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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9/01 04:13:33
Name OrBef
Subject [일반] 검도 얘기로 시작해서 교육 얘기로 끝나는 얘기.
1. 검도 얘기.

저는 원래 굉장한 몸치인데, 사실 몸치란 것이 어쩔 수 없이 타고나는 부분도 있지만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극복된다고 보는 편입니다. 남들보다 운동을 잘하는 것까지는 어렵겠지만, 눈에 띄게 못 하진 않는 정도(?) 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미션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해서 제 아이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시켰었는데, 저를 닮아서 딱하니 운동을 좋아하질 않다 보니 수영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하다가 다 그만두게 되더군요. 근데 저랑 사이는 상당히 좋은지라, 같이 운동을 하면 좀 오랫동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같이 할만한 운동을 찾다가 그나마 예전에 제가 좀 오래 했던 운동이 검도라서 그걸 같이 하게 되었죠.

근데 텍사스에는 검도 도장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태생이 일본 스포츠인데 일본인들은 미국에 도장을 잘 차리지 않고, 대한 검도 도장은 한인 밀집 지역에만 있으니 텍사스에는 아직 없고, 그래서 태권도/해동검도/대한검도를 모두 가르치는(!) 도장에 좀 다녔었어요. 작은 도장이라서 초보 시절에 관장님의 집중 지도도 받을 수 있고 해서 처음에는 좋았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여러 가지를 모두 다루면 다 애매해지는 것 같더군요.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더 알아봤더니, 정식 도장 광고를 내지 않아서 몰랐는데 비영리 검도 동호회가 한 군데 있더군요. 가봤더니 일본 사범님이 일본 문화를 퍼뜨린다는 대의를 위해서, 고등학교 체육관을 빌려서, 그냥 자원봉사로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걸 오래 하다 보니 그 사범님 밑에서 배운 사람들이 고단자가 되고, 텍사스 특성상 인구 유출이 별로 없다 보니 그분들도 다시 사범자격으로 가르치고, 그러다 보니 5단 넘는 분들이 우글대는 곳이 된.... 매우 특이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정식 도장을 내지 않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 하긴 뭐 지금 형태로도 잘 돌아가니까 굳이 바꿀 이유는 없겠죠) 그렇게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나니 대부분의 사범과 회원들은 현지인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도장이 아니라 동호회임]

저나 제 아이는 먼저 도장에서 정식 대한검도 단증을 딴 것이 아니라서 여기서 다시 시작했는데, 그래도 배운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보니 어찌어찌 초보반은 빨리 졸업하고 이제부터 중급반에서 연습하게 되었습니다.

2. 검도 얘기인 것 같지만 교육 얘기.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아마추어 운동이 활성화되어있는 나라입니다. 운동 하나 정도는 해 줘야 정상인 취급을 받는달까요? 그에 반해 나라는 더럽게 크고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서 교류를 하기는 한국보다 어렵죠. 예를 들어서 올가을에 텍사스 검도인들이 모여서 대회를 여는데, 그 장소가 남부 텍사스의 오스틴입니다. 자동차로 네 시간은 가야 하죠. 다음 승급 심사는 아예 텍사스도 아니라 옆의 루이지애나에서 열립니다. 자동차로 8시간은 가야 하죠. 저번에는 제가 속한 동호회에서 대회를 한번 주최했었는데, 도장이 없으니 시립 체육관을 빌려서 밤새 바닥에 붙은 껌 닦아내서 다음날 대회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흑흑 한밤중에 몇 시간 동안 껌 닦고 있다보니 눈물이 줄줄....)

이게, 나쁘게 보면 굉장히 귀찮은 부분인데, 좋은 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쌩고생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보니까 굉장히 돈독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하나 저 같은 이민자들한테 매우 좋은 것은, 인종이 다르고 영어 잘 못 해도 '검도로 하나 되는' 효과가 있지요. 미국 유학생들이 현지인이랑 가장 빨리 친해지는 두 가지 방법이 보통 1. 현지 학생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던지 2. 현지 학생들이 활동하는 특정 정당 지지 모임에 나가던지 이렇게 있거든요. 근데 저는 종교도 없고 (다른 이유로 성당에 좀 나간 적은 있었지만 이젠 안 갑니다) 특정 정당 활동을 할 만큼 정치에 관심이 있지도 않아서 저 방법을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한테는 검도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지만) 가 현지인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한 정답이겠더군요.


[왕겜의 마운틴같이 생긴 백인들과 BBQ 나눠 먹고 같이 술 취해서 낄낄댈 수가 있단 말이죠.]

또 하나, 저도 저지만, 아이한테도 교육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민 2세대들이 부모 세대와 겪는 갈등 중 하나가, 2세대는 현지 아이들과 동화되어서 미국인으로 성장하는 데 반해 이민 1세대는 한인으로 남기 때문에 문화 차이가 크다는 점이죠. 거기에 더해서 1세대의 짧은 영어도 2세대가 보기에 좀 안타까운 면도 있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엄마 아빠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장면 보면 아이 마음에 상처가 되는 그런 거요) 근데 아이와 제가 현지인들하고 섞여서 운동도 같이하고 파티도 같이 가고 대회 참가하려고 8시간 운전하면서 로드무비 찍고 그러다 보면 뭔가 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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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로그김
16/09/01 08:19
수정 아이콘
같이 고생을 겪은 사람은 전장의 안개가 걷힌 미니맵이라고 할까요.. 안심되고 예측가능한 부분이 커지는(혹은 그렇다는 착각) 것 같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너의 대처를 보았고
나의 대처를 보여준 후의 너의 반응도 보았다
너의 패턴을 알아냈다 그것은 강약약 강강강약 강중약이다'
이런 느낌...?

