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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3/22 11:38:34
Name 바람모리
Subject [일반]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는 것.
제 아버지가 장남이면서 저도 장남입니다.
보편적인 여자사람이라면 좋아하지는 않을 조건을 가지고 있지요.
안그래도 안생기는데 생겨도 도망갈까 무서워요.

글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일단 나이많으신 분들의 고집에 관해서는 익히 알고들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고집이라고 하면 최씨고집을 알아주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황씨고집도 둘째가라면 서럽진않지만 꽤나 알아줍니다.
문제는 이른바 '똥고집'쪽이라는 것인데..

저희 할아버지는 자신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 생기면 절대 타협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고집을 부리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예를 들면 어제 당신께서 장에 나가 사오신 생선이나 닭이 다음날 반찬으로 나오지 않는다던가..
혼자 사용하시는 안방 화장실변기의 물을 내가 내려버렸다던가..

어쨌든 화가 나시면 일단 목소리를 높히는 것으로 시작해서 끝이 안나기 때문에,
화를 풀어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화는 나셨는데 저희는 왜 화가 나셨는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일이 더욱 커지죠.
그래서 왠만하면 져드리고 살살 달래드리는 쪽으로 일을 해결하려합니다.
저녁반찬으로 고기를 드린다던가..
생선가시를 잘 발라서 생선살을 수저위에 올려드린다던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첫째인 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지만,
항상 할아버지의 자랑은 셋째 작은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한 이후로 저희 아버지는 고등학교만 졸업하시고
닥치는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셨는데요.
셋째작은아버지는 오로지 공부만 해서 4년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 후,
삼성에 입사하셨고 인사부장까지 하셨죠.
지금은 개인회사를 차려서 꽤 성공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건 우리가족이지만 입버릇처럼 셋째 자랑만 하시니 기분이 안좋을 만도 한데,
저희 아버진 전혀 기분나빠하시질 않아요.

그런데 어느날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같이 모시고 사는만큼 할아버지께 용돈을 비정기적으로 드리는데요..
작은아버지들은 정기적으로 한달에 한번씩 모아서 보내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 기억에는 작은아버지들의 용돈만 남은거 같습니다.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용돈주는 작은애들이 최고지"
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설마 정말 그렇게 생각하실까.. 해서
"그럼 우리 아버지는 하는게 아무것도 없네요?"
라고 물어봤더니
"그렇지 너네 아버지가 하는게 뭐있냐?"

여기서 제가 화가 부왘 하고 나버렸습니다.
그럼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보내고 용돈만 꼬박꼬박 보내는게 낫겠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입밖으로 내진 않았죠.
어쨋든 버릇없는 짓이지만 한참 소리높여 싸웠습니다.
아.. 지금도 울컥울컥하네요..

그렇게 저녁을 다 먹고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시고 전 설겆이를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중얼중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혼자 당신께서 모아놓은 통장의 돈을 계산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설겆이 하는 물소리때문에 잘 안들려야 할텐데
돈얘기라서인지 굳이 그쪽에 신경을 쓰지않아도 잘 들리더군요.
자동으로 머리속에서 계산이 되는데 대강 생각해도 여러군데 통장에 2천정도 모아 놓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생각해보니 조금 심했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직접적으로 미안하다고는 안하시고,
"야야 내 돈 모아놓은거 너랑 동생이랑 반반 줄테니 나 죽으면 지사나 잘 지내주라"
라고 하시더군요.
"작은애들은 한푼도 안준다 지사는 너네가 해줄텐데 뭐.."

아아.. 거기서 다시 울컥하더군요..
"아 거!! 제사야 당연히 해드리는 건데 뭐 그런 소리하세요!!"
라고 소리는 또 질렀지만 화는 이미 풀려버렸습니다.

돈준다고 해서 화가 풀린것일까요.. 전 속물인 것일까요..

한번도 들은적없는 할아버지의 약한 목소리를 들어서 화가 풀린거라고 혼자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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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만큼
12/03/22 11:48
수정 아이콘
저희집도 글쓴분이랑 비슷해서 울컥하네요.
저희 아버지도 장남에, 저도 장남 거기에 저희 아버지께서는 많이 못배우시고 어렸을때부터 이것저것 일 하느라 학교도 못다니다보니, 작은 아들은 대학교까지 나와 지금은 글쓴이와 같이 작은집이 잘살뿐더러 작은집이 할머니의 자랑이죠.
그렇다고 저희집에서 못해드리는것도 아니고 저희 형편에 맞게 해드린다고 하지만 작은집에 해주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말 이것 뿐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일까지...난감하고 짜증이 솟구치는 아무튼 그러네요.
여튼 할머니만 생각하면 짜증나고 싫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낳으신 분이구 가족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고 있네요.
RadioHeaven
12/03/22 11:48
수정 아이콘
저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25년 넘게 살았었는데
할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있는 가족을 제일 먼저 신경쓰시지만
조금은 쑥스러우셔서 표현을 잘 못하시는 것도 있을 듯합니다. ^^
정말 큰정과 사랑은 님의 아버지와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있으실 거에요.
함께사는 가족들은 항상 옆에 있으니깐
그 소중함을 잠시 잊으시고 말하신 거였을 거라고 봅니다.
발가락
12/03/22 11:51
수정 아이콘
바람모리님은 속물이 아닙니다.
님이 속물이라면 저도 속물입니다.

