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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2/12 23:41:57
Name 스테비아
Subject [일반]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


1992년 퓰리처상을 받은 만화책(!)입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의의도 크지만, 무엇보다 홀로코스트, 유태인과 독일인, 기성 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잘 나타낸 작품입니다.
아마 제가 이 작품을 알게 된 계기가 PGR이 아닐까 싶은데, 잘 생각은 나지 않네요.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빌려와 읽었습니다.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하 아띠)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블라덱과 어머니 아냐는 생존자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블라덱은 전쟁을 대비하며 매일을 치열하고 지독하게 살고, 아냐는 우울증 & 블라덱의 편집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합니다.
작가가 스무 살 때 일이니 충격이 컸겠죠. 스무 살 무렵부터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았다고 합니다.

블라덱의 과거 회상을 만화가 아들이 받아 적고 녹음하는 형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요.
아띠와 블라덱의 생활습관과 사상이 너무도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히는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은 단순히 홀로코스트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생존자들, 그리고 후손들의 세대적 갈등도 이야기하는 것이죠.


#1
전쟁 직전까지 유태인들의 일상이 정말 평화로워서 더 짠했습니다.
정신적 치료와 힐링을 위한 고급진 요양원, 부유층의 병역기피 등,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네요.
그런 평화로운 어느 날 전쟁이 나고, 일주일 후 블라덱은 전쟁포로가 됩니다.


#2
삶과 죽음이 작은 차이로 갈립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서 정답은 없었습니다.
돈이 있는 유태인은 숨겨 주고, 돈이 떨어지면 밀고를 당한다는 게 유일하게 정답이 있는 논리죠.
그마저도 총을 든 독일군 앞에서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받는 순간 총을 겨누니까요.


#3
아들과 아버지의 세대 갈등이 작품의 한 축이 됩니다.
블라덱은 아띠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수시로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재혼한 새어머니에겐 감히 내 아들 외투를 거는데 나무옷걸이 대신 철사옷걸이를 가져왔다고 트집을 걸고,
아들이 허름한 외투를 입고 오다니 충격이라며 밤새 몰래 내다버리고...
자잘한 물건 하나, 병원에서 임시로 쓰던 플라스틱 주전자까지 버리지 못하게 하는 블라덱.
그러나 아냐의 죽음으로 충격을 먹었다며, 아냐가 수용소에서 쓴 일기를 포함한 모든 물건을 태워버립니다.
어머니를 작품에 더 기록하고 싶었던 아띠는 크게 분노하게 되죠. 앞뒤가 맞지 않는 처신이었으니까요.

아띠가 생각하기에, 블라덱의 이상적인 아들은 어릴 때 죽은 자신의 형입니다.
형이 그대로 컸다면 정상적인 직업을 가졌을테고, 자기처럼 그림을 그리는 불안정한 직업을 택하진 않았을거라고...
블라덱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아띠는 형의 사진만 보면서도 경쟁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4.
작가는 자신의 정신과 상담도 그대로 만화에 담았는데요. 그 대화입니다.

"어쩌면 당신 부친은 자신이 항상 옳았다는 걸, 그러니까 항상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거예요. 왜냐면 살아 남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리고 부친은 안전해지자 그 죄책감을 진짜 생존자인 당신에게 떠넘긴 거예요"

"음...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은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세요?"

"아니요.... 그저 슬플 뿐이지."

자신의 삶에 뭔가 의미를 담고 싶었던 아버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봅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들을 많이 봐 왔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비겁하거나 추악한 일도 있었겠죠.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남았는데...
내가 죄 없이 죽은 저 수많은 사람들보다 가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5
블라덱의 미칠 듯한 생존본능..
그는 쾌활한 청년이었지만, 수용소를 겪은 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태인'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먹던 식료품을 반품하러 가서, 1달러치를 반품하고 6달러치를 얻어 오기도 합니다(...)
매일 먹는 심장약도 수시로 세고, 크래커 숫자도 세고..
알고 보면 수용소에서부터 가져온 습관이었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블라덱이 미국에 처음 와서 만난 건 흑인 소매치기였고, 그 뒤로 흑인을 믿지 않습니다.

