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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9/26 02:13:52
Name Walk through me
Subject [일반] 외눈박이 그녀
여기저기 가을 맞이 글이 올라오는 군요. 저도 예전의 추억 하나를 조심스레 풀어볼까 합니다.
형식상 반말투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__)

누구나 가슴 아픈 이야기는 하나 둘 씩 갖고 있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술안주로 바뀐다들 하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며 날이 추워지면 습관처럼 떠올려 본다.
너무나도 흔해 빠진 소설과 같은 1년 6개월간의 이야기를…….

군대에 처음 들어가면 누구나 바보가 된다고 하고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갈굼의 일상이 조금씩 익숙해 질 때쯤
어느 날 낯선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K......? 누구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쓴 듯 한 글씨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편지지.

꽤 정성들여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편지 한 통.
한참을 읽고 나서야 K가 누구인지 알았다.

가끔 전화통화를 하던 누나의 아는 동생으로 “너 군대 가면 펜팔이나 소개시켜 줘야지“ 농담 삼아 했던 말을 그대로 지켰던 것이다.
그게 그녀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 후로 한 달에 한 통 꼴로 편지가 왔다.

애인에게 써주는 그런 화려한 편지가 아니라 시시콜콜한 일상이 가득 담긴 소박한 편지였는데 난 오히려 그게 더 고마웠다.
잘 견뎌내고 있었지만 나 자신이 조금씩 고슴도치로 변하고 있다고 느끼던 차에
조금은 쉬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반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녀의 연락처, 사진 등 다른 것을 묻진 않았다.
그저 매일 같이 겪는 일상을 적고 받을 뿐.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더는 바라지도,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다.

갓 상병을 달았을 때 우연찮은 휴가로 인해 그녀를 처음 만났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그저 부담 없이 상처받지 않고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는 게 좋았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어색했다. 아니, 나 자신이 아닌 듯 한 착각을 받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편안함이란 감정을 가진 게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그랬을까?

헤어지기 직전 너무나도 어색하게 그녀의 번호를 얻었다.
메모지가 없다며 냅킨에다 자기 번호를 꾹꾹 눌러서 건네줬는데 난 곱게 접어 지갑에다 넣었다

부대 복귀 후 내 생활에 약간 변화가 생겼다. 내가 전화 리스트에 그녀가 추가되었다는 게 전부지만
팍팍한 군 생활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매번 삐딱하고 회의적이고 조금은 부정적인 나와는 정 반대인 그녀.
주변에선 시트콤이라 불릴 정도로 유쾌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내겐 진한 잔영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가운데 그녀에 대해서 조금은 복잡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기초수급대상 1급일 정도로 형편이 상당히 어렵고 부모님은 이혼하진 않으셨지만 사실상 별거중인 상황이라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으며 아버지도 딱히 경제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는 늘 알바에 치여 살았다. 지병인 당뇨로 인해 몸도 아주 약한대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대학교도 진학하며 열심히 살면서 늘 웃고 쾌활하게 살던 그녀였다.

늘 알바에 찌들어 있던 그녀이기에 군대 일과성 그녀와 통화하는 게 쉽진 않았고
징계 받을 각오하고 새벽쯤 그녀가 퇴근하는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전화를 하곤 했다.

사실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인데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녀를 봐야한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괴로운 일이었으니.

그녀를 좀 더 알고 싶다.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때, 내 마음이 변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전화 횟수가 늘어나고 보낸 편지가 쌓여갈 수록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존댓말이 반말로 바뀌었고 일상생활만 이야기에서 답답한 과거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놓기도 하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봄,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
다시 만난 그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몸이 좋질 않아 피곤해 하긴 했지만.

남들처럼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고 조용히 집으로 귀가하려는 중
그녀가 조용히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두 번뿐이지만, 여태껏 얻어먹은 밥값이며 영화비가 미안하다며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흔들렸다. 나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순수한 그녀기에.

사실 그녀는 내 이상형이 아니었다. 허나, 놓쳐서도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알아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결국 어떻게 되든 마음 가는대로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 후로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고 우린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연인과 다름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며 남은 군 생활을 하루하루 채워나갔고

그렇게 시간은 조금씩 흘러만 갔다.

