본토로 진출하고 송도관, 강유류 같은 유파로 나타나게 됩니다
원래 가라데는 유술기와 타격기가 같이 있는 무술이었으며 무기술도 같이 수련하는 종합무술의 형태였습니다
중국무술이 맨손무술하고 무기술도 하는걸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겁니다
현재 오키나와 가라데는 그렇게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본토로 진출하면서 유도와의 차별성을 띠기 위해서 유술기는 사라지고 우리가 아는 타격기만 남게 되는 형태로 변모합니다
무기술도 쌍절곤 정도 남고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극진 가라데가 쌍절곤을 수련하는 것은 가라데는 무기술도 같이 하는 무술이라는 것을 상징하는겁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가라데 유파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극진 가라데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인 최영의는 쇼토칸 가라데, 강유류 가라데를 수련했습니다
이쪽 가라데의 대련이나 시합은 우리가 아는 풀컨택트 방식이 아닙니다
도쿄 올림픽에서 가라데 쿠미테 종목이 이런 기존의 가라데 대련 방식을 보여줍니다
직접 타격을 하지 않고 몸 앞에서 멈춘다
슨도메라고 부르는 대련입니다
이런 방식이 현대가 되어서도 유지되고 있었고, 지금도 유지되는 가라데 유파가 있습니다
그런 가라데에 최영의가 슨도메 방식을 비판하고 풀컨택트 방식의 효용성을 주장했고 이를 도장깨기, 타 무술과 대결등으로 입증합니다
그리고 최영의는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극진 가라데를 만듭니다
또한 최영의의 제자들도 타 무술과 대결이나 타 무술 시합등으로 활약해서 극진의 실력을 입증했고 극진 가라데와 최영의를 모델로 하는 만화등으로 인해서 극진 가라데는 일본에서 인기를 얻게 되고, 해외 진출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가라데는 풀컨택트 유파와 논컨택트 유파로 크게 분류가 됩니다
다시 태권도로 돌아옵니다
한국에서는 가라데를 배운 분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태권도를 만들게 됩니다
1920년대 1930년대 출생이신 어르신들 중에서는 당수도를 배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남자중에서 젊었을때 당수 안해본 남자 없었을걸? 하는 말을 했던게 기억납니다
그 당수도라는 것도 결국은 가라데였습니다
이런 당수도에서 태권도로 명칭이 바뀌고 기술들도 바뀌고 가타는 품새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내용도 바뀝니다
또한 태권도는 논컨택트 방식의 대련을 하지 않고 풀컨택트 방식의 대련을 합니다
가라데와 차별화되는건 주먹보다는 발차기가 발달하면서 다양한 발차기를 주무기로 하는 무술이었다는겁니다
이런 한국의 분위기 때문인지 한국에서 쿵후도 풀컨택트 대련을 했습니다
중국본토가 열린 90년대 전까지 그러니까 80년대까지는 쿵후가 한국에서 맹위를 떨쳤는데 이유는 풀컨택트 대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가라데는 풀컨택트 대련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입니다
쿵후도 풀컨택트 대련을 했는데 가라데는 안했을까?
이것 개인적으로 들어본거라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어떤 어르신들은 풀컨택트 대련을 했다고 했고, 어떤 어르신들은 그렇게는 안했다고 했습니다
자료가 있으면 좋겠지만 자료는 없기에 개인적으로 추정해본다면 이렇게 추정합니다
한국에서 가라데 대련은 풀컨택트와 논컨택트 방식이 공존했다로
한국에서 태권도는 박정희 정권때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태권도의 협회가 2개로 나뉘어지는 일인데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가 itf 태권도 협회와 함께 캐나다로 망명을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저것 종합해서 유추할수있는건
박정희와 최홍희가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사이가 좋지 않았고, 기존의 대한태권도협회와 최홍희 사이에서도 갈등이 많았다입니다
최홍희가 한국을 떠난 후에 대한태권도협회는 세계태권도협회인 wt를 출범시키고 김운용을 총재로 선임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도 태권도를 국가적 차원에서 국기로 지원했습니다
단일조직으로 중앙통제가 가능한 협회이면서 국가적 지원을 받는 협회이기에 태권도는 세계 거의 모든 곳으로 보급될수있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성공 요인은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도전자들과 싸우면서 이기고 도장을 지켜내고 개척한 사범님들입니다
도장깨기 도전을 오면 그들을 이겨야 도장을 지킬수있었고 도장을 발전시킬수있었습니다
태권도가 풀컨택트 대련하는 무술이었기에 가능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도장깨기에서 패하면서 도장을 만들지도 못했을겁니다
이건 해외 진출한 극진 가라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장깨기 도전에서 이겨서 도장을 지키고 진출할수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태권도의 모습은 최홍희 망명 이전과 이후로 많이 달라집니다
참고로 영화 취권에서 악역 역할을 맡았던 배우 황정리님이 화면에서 보여준 태권도가 최홍희 망명 이전의 태권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태권도는 최홍희 망명 이후의 태권도입니다
태권도의 역사는 최홍희가 떠난 후에 삼국시대부터 생긴 무술로 바뀌게 됩니다