아띠는 블라덱의 흑인 차별을 거세게 비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작품에서는 아띠의 아내가 대신 비판하고, 아띠는 입을 다물지만)
흑인을 차별하는 당신이 나치를 비판할 자격이 있냐고도 했다네요. 물론 블라덱은 어디 나치랑 비교하느냐고 화를 냈구요.
이성적으로는 저도 아띠와 같이 말할 수 있겠지만...
모르겠네요.
하나의 비극이 아픈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만든 것 같습니다....


#6.
블라덱을 데려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아띠.
가출한 새어머니가 돌아와 서로에게 짐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런 아띠는 거의 있는 그대로, 감정 없이 블라덱의 이야기를 옮기는데요.
어째서인지 그렇게 옮겨진 블라덱의 대사들에서 아띠를 향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쓸쓸한 감정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7.

블라덱의 전부인과 현부인인 아냐와 말라...

조금 다르지만 같은 듯한,
이 곡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빌려서 본 책이지만. 구입하려고 합니다. 소장하고싶은 책이에요.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빌려서라도 꼭 한 번 보시면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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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AAGH!!
15/12/12 23:58
수정 아이콘
이 만화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슬픈 만화.......... 저렇게 극한 상황을 한번도 겪지 못한 우리세대가 극한 어려움을 겪은 세대를 온전하게 이해 할 수 있을까요?
맹꽁이
15/12/13 00:04
수정 아이콘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아버지가 흑인에게 인종차별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남네요..
다혜헤헿
15/12/13 00:35
수정 아이콘
쥐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다시 읽어도 진국이더군요.
리콜한방
15/12/13 00:38
수정 아이콘
제 인생에 최고의 만화 딱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 작품입니다. 유태인의 그 지겨운 홀로코스트 문학이 무조건적으로 싫으신 분만 아니면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Sgt. Hammer
15/12/13 00:39
수정 아이콘
살 가치가 있는 책이죠.
개인적으로는 후기에서 아내 등장시키면서 무슨 동물로 넣어야 할까, 유태교로 개종했으니 랍비 모자를 씌워야 할까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남네요 흐흐.
사악군
15/12/13 03:37
수정 아이콘
참 좋은 책이죠.. 사실 아버지의 흑인차별대사는 나치와 비교하지 말란게 아니라 "니가 감히? 흑인과 유태인은 비교할수도 없어!"였죠..
스테비아
15/12/13 09:17
수정 아이콘
아 맞습니다! 읽자마자 썼는데도 그 부분이 생각이 안나서 한참 생각했는데 틀렸네요ㅠㅠ
Flash7vision
15/12/13 09:15
수정 아이콘
전 유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넌 배고픈 게 뭔지 모를 거야'라고 말한 게 기억에 남네요. 쥐는 살면서 열 번도 더 읽었지만 언제나
명작 중의 명작이란 걸 되새깁니다.
오쇼 라즈니쉬
15/12/13 09:32
수정 아이콘
참 재밌게 읽었는데...
아버지의 생존능력과,
유태인의 끝없이 나오는 돈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우스파크 생각도 나고;;
(에릭 카트맨이 '유태인은 언제나 황금을 지니고 있지! 하던)
구들장군
15/12/13 11:09
수정 아이콘
말이 필요없는 명작이죠. 만화라고 우습게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거기 담긴 내용은 절대 우습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Jedi Woon
15/12/13 20:13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 때 처음 보고 구입하였습니다. 그때가 아마 1995년 정도일겁니다.
특이하게 2권 먼저 보고 1권을 보았죠.
처음보고 든 생각이 아우슈비츠가면 무조건 죽는 곳은 아니였구나, 그리고 수용소가 생각보다 꽤 체계적으로 굴러갔구나,
그리고 유대인만 있는게 아니라 폴란드인도 상당히 고통받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푸른음속
15/12/13 20:28
수정 아이콘
저도 굉장히 인상깊게 읽은 만화입니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의미 되새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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