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2596&page=2
-1편입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2626&page=9
-2편입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2817&page=97
-3편입니다.
"달리기 대회에서 1등, 2등, 3등이 달릴때, 사람들은 현미경으로 그들을 보지. 무대 위에 누군가가 선다면 나는 그 사람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그 사람이 연극배우로서 갖출 것을 다 갖췄다는 전제하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지금 뭐하는 거야!”
교수님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세환이 나와! 니가 해.”
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고, 난감한 표정의 세환이형이 내 앞으로 섰다. 그것도 잠시, 세환이형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사를 치기 시작했고 방금전까지 나에게 분노를 터뜨리던 교수님은 금새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난 안되는 건가.
극단에 들어온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뭐 나름 오래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곳에서 10년 이상을 보낸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슬슬 두각을 나타내는 동기들도 있었다. 일단 여기서 말할 사람은 세환이형. 첫 공연이 끝난 뒤로 세환이형은 승승장구. 개성있는 얼굴을 가졌고, 대사도 쭉쭉 잘쳤다. 배우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따먹고 나간다’고. 주연을 맡은 배우는 자신을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의 흐름이 그 역을 다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주연 역할들은 보통 자연스럽고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물론 대본과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주연 역할들은 다 그런거야- 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는 거고. 조연이나 단역은 웬만해서는 관객들의 시선에서 그냥 흘러가 버린다. 어떤 배우가 유명해졌을때 그 배우의 과거 출연작들을 보면서 ‘아, 저기 나왔었어?’ 했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조연이나 단역들이 짧은 시간에 자신을 각인시키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그 타이밍에 한번 웃겨볼까, 어떻게 하면 한 번 눈에 띌 수 있을까- 였다. 그렇게 조연배우들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장면을 살려내면 잘 따먹고 나간다고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평범하게 해버리면 그저 흘러가버렸을 그런 장면을 빛나는 장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환이형은 그야말로 잘 따먹었다. 대사는 별거 없는데 그가 하면 뭔가 웃기다. 심지어 “저쪽으로 가셨어요.” 같은 대사도 그가 하면 웃겼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모두 그런 능력을 필요로 했다. 짧은 순간에 나를 교수님께 각인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웃기기는 커녕 그냥 넘어가면 다행. 내가 대사만 치면 교수님은 얼굴을 찌푸렸고, 입에선 욕이 튀어나왔다. 이제야 도성선배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넌 어디를 가도 주연배우를 할거야.’
이건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니었다.
극단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처음으로 해본 해외공연. 중국에서 한 공연이었는데, 공연이 시작되면 포그가 뿜어져 나오면서 배우들 스무명 정도가 느리게 움직이는 한국무용으로 시작을 했다. 낮은 자세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모두 같은 동작으로 움직여야했기에 굉장히 힘들었고, 공연의 첫 시작인 만큼 교수님이 가장 신경쓰는 장면 중 하나였다. 첫 공연엔 기자들의 촬영이 허가되었는데,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1500석의 객석에서 터지던 플래쉬는 내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다.
‘여기서 틀리면 x된다’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고, 번쩍이는 플래쉬 뒤에 있을 교수님의 눈초리를 상상하며 겨우겨우 첫 공연을 마쳤다. 다행히 틀리지는 않았다.
중국 공연은 베이징에서 남경, 장가항으로 이어지는 투어였는데, 도시를 옮길 때마다 소품을 넣은 파란박스를 배우들이 짊어지고 기차를 탔다. 포장이사에서 쓰는 그런 파란박스를 꽉 채운 것이 스무개가 넘었다. 나무 각재는 이동한 도시에서 공수해서 쓰고 버렸기에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차 안은 4인 1실로 2평정도의 방에 2층침대 두 개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구조였다. 세환이형은 낭만적이라며 낄낄 거렸지만 기차를 타고 반 나절을 보내고 나니 그도 말수가 적어졌다. 방은 소품을 담은 파란박스들로 가득찼고, 2층 침대에 내 몸하나 간신히 누일 수 있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 속에서 그저 자다가 깨다가 할 뿐이었다.