전역을 3달 남긴 가을.......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

알바 하느라 바쁜가 보구나 싶어서
틈나는 대로 전화를 걸고 편지도 보냈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별 도리 없이 그녀를 소개시켜준 그 누나에게 직접 물어보았으니 연락 안 되는 건 서로 마찬가지.
연락이 끊긴 후 본의 아니게 훈련 도중 크게 다쳐서 후송을 가야하는 상황이라 손 쓸 방법이 없이 참아야 했고

얼마 가지 않아 난 전역을 했다.

전역 다음 날, 그녀가 살던 동네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그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애꿎은 담배만 뻑뻑 태우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그 뒤.

그녀가 당뇨로 인해 한 눈이 실명되고 남은 한 눈마저도 위험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크리스마스 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술잔을 비우고 담배를 태우는 게 전부였던 크리스마스 날.

내게는 너무나도 잔인했던 크리스마스 날. 뼛속까지 각인이 되버린 크리스마스 날.....

그 이후로 이따금씩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매번 똑같다.

"지금 거신 전화는 당분간 수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지 6년째. 그녀의 목소리도, 그녀의 얼굴도 점차 흐릿해져 가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전화번호만큼은 잊지 않고 잊을 만하면 떠올리는 나 자신이 참 신기하다.

부모님, 여자친구, 내 번호 외엔 하나도 기억 못하는 나인데…….

오늘 밤은 조용히 술 한 잔 해야겠다.
그녀가 그렇게 좋아했던 버즈 노래와 치즈케익을 준비해서.

Ps 1. 이 이야기가 소설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마치 싸구려 영화 같은 이야기라 저도 해명할 때 마다 웃어 넘기죠.
Ps 2.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어머님과 같이 어디 요양원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 확실치는 않네요.
Ps 3. 사실 보지 못해도 상관은 없을 듯 합니다. 그저 살아만 있으면 고마울 뿐이겠죠.
Ps 4. 다른 카페에 올렸던 글을 살짝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딱 두 곳의 카페에 올렸던 글인데 아마 묻혀지고 삭제된 글이라 찾을 수는 없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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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시카입니다
12/09/26 02:54
수정 아이콘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야기군요ㅠ
Paranoid Android
12/09/26 02:58
수정 아이콘
迷我 이노래가 절로 생각나는 닉네임이네요.
이카로스
12/09/26 02:58
수정 아이콘
하.. 정말.. 항상 생각날 것같네요~ 가을이 아니더라도.. 잘읽었습니다~
12/09/26 03:00
수정 아이콘
너무 슬프네요.
MC_윤선생
12/09/26 03:59
수정 아이콘
아 씨.. 울었어 ..
12/09/26 08:08
수정 아이콘
살아 있어...정말 다행이네요...묻어두어야 할지...어떻게든 만나야 할지는 잘 선택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Walk through me
12/09/26 08:56
수정 아이콘
Charles님 // 저 이야기를 들은것도 몇 년전이죠. 살아있다는 소식만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혹시나 살아있다면....... 딱 한 번은 보고싶긴 하네요. 하지만 어떻게든 만나서는 안된다고 생각중이죠. 그냥 연이라면 만나겠거니 하고 있습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m]
바늴라마카롱
12/09/26 09:09
수정 아이콘
진짜 소설에서만 나올법한일이네요... 가을 아침부터 센치해지게 만드는 글입니다...
롱리다♥뽀미♥은지
12/09/26 10:46
수정 아이콘
가끔 현실이 참 잔인하다 느낍니다.
그런 비참함을 모르고 티 없이 밝은 아해들이 싫어질 때도 있고, 부나방처럼 그 밝음에 이끌리기도 합니다.
또,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곤 짜증이 나기도 하죠.

모든 생이 해피엔드 일 수는 없으니 나만이라도 행복했으면...
난 참 이기적인 인간입니다.
바카스
12/09/26 11:00
수정 아이콘
슬픕니다..
아마안될거야
12/09/26 11:20
수정 아이콘
walk through me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연락을 여자분께서 끊으셨군요.
그분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병세가 호전되셨길 기도합니다.
낭만토스
12/09/26 21:39
수정 아이콘
요즘 바빠서 피지알을 할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우연히 읽은 글이 울림을 주네요

정말 가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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