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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2/23 19:27:57
Name
언뜻 유재석
Subject
[일반] [잡담] 걸그룹과 함께하는 출근, UFC와 함께하는 퇴근...
빠듯하게 기상을 한다.
회사까지 가는 다양한 교통수단들을 다 체험해보고 나에게 가장 합리적인 루트를 찾은 이후엔 항상 일정하게 일어난다.
(주간 업무보고가 있는 월요일은 30분 앞당기면 된다.)
반 쯤 졸면서 씻고, 머리말리고, 대충 뭐 찍어바르고 손에 잡히는 옷 주어입고 나오는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신발을 신으면서 귀에 이어폰을 꼽고 스트리밍 어플을 연다음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재생목록은 하나다.
신곡이 나오거나 이거 괜찮은데 싶은 노래는 추가하고 오래 들었거나 귀에 잘 안감기면 삭제하곤 한다. 어릴적 처럼 막 이름 붙여가며
재생목록 만들기엔 그 때부터 자라온 내 게으름이 그 터치 몇번도 하지 말라고 종용한다.
그렇게 첫곡을 재생했을때 어떤 노래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의 무게가 결정 된다.
총 14곡. 구성은 걸그룹 노래가 정확히 50%, 남자아이돌 노래가 2곡, 데뷔한지 오래된 가수의 노래 1곡, 여자 솔로가수 노래가 1곡,
힙합가수의 노래가 1곡, 그리고 신나는 비트의 외국 노래 2곡이다.
발걸음이 제일 가벼워 지는건 역시나 걸그룹 노래가 나왔을때다. 1, 2위를 꼽는다면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와 러블리즈의 안녕...
보는눈이 없다면 안무까지 추면서 가고 싶지만 복도식 아파트는 잠시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냉혹한 곳이다. 흥얼흥얼 좋아진 기분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 때부턴 메모리된 시간과의 싸움이다.
몇 분에 오는 지하철을 타야 환승역에 몇분에 도착할 수 있고 환승역에서 몇 분에 출발하는 지하철을 타야 회사까지 가는 버스에 정확히
탈 수 있다. 잠깐 잠깐 핸드폰을 볼 짬이 나지만 조물락거리던 손을 주머니에 꼽고 그냥 음악만 듣기로 한다.
책도 봐봤고, 게임도 해봤고, 스포츠뉴스도 봐보고 했지만 이게 가장 나를 위한 출근길 이라는걸 깨달았다.
50%의 확률로 걸그룹 노래가 나오니까...
가사야 뭐... 유치 뽕짝이다.. "우리 만날래 내가 지금 할말이 있어" ,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아직 요린 잘 못하지만 나 연습하고 이써여" "메 구스타프슨 구스타프슨 스2를 조아해여"
뭐가 중요한가...
스무살 언저리의 소녀들의 소녀소녀한 목소리를 들으면 그것 만으로도 힘이난다.
이제 출근하면 스트레스만 쌓이는 가슴에 치료제로 이만한 처방은 없다.
"오빠 오늘 빡칠일 많을테니 우리들 목소리 듣고 마음 정화하고 가요" 라는 가사가 다음 러블리즈 앨범 타이틀곡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트와이스..
그렇게 회사에선 빡친다. 내 또래 회사원이 전국에 몇명이나 될 지 모르겠지만 오전 9시즈음 부터 해서 대한민국 30대는 빡친다.
상사한테 깨져서 빡치고, 비교당해서 빡치고, 일 많아서 빡치고, 통장 보면서 빡친다.
오늘 나는 빡쳤다기 보단 공부좀 열심히 잘할걸 하는 후회가 가득했다. 국내 굴지의 IT 회사에 업무차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으리으리한
건물과 왠지 좋아보이는 복지와 여유로운 직원들의 모습과 내 연봉의 두배는 될 그들의 연봉을 생각하며 초라한 내처지를 비관했다.
위를 보며 살지 말고 아래를 보며 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으면 내가 이러고 살겠나. 진심으로 그렇게 살 수 있으면
나는 회사가 아니라 어디 종교 지도자가 되어있었겠지...
최근엔 어떤 생각하나가 머릿속에 자리잡아 떠나지 않고 있다.
『내 인생에.. 온전히 하루가 행복 했던 날이 있을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기억도 없고, 오랜기간 준비한 시험에 합격한 기억도 없다. 꼭 붙고 싶었던 회사에 붙은 경험도 없다.
첫사랑에게 고백을 성공한 날도 따지고 보면 하루가 온전히 행복하진 않았다. 총각딱지를 떼던 날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나는 시점부터 나는 온전히 하루가 행복하다 느껴본적이 없었다. 전역하던 그날 조차도...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른것 같았다. 의사인 저 친구는 의대에 합격한 그날 만큼은 행복했겠지? 짝사랑 하던 여자와 결혼에 골인한 친구놈은
결혼식 그날 만큼은.. 아, 아니다... 어여쁜 아기를 갖게 된 내 조카도 행복하겠지?
나만 빼고 다 행복한날이 있었을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퇴근을 하면 시간이 더 걸리는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루트를 선택한다. 이유는 단 하나. 앉아갈 수 있으니...
처음에는 퇴근 시간을 알차게 이용해 보려고 했다. 실무 영어책을 사서 읽기도 하고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뉴스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출근길(with 걸그룹) 처럼 찾아낸 퇴근길 처방이 UFC 시청이다.
무슨 무슨 팩을 신청하면 TV어플 이용권을 주고 매일 매일 전용데이터도 준다길래 (가격도 합리적이길래) 신청해서 야구나 보고 했는데
야구시즌이 끝나 뭘 보나 하면서 채널 이리저리 돌리는 와중에 스포티비 채널 두개 중 하나는 반드시 UFC를 방송하는걸 찾아냈다.
보통 일요일날 채널 돌리다가 하고 있으면 "어 하네?" 하고 보는 정도의 관심뿐이었었는데 한 넉달 시청하면서 퇴근하니 거의 안 본경기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무슨무슨 명승부, 무슨무슨 대회 프리뷰, KO퍼레이드, 챔피언전 뭐이런식으로 보다보니 중복되서 몇 번씩
본 경기도 생겼다.
그래도 보고 또 본다. 하루종일 빡친, 울분에 휩싸인 삼십대 직장인의 분노를 그렇게 푼다.
어릴적 싸움구경 할때나 내가 직접 싸웠을때나 그렇게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채 몇시간을 갔는데 핸드폰 안의 두명이 피칠갑을 하고 있어도
표정 하나 변함없이 그 승부의 끝을 본다. 한시간 남짓 한 퇴근시간안에 이 기분을 풀고 가지 않으면 고스란히 휴식을 취해야 할 공간인
집까지 빡침이 전염된다. 영문도 모르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괜히 튕긴 컴퓨터에 승질을 낸다. 나도 모르는 욕이 계속 새어나온다.
결혼은 할 수 있을지. 아이는 가질 수 있을지. 5년후에, 10년후에.. 난 뭘 하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냥 설정 해논 프로그램 처럼 걸그룹 노래와 함께 출근하고 UFC 파이터들을 보며 퇴근한다.
러블리즈와 트와이스가 빨리 컴백하면 좋겠다.
맥그리거가 안요스한테 줘터졌으면 좋겠다.
나도 온전히 행복한 그 하루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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