힘든 스케쥴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선배들의 텃세는 계속 되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무대셋업과 공연 리허설 연습을 하는 그 며칠 동안에도 매일 밤마다 집합이 걸렸고, 한 선배에게 욕을 먹고 나면 또 다른 선배의 집합이 기다렸다.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던 것일까. 우리에게 호의적이던 가까운 연차의 선배들도 그들의 윗 선배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눈초리가 싸늘해져갔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졌다.
내 동기는 나를 포함해서 8명이었는데, 남자는 세환이형과 민석, 그리고 이십대 초반인 우현과 나, 이렇게 네명이었다. 그 중 민석은 나와 나이가 같았지만 성향은 다른 녀석이었다. 튀기 좋아하고 끼가 넘치는. 그리고 그게 화근이 되었다. 공연 중 단체로 목검을 뽑아드는 장면에서 분위기에 취한 녀석은 연습 때보다 더 큰 동작으로 목검을 뽑아들었고, 목검은 바로 옆에 있던 주현선배의 눈을 쳤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뻘겋게 충혈되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거기에 하필이면 주현선배가 주가 되어 움직이는 장면. 안 그래도 튀기 좋아하는 민석을 눈여겨 보고 있던 주현선배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장면이 끝난 뒤 줄지어 퇴장하고 다들 한숨을 돌리고 있을때 어디선가 퍽 소리가 들렸고, 소리가 난 곳에는 얼굴을 감싸쥔채 고개를 숙인 민석과 그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주현선배가 있었다.
“약속한 대로 해라.”
주현선배는 한마디를 남기고 분장실로 들어갔고, 민석도 다음 장면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공연은 무사히 끝났지만 공연 중에 주먹을 휘두른 이유로 주현선배는 총무 유희선배에게 한소리를 들었고, 민석은 중국공연을 끝으로 극단을 떠났다.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공부해서 취직하겠다고. 공연 중 얻어 맞은게 원인인지 원래 녀석의 마음속에 있었던 계획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극단생활과 편의점알바를 병행하던 우현이 또한 더 버티지 못하고 극단을 그만두었다. 극단을 들어오고 첫 공연을 한지 1년. 그렇게 내 동기는 8명에서 6명으로 줄었다.
중국 공연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극단을 그만 둘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이렇게 그만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엇고,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동기들이 마음에 걸렸다. 세환이형은 연기에 있어서는 교수님 눈에도 들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갔지만, 반대로 극단생활에 있어서는 허점이 많았다. 자꾸 뭔가를 빠뜨리고 실수를 연발해서 항상 뒤에서 챙겨야 했다. 뭐 나라고 엄청나게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배들에게 ‘정짱이는 일 하나는 알아서 잘 하지’ 라는 품평을 듣는 정도는 되었다. 그러다보니 크고 작은 작업을 거의 떠맡게 되는 역효과가 있었다. 여자선배들은 간단하게 작업할 일이 있으면 날 불렀고, 점점 극단에서 나의 위치는 연기는 못하는데 작업은 잘하는 막내 포지션으로 잡혀가고 있었다.
다음 작품에서 세환이형은 단역배우에서 조연배우로 올라섰다. 이번 역할은 건달이었다. 주인공을 흠씬 두들겨 패는 역할이었는데, 이 폭력은 극 중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선생님께 혼나가며 많은 고민 끝에 세환이형의 장면은 안정되어 갔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주인공이 사람을 파는 상인과 흥정을 하는 장면.
“여기는 새로 얼굴이 필요하겠는데. 세환이는... 앞에 나왔지. 야 정짱아 여긴 니가 감당해야할 것 같다. 나와!”
이 상인 역할은 꽤 컸다. 비중 자체는 단역이 아니라 조연급이다. 세환이형이 앞에서 맡은 건달보다도 대사가 많았다. 떨리는 맘으로 대본을 들고 앞에 나오자 이 장면의 상대역인 주인공 철수선배가 날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도 웃고 싶었지만 입술에 마취주사라도 맞은듯 미소가 지어지질 않는다. 제길. 연습실은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하고 극단 사람들의 눈은 모두 나에게 꽂혀 있다. 이건 오디션이다. 후- 긴장하지 말자. 근데 오디션인데 긴장 안할 수가 있는거야? 아니야 긴장하지 말자. 다리는 왜이리 후들거리냐.