정권 분위기상 박정희와 껄끄러웠던 최홍희라는 이름을 언급하는건 금기시 되었는데, 최홍희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게 되면서 최홍희를 언급한다는건 코렁탕 먹기 좋다는걸 의미했기에 더더욱 최홍희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택견을 포함한 다른 무술들이 코렁탕의 위험때문에 최홍희라는 이름은 언급하지 못하지만 태권도는 가라데야 하는 말은 합니다
한국에서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온 무술이라는 사실을 계속 알려준건 아이러니 하게도 다른 무술들입니다
저 역시 다른 무술을 배우면서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온 무술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2000년 마르스라는 잡지가 발간됩니다
2003년에 사라진 무술 전문 잡지였는데 이 잡지에서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가 언급됩니다
그리고 itf태권도도 기사로 다뤄지고 최홍희와 인터뷰도 실리게 됩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었기에 언급이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itf태권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무술 수련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itf태권도는 90년대에 대중들에게 소개된적이 있습니다
게임 철권 시리즈의 캐릭터인 화랑, 백두산이 사용한 태권도가 itf태권도입니다
최홍희가 2002년에 사망하지만 해외로 나가서 itf태권도를 배운 분들이 한국에 itf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wt가 강세라서 itf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wt는 국가적 지원과 협회의 행정능력 등에서 앞서나가면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까지 가게 됩니다
이것이 itf보다 보급, 대중화에 유리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일본 가라데를 앞서는 요인이기도 했는데, 가라데는 유파도 많고 당연히 협회도 많아서 태권도와 대결이 될수없었습니다
단일협회로 달려가는 태권도와 여러협회가 엉키고 설킨 가라데의 대결이었던겁니다
물론 이런 단일협회의 일방성에 불만이 나오면서 후에 김운용 총재가 물러나게 됩니다
itf태권도는 최홍희 사후에 여러개의 협회로 분열됩니다
여기에 wt의 활발한 진출과 스포츠화로 인해 itf 도장이 wt로 가버리면서 itf는 wt에 많이 밀리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극진가라데로 가봅니다
극진 가라데는 최영의 생전부터 수련방식에서 제자들과 의견차이를 보이면서 몇몇 제자들이 파문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독립하고 하면서 각자만의 유파를 만들면서 여러 유파로 갈라져갔고, 사후에는 기존 극진과 신극진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여기서 이종격투기 시합의 원조격인 정도회관이 나타나면서 아재들은 기억하는 그 k-1대회가 나오게 됩니다
쿠도라고 해서 보호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풀컨택트 대련을 최대한으로 하려는 어찌보면 특이한 유파도 나타납니다
한국에 극진가라데는 최영의 사후에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최영의 생전에 들어올수도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엉키고 설키면서 최영의 사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극진 가라데와 태권도는 한국인이 만든 무술이고, 풀컨택트 방식의 대련, 시합을 채택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두 무술은 말 그대로 몸으로 실용성을 증명하면서 전파된 무술인겁니다
서구 문화권이면 말로 어쩌고 하는거 보다는 직접 실용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여기에 두 무술은 딱 맞았던겁니다
가라데라는 무술의 카테고리에서 본다면 극진가라데와 태권도는 혁명적인 존재일수있으며 사파적인 존재일수있습니다
기존의 가라데와는 너무나 다르게 바뀐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가라데의 아류라는 소리를 들었고, 코리안 가라데라는 간판으로 시작했던 태권도
하지만 이제는 일본 무술가들도 가라데의 아류라는 소리는 하지 않고 태권도는 태권도라고 인정합니다
극진 가라데도 풀컨택트 가라데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으로 가라데의 한축이 되었습니다
무술이라는 큰 카테고리로 본다면 최홍희와 최영의 두 사람 덕분에 무술은 더 진화합니다
풀컨택트 대련하는 무술의 진화에 기여했고
대중화되면서 시합하는 무술의 진화에 기여했습니다
싸움질이 아닌 무술, 무도, 스포츠로 인식될수있게 한겁니다
다음에는 어떤 무술을 다룰까 생각해보고 적어보겠습니다
내용이 너무 긴거라서 최대한 마구마구 줄이고 줄였는데도 엄청나게 길어졌습니다
빠진 내용들이나 보충할만한 내용이 있다면 댓글로 보충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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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파이터 일대기는 만화로 봤는데 보다보면 그 당시 어르신들 특유의 자존심 중시와 최영의 특유의 사서 고생하기의 무시무시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가능한 일들인가 싶음.. 김신락(역도산)씨 같은 경우는 친구라고는 하지만 과도한 폭력성으로 일을 그르쳤다는(최영의 본인은 술때문이라 평) 느낌을 많이 받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