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치르고, 일 년에 한두 번쯤 봉안당에 들르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마치 슬픔 총량 불변의 법칙이 있기라도 한 듯, 봉안당에서 슬픔을 만끽하면 만끽할수록 일상에서의 슬픔은 줄어들었고, 그렇게 자연스레 우리는 다시 예전의 평온했던 일상을 되찾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무렵에서야, 봉안당 곳곳마다 켜켜이 쌓인 봉안함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켜켜이 쌓인 타인들의 슬픔을 보면서, 매정하게도 나는 이 슬픔이 나 하나만의 것은 아니구나 하는 이기적인 위안을 얻었다. 몇 개월에 한번씩 그곳에 들를 때마다 빈칸으로 남아있던 봉안당 칸 하나하나가 촘촘히 채워졌고, 남겨진 사람들의 편지, 사진들을 보며 생전 그들의 삶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지만, 모든 사람의 죽음은 각각 다른 무게를 가졌다. 20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삶이 끝나버린 여느 청년의 마지막과 일가족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천수를 누리고 떠난 어르신의 죽음이 같은 무게를 가졌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년을 가진 봉안함 하나하나의 주인들을 보며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하루가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불과 몇 달 전 내가 이 자리에 왔을 때 멀쩡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누군가는 몇 달 후 이 칸의 주인이 되었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화폐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가지듯, 삶 또한 그 유한함 때문에 의미를 얻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우리 함께 흘려보내기에 함께 있음이 더 소중하고, 유재하의 1집은 유재하 2집의 부재 때문에 더 큰 울림을 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우리 삶이 유한하다는 것만 알 뿐, 그 길이와 깊이를 알지는 못한다. 봉안함 속 편지에는 그 무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며 뒤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잘할 걸 하고 아쉽게 되뇌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리석은 후회일 뿐이다. 우리는 망자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도,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는걸.
나도 그들을 흉볼 처지는 아니다. 임박착수형 인간 최성수는 마치 무한한 시간을 가진 듯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몇 년째 머릿속으로만 다짐 중인 부모님의 건강검진 계획부터, 연락해야지라고 몇 년간 되뇌다 결국은 끊어져 버린 관계, 매해 작년 목표를 복사 붙여넣기 하는 버킷리스트 작성까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미루기투성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때도 마치 영원한 삶을 살 것처럼 표현을 아끼고 아끼며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곤한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우물쭈물 하루하루 살다 보면 나 또한 언젠가 끝을 맞이하겠지.
회사에서 퇴근해 푸석푸석한 닭가슴살을 목구멍에 욱여넣는다. 봉안당에서의 교훈 덕분에 이 닭가슴살이 내 생애 마지막 끼니가 될 수 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멈출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내일은 일어나면 아무 말 없이 어머니를 한번 꾹 안아드리리다 다짐하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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