“뭐해? 얼른 해!”
교수님의 버럭에 반사적으로 대사를 쳤다.
“여, 여긴 뭣하러 왔는가.”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터지는게 들린다. 이상한가? 곁눈질로 보니 교수님도 웃고 있었다. 일단 웃고 있다면 나쁘지 않다. 내가 잘해서 웃은 건 아니겠지만. 철수선배가 대사를 받아주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다 뭐하는 사람들이요? 내가 다 알고 왔어”
능글거리며 철수선배가 다가섰다. 대본에서 다음 대사를 찾아 읽었다.
“저기 섬으로 팔려갈 애들이요.”
“얘들 다? 엄청 많네.”
정신없이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내 장면이 끝났다. 슬쩍 보니 교수님의 표정이 살짝 굳어있다. 뭔가 잘못되었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됐어! 괜찮을 것 같아. 내일까지 공부 해와! 열시가 넘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정적을 깬 교수님의 말. 넘어갔다. 넘어갔어! 나도 드디어..
“오- 정짱이 드디어 뭐 하나 하는 거야? 연습 열심히 해~”
여자선배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한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이제 나도 뭔가 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그 날의 연습은 그렇게 끝났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친구들에게 문자가 왔다.
-야, 끝났냐. 지금이라도 올 수 있음 와라.
아 오늘 다 모인다고 했지. 간만에 여자친구들 없이 모인다고 신나하던 녀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늦게까지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오늘은 웬지 가서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간다. 1시간 정도 걸릴듯.
서둘러 문자를 보내고, 친구들을 만나러 갈 생각에 마음이 부푼다. 마음은 벌써 친구들에게 가 있지만 지하철은 원래 가던대로 터덜거린다.
작은 호프집. 부푼 마음에 오긴 왔지만 남아있는 친구들은 몇 없었다. 기분좋게 취한 세 녀석이 나를 반겼다. 서로 근황 얘기를 하다 보니 내 얘기가 나왔다.
“오- 배역 받았다고. 뭐 주인공이냐?”
녀석들에게 배역이란 주인공 뿐이다.
“아냐 임마. 주인공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좀 대사가 있어.”
“그럼 이제 보러가면 되는 거냐?”
와악하고 웃음이 터진다. 말은 그렇게 해도 공연 때마다 와서 챙겨보는 녀석들.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몰라. 어쨌든 한 번 보러와.”
“니네 공연은 너무 어려워. 대중적이지 않아.”
낄길 거리며 친구들이 한마디씩 한다. 맞는 말이다. 확실히 대중적인 재미를 주는 극단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작품성이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재미없는 거다. 작품성이 있다는 것도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겠지만. 어쨌든 작품성과 재미,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데, 대가가 되어 갈수록 ‘재미있다는 것’은 유치한게 되나보다. 극단의 과거 작품들을 보면 지금 젊은 층이 봐도 재미있을 만한 작품이 많았다. 배우들이 감정을 폭발시키며 관객들에게 느낌을 학실하게 전달한다거나, 작품의 개연성이 치밀하게 설정되어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거나. 하지만 요즘 교수님의 작품은 그 두가지 다 찾아보기 힘들었다.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고 단계를 뛰어넘는다. 관객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게 교수님이 추구하는 바였고, 배우의 연기에 있어서도 슬프다고 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웃는다거나 억제하는 것을 더 고급으로 생각했다. 인물의 행동을 보면 겹으로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기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주문이었지만, 관객들이 봤을 때는 심심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 문제. 연극관람이라고는 친구가 연극한다고 해서 찾아와서 보는게 전부인 녀석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
“올거면 연락해. 초대권 줄게.”
친구들과 모처럼 밀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새벽 늦은 시간이 되었다. 주말이라 다들 늦잠을 잘 수 있겠지만, 난 아니다. 아침 일찍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좀 무리한 감이 있다.
...내일 꽤 피곤하겠는데.
“자, 어제 했던 부분 이어서하지. 철수랑 정짱이 나오고.”
잠을 많이 못자서인지 눈도 따끔거리고 입이 마르는 느낌. 어제 내가 맡은 장면부터 한다고 하니 대본을 말아쥐고 앞으로 나섰다. 등 뒤가 싸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자, 시작해.”