그래서 어느정도 친분이 쌓이거나 안전장치가 생기기 전 까지는 상호간 헌신적인 액션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이기적 액션을 유도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원만한 것 같습니다.
(가령.. 좀비 무리에 포위된다거나, 전재산을 판돈으로 도박을 한다거나, 배틀로얄에 참가한다거나..;;)
16/09/01 08:30
수정 아이콘
오, 바로 그렇습니다. 미국 와서 독서 토론회도 해보고 술도 많이 마셔봤지만, 결국은 동물보호서에서 같이 개똥 치우던 아저씨, 도장에서 같이 껌떼던 학생, 학부모회에서 같이 물건 나르던 아줌마들이 제일 친근해지더라구요. 같이 삽질하는 게 최고의 친분 쌓기 맞는 듯 합니다.
전기공학도
16/09/01 08:34
수정 아이콘
교회 등등 종교의 순기능이 바로 저런 유대감이죠. 특히 교민들 사이에서 특히..

비종교인은 저런 측면에서 안 좋은 점이 하나 있는거죠.
16/09/01 12:11
수정 아이콘
예 사실 미국의 한인 교회는 사교 장소로서의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근데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16/09/01 09:17
수정 아이콘
흠 여러모로 힘드시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도 딸아이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싶은데 애엄마가 위험하다고 허락할려나 모르겠습니다.
16/09/01 11:41
수정 아이콘
사실 검도는 보기에 무서워서 그렇지 실제로는 격투기 중에서 상당히 안전한 쪽에 속합니다. 일단 갑옷을 둘둘 감고 싸우기 때문에, 맞아서 다친다고 해봐야 멍 드는 것 뿐이죠. 운동 하면서 멍 좀 들고 그러는 건 교육적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단자가 되면 찌르기 기술이 들어가서 좀 위험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해당 기술은 정말 고단자가 아니면 아예 금지하기 때문에 해당사항 없습니다.

다만, 의외로 그냥 근육이나 관절을 다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맞아서 다치는 것이 아니라, 격투기라는 게 사람을 흥분시키기 때문에, 자기 몸의 한계를 잘 모르고 막 구르다가 다치는 거죠. 저만 해도 20대때는 검도 하다가 왼손약지에 과부하가 걸려서 한번 접으면 펴지지가 않는 증세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검도를 관뒀었고요. 이번에는 젊을 때 생각하고 막 대련하다가 왼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돼서 (그렇다고 대단한건 아니고, 전치 4주 정도) 한 동안 쉰 적이 있습니다. 근데 이런 것은 대부분 흥분 잘 하는 남자들한테 생기는 문제고, 따님이 좀 차분한 성격이라면 별로 문제 없을 겁니다.
16/09/01 12:34
수정 아이콘
딸이 아들 같아요... 하하하 T.T
뭐 사실 운동 시키는 건 그런 것보다 한국에선 해야 될 게 너무 많다보니 시간 내기 어려운게 문제죠.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데 벌써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해야 되나를 애엄마가 고민하다보니...
부모가 둘다 수학에는 잼병이라 수학관련 보완도 해줘야 할 것 같고...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있으니 그분야는 밀어줘야 할 것 같고...
뭐 그런거죠... 쩝
드라고나
16/09/01 12:02
수정 아이콘
2차대전 당시 미군 상대로 지금 전장에서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설문조사를 하니 전우 때문이란 답이 기장 많이 나왔단 말이 생각납니다
16/09/01 12:12
수정 아이콘
같이 껌만 떼도 상당히 친해지는데, 같이 목숨 걸고 싸우다보면 당연히 피붙이보다 더 소중한 사이가 될 것 같습니다.
졸려죽겠어
16/09/01 19:26
수정 아이콘
말이 좀 안통해도 같이 땀흘리고 고생하다보면 뭔가 통하는게 있긴 하더라구요
밀물썰물
16/09/02 08:28
수정 아이콘
아주 이민 표준 교과서로 사시는 군요.
아빠 아이 모두 잘 사시는 것같네요.

책하나 쓰세요, "이민, 성공적으로 하는 법". 너무 구식인가요?
16/09/02 08:35
수정 아이콘
학생 때는 아이한테 시간을 많이 못 써서 서로 좀 힘들었는데, 스케줄에 여유가 좀 생기니까 이젠 좀 살만 합니다. 이민이란게 쉽지 않더라구요.
Minkypapa
16/09/06 09:31
수정 아이콘
저는 아들과 함께 하는 운동으로 탁구를 골랐는데, 어느정도 올라가니 만리장성의 벽이 있더군요.
교과과목 컴피티션에서 부딪히는 중국애들이랑 운동에서 또 만납니다.
16/09/06 11:56
수정 아이콘
참 이게 같은 아시안끼리 할 말은 아니지만, 되도록 중국 아이들과 포트폴리오가 겹치지 않는 편이 좋긴 합니다. 근데 그런 블루 오션이 사실 별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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