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맨 마지막에 조제가 의자에 앉아 요리하다가 바닥에 '철푸덕'하고 떨어지잖아. 사실 앞에도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어. 당연하다는 기분이었지. 조제는 장애인이잖아? 장애인이니깐 그런 이상한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나 봐. 그런데 마지막에 다시 '철푸덕'하는 순간 저어어엉말 깜짝 놀랐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잊고 있었던 거야. 조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나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에서 살짝 뜨끔했다. 나도 처음에는 인간 조제가 아니라 장애인 조제만 보고 있었던 거지. 영화가 끝날 때가 돼서야 장애라는 편견 없이 조제라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달까?"
나는 영화를 좋아했고, 그녀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줬다. 오늘도 나는 그녀 앞에서 영화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이 있어. 연출적인 면은 아니고, 조제라는 캐릭터한테 불만이 있어. 솔직히 나는 츠네오가 진심 개자식이라고 생각해. 나는 후반에 집안의 반대 같은 전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부모님께 보여드리지도 않더라고. 츠네오는 조제가 부끄러웠던 거야.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 차라리 바람을 피우는 게 덜 잔인한 일이야. 뭐 나중에 진짜 바람나서 떠나기도 했지. 그런데 조제는 그런 츠네오를 미워하지 않아. 이게 너무 화가 나는 거 있지. 조제가 여자라서 이렇게 그려냈을까? 버림받는 일을 너무 묵묵히 수긍하잖아. 장애와 상관없이 당당했던 조제가 그 순간 고리타분한 옛날 여자가 된 것 같았어. 그나마 마지막에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 다행이었지. 그래도 나는 조제가 츠네오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줬으면 좋겠다 싶어."
오늘따라 나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좋아하는 영화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가 말이 없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유리구슬처럼 맑고 반짝인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만 여느 때와 달리 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재미없는 걸까? 그녀는 내 이야기를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카페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문득 불안이 차갑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얘기가 별로 재미없나 봐?"
"아니야. 재밌어. 자기가 영화 얘기 해주면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별로 집중하는 것 같진 않은데?"
"...우리 저쪽에 가서 앉을까?"
그녀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를 가리켰다. 봄이라지만, 해가 지면 날이 차다. 테라스는 텅 비어있었다... 나는 자리를 옮기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좀 쌀쌀하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자기야. 자기한테 할 말이 있어. 정말 중요한 얘기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시선이 떨어지는 곳에 무릎이 있다. 청바지가 닳아서 툭 튀어나온 무릎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 우리 그만 만났으면 해."
이런 건 눈치채지 않아도 좋으련만. 불안한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다.
"혹시 다른 사람 생긴 거야?"
"아니야.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그럼 이유가 뭐야?"
"예전처럼 자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안 생겨. 좋아하지도 않는데 거짓으로 사랑하는 건 자기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왜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졌는데?"
"솔직히 그동안 자기가 뭔가 이루는 걸 못 본 것 같아. 취업도, 공부도, 다이어트도 뭐 하나 이룬 게 없어서."
"내가 비전이 없다는 말이구나."
"응... 미래가 없는 사람은 좋아할 수 없어."
이럴 땐 정말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눈물이 흐를 줄 알았는데, 전혀 슬프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가 울고 있었다.
"꼭 지금 헤어지자고 말해야 했어?"
"거짓으로 사랑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래."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아줄 수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다. 이제는 남이니깐. 다만 너무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내 모습이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차인 건 난데 왜 네가 울고 그래."
"미안해서 그렇지. 미안해서..."
그녀는 계속 울먹거리고 있었다. 찬 사람이 우는 걸 보니 츠네오가 생각났다. 츠네오도 미안해서 그렇게 울었을까? 그러고 보니 조제와 나는 차인 이유가 닮은 것 같다. 츠네오도 조제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 못했다.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하는 여자친구. 비전이 없는 남자친구.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다. 츠네오는 그렇게 흉봤으면서, 조제가 화내지 않는다고 답답해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나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을까? 내가 도리를 안다면 그녀와 헤어져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잡으려는 집착도 자격이 필요했다. 조제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마치 내가 '백수'라는 불구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긴 불구자가 맞을지도... 이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내가 장애에 편견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찰 거면 찻값 정도는 네가 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 하나?"
"웃으라고 한 소리야. 그러니깐 그만 울어."
나는 애써 짜내듯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녀도 눈물을 훔치며 억지로 웃어 주었다.
"그만 일어나자. 가만히 앉아있으니깐 춥다."
카페를 나서자 이제는 마주 잡을 수 없는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아무 말도,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를 버스에 태운 뒤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허전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마지막 가는 길에 살갑지 않았던 나의 태도가 후회됐다. 그래도 남은 것은 고마움 뿐인데... 그녀는 이미 충분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모지리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에는 미움도, 집착도 없었다. 남은 것은 정말로 고마움 뿐이었다. 조제도 나도 화를 내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후회가 턱 밑가지 밀려와 집으로 가는 언덕길이 힘겨웠다. 한숨을 내뱉느라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 하지만 끊을 수 없을 것 같다.
Written by 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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