교수님의 신호로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무대 한켠에 서 있고 철수선배가 어슬렁거리며 등장했다. 교수님이 손짓으로 내게 신호한다.
“여긴 뭣하러 왔는가.”
교수님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뭐지?
“여기 이 사람들은 다 뭐하는 사람들이요? 내가 다 알고 왔어”
“저기 섬으로 팔려갈 애들이요.”
“얘들 다? 엄청 많네.”
교수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일단 넘어가려는 듯 보였다. 장면은 진행되어 가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뭔가 처진다. 곁눈질로 교수님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차마 볼 수가 없다.
“근데 말야!”
교수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사를 멈추고 철수선배와 내가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너 왜 아직도 대본을 들고 있는 거야!”
사람들의 눈이 모두 내가 들고 있는 대본에 꽂힌다. 어제 처음 배역을 받았는데 벌써 다 외워왔어야 하는 건가.
“어제 내가 공부해오라고 했지. 전혀 안해왔단 얘기네?”
교수님이 무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야. 지금 어미가 다 떨어진다고! 대사가 전부 그러니 극이 가질 않잖아!”
어미가 떨어진다. 수도 없이 듣는 얘기다. 지하철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크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본 적 있는가. 누군가가 마음 속에 의지를 갖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그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마음 속에 어떤 목적-너에게 화가 났다거나, 재밌는 경험담을 들려준다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것이라도-을 가지고 말하려는 사람들의 소리는 대체적으로 문장의 종결어미가 치고 올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이 대화를 할때 말이 길어지면 그것은 여러 문장이 되는데, 말의 한 문장을 종결시키고 바로 다음 문장을 말하려 하는 순간 횡경막을 조이고 도둑숨으로 호흡을 먹은 뒤 다음 문장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문장의 어미는 날카롭게 마무리가 된다. 음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끝이 조여지는 것. 일상 대화에서는 누구나 쓰는 스킬이지만, 이것을 연기에서 하라고 하면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트레이닝이 필요해진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발연기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장마다 호흡을 다 빼버리면서 내려놓기 때문에 말의 어미가 밑으로 축 쳐진다. 그래서 모든 문장의 음과 리듬이 일정해지고 듣는 사람은 이상하게 느끼게 된다. 왜냐면 내가 평소 말하고 듣는 것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커버될 때는 대사처리 능력말고 다른 것들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다. 그리고 그것 또한 연기자의 여러 매력 중 하나이고. 하지만 연극 무대에서는 마이크를 대지 않기 때문에 저 화법을 해내지 못하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답답하게 들리게 된다. 소리가 앞으로 치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내가 그것을 못해서 욕을 먹고 있었다.
“호흡이란 호흡은 다 빼버리고 말야 건방지게... 누가 그따위로 하라고 그랬어! 다시 해봐!”
시작되었다. 몇 번을 반복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넘어가야 한다.
“여긴 뭣하러 왔는가.”
“다시 해!”
“여긴 뭣하러 왔는가.”
“다시!”
“여긴 뭣하러 왔는가.”
“이런 제길!”
교수님이 소파에 넘어지듯 기대어 앉았다. 한숨을 몇 번 내쉬더니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여긴- 뭣하러- 왔는가- 자 들리지? 긴,러,가 단어의 끝이 다 치고 올라가야 된다고! 여, 긴, 뭣, 하, 러, 왔, 는, 가 이 단어 하나하나가 다 고르게 배분되어야 해. 뭐하고 있어! 얼른 해봐!”
“여 긴 뭣 하러 왔 는가.”
“아, 거 사람 참! 그게 아니라니까! 대사가 춤을 추잖아! 쭉 밀고 나가야지!”
“여긴 뭣 하러 왔는가.”
“안 들려!”
“여긴 뭣 하러 왔는가.”
“안 들린다고! 그렇게 하면 절대 안들려!”
“여긴 뭣 하러 왔는가.”
“아, 빌어먹을!”
이미 연습실 분위기는 차갑다 못해 얼어간다. 교수님의 입모양이‘못 해먹겠네 정말’ 하고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일단 넘어가. 그거 하나 가지고 씨름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겠어. 빨리빨리 해버려! 야 철수야. 그냥 빨리빨리해. 넘어가!”
듣기도 싫다는 듯 교수님은 고개를 돌려버리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철수선배가 내 어깨를 툭툭치고 대사를 이어갔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다 뭐하는 사람들이요? 내가 다 알고 왔어”
“저기 섬으로 팔려갈 애들이요.”
“아, 거참! 그 대사를 그렇게 해야겠어?”
넘어가라더니 도저히 못들어주겠는지 교수님은 다시 소리를 지르셨다.
“섬으로 팔려간다잖아! 그냥 옆에 어디도 아니고 섬이야. 도망쳐 나올수도 없다고! 이 얘기가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지 모르겠어! 넌 지금 그런 무서운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밖에 말 못해?”
사실 난 지금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는 상태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런 날 보며 도저히 못참겠다는 표정의 교수님은 다시 일갈했다.
“다시 해!”
무서운 얘기라. 섬에 내다 판다는 것은 저 사람들한테 무서운 일이니까 동정심을 갖고 말해보자.
“저기.. 섬에... 팔려갈 애들이요.”
나름 동정심을 가득 가지고 대사를 했다. 정말 열심히 한마디 뱉었다. 그런데..
“야!!!!”
교수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지금 뭐하는 거야!”
한참동안 날 노려보던 교수님은 다시 한마디 하셨다.
“세환이 나와! 니가 해.”
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도감과 패배감? 벌거벗겨진 것처럼 수치스런 기분까지. 세환이형이 앞으로 나오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감한 표정의 세환이형. 하지만 여긴 까라면 까야하는 곳이다. 특유의 카랑카랑한 세환이형의 대사가 연습실 벽을 때렸다. 나에게 분노를 터뜨리던 교수님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헤맑아 진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밤늦은 시간, 연습이 끝나고 다들 뒷정리를 하는데 교수님이 나와 세환이형을 불렀다.
“너 말야. 지금 대사가 이상하다고. 웅웅거리고 잘 안들려. 세환이랑 정짱이는 서로 장단점이 있으니까 같이 연습해. 내가 2주뒤에 시켜볼거야. 그때까지 열심히 하라고.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내 배역을 뺐은 것 같아 하루종일 미안해하던 세환이형의 얼굴이 밝아졌다. 옷을 갈아입으며 세환이형이 2주동안 같이 아침 일찍 나오자고 한다. 하지만 소용있을까? 마음이 무겁다.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유희선배가 날 불렀다.
“아까 왜 혼난지 알겠어?”
“이유야 뭐. 엄청 많겠죠.”
뭐가 문제인지. 나란 사람 자체가 문제일까. 유희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혼난 이유에 대해 공부해야 다음에 안 혼나지. 아까 선생님이 말한 무서운 얘기라는 건, 동정심을 갖고 말하란 얘기가 아니야. 무서운 얘기인 만큼 아무렇지 않게 하라는 거야. 그래야 관객들이 그걸 무섭게 받아들이겠지.”
맞는 말이다. 무서운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는 사람이 더 무서운 것 아니겠는가. 더불어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오래 해왔다는 느낌도 줄 수 있고. 생각해보니 웃기다. 동정심 가득한 사람 파는 상인이라니.
“지금은 너무 멋있게만 하는 것 같아. 한 번 생각해봐.”
멋있게만 한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2주 뒤에 다시 선생님 앞에 서야 할 생각을 하니 오싹하다.
“2주 뒤에 시켜줄 것 같지? 그거 아무도 모르는 얘기다?”
태인선배가 지나가며 끌끌거린다. 차라리 안 시켰으면 좋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
긴 하루가 지났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아버린 대가는 너무 컸다. 문득 친구들과의 약속이 없었더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하면 뭐하겠나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을. 세환이형이 다가와 파이팅 하잔다. 아이고 다 부질없다 이 사람아.
지하철은 어제와 같은 속도로 터덜거린다. 내일부터는 아침 일찍 출근이네. 오늘은 일찍 자야할 것 같다. 오늘과 다른 내일이 되길 바라며..
-기다리신 분이 있을거 같진 않지만, 오랜만에 이어서 올려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