결혼전 30년, 결혼후 10년동안 부모님과 같이 삽니다. 말이 같이 사는거지..
혜택받고 삽니다;;
이제야 제 힘이 좀 생길듯한 상황인데.. 이제는 부모님께 져드리는 상황이 많아지더라구요.

어차피 가족을 챙겨야하는 장남이고, 그 챙김상황에 금전적인 부분은 무시할수는 없습니다.

속물은 돈을 받아놓고 다른데 쓰는 놈들이 속물인겁니다.
켈로그김
12/03/22 11:52
수정 아이콘
할아버지가 츤데레... 죄송합니다..;

의사소통의 방법이 아무래도 달라서.. 일종의 믿음으로 대하는게 좋겠지요.
12/03/22 11:54
수정 아이콘
큰댁에서 별 말없이 할아버님 모시고 사는것만으로도
할아버님 뿐만아니라 다른 형제들은 많이 고마워할겁니다.
바람모리님 아버님도 바람모리님도 효자시네요..
사악군
12/03/22 11:56
수정 아이콘
흐흐흐 돈 문제가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그래도 공을 알아준다고 생각이 드셔서 화가 풀리신거죠.. 저도 비슷한 생각해 본 적 있어서 그 심정 알 것 같습니다.
PoeticWolf
12/03/22 12:06
수정 아이콘
아버지나 바람모리님이나 효심이 깊으신거 같아요. 얼마전 할아버지께 '넌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거 같으냐?'라고 혼난 절 굉장히 부끄럽게 만드시네요 ㅜㅜ
12/03/22 12:26
수정 아이콘
츠..츤데레!
12/03/22 12:57
수정 아이콘
하핫 저희집에서 요양원을 하고 있는데요. 뭐랄까 어르신들은 맞춰드리기가 쉽지가 않죠.
12/03/22 14:23
수정 아이콘
할아버지랑 이제 8년정도 같이 살고있는데, 정말 따로사는것과 함께사는것은 차이가 많더라구요.

저도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희가족만 살때는 할아버지 간만에 만나면 살갑게 인사도 하고 좋아하고 그랬는데
같이살다보니 불편한점만 느끼게 되고, 할아버지 세대들의 이해할수 없는 행동에 욱해서 소리도 지르고....

모든 손자들의 고민아닐까요?

전 참 나쁜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여간해서
12/03/22 15:04
수정 아이콘
다 생각하고 계시죠 왜 모르시겠어요
당신 역정 다 받아주고 말상대 해주고 하는 게 누군지...
그저 표현이 서투루신 거죠..
항상 작은 아버님 자랑하시는것도 속뜻은 아마
'니가 고생한덕에 애들이 잘됐다 고생많았다 미안하다...'
아닐까 싶어요 아버님은 또 그 속뜻을 아시니깐 전혀 기분 나빠하시질 않는걸수도...
알파스
12/03/22 15:10
수정 아이콘
원래 진짜 고맙거나 미안하면 표현하기도 어렵지않나요. 할아버님도 아마 그러실꺼에요. 살아온 세월이 얼마신데 큰 아들의 고충을 모르실리가 없지않을까요. 할아버님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을테니까요. [m]
12/03/22 16:04
수정 아이콘
저희집하고 비슷하네요 ㅠㅠ
할머니께서 계시는데 맨날 구박과 욕(말그대로 쌍욕-_-)만 하십니다. 친가엔 고모하나 있지만 고모는 '돈내고 요양원 왜보내냐. 우리는 지금도 보낸상태다' 이런 dog소리만 하고있고(용돈한번 안드리고 집에도 못오게합니다.), 할머니는 맨날 노인정가서 말도안되는 거짓말로 집안 흉만 보고 다니고. 덕분에 저희집은 지금도 동네 어딘가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을껍니다 크크
저번 주말에는 할머니가 밑반찬을 일주일이나 먹었다며 집에있는 반찬을 다 버리고 음식물쓰레기통을 안방에 갖다놓더군요.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예전엔 훨씬 더 심했다고 하는데(저희집에는 이모,외삼촌들이 절대 안옵니다. 엄마 시집살이를 너무 심하게 시켜서 꼴도보기싫다고..;;) 대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참.. 오죽하면 저희 부모님은 절대로 자식하고 안산다고 하십니다. 늙으면 다 저렇게 될꺼같다고.. 너네한테는 저렇게 하기 싫다고요.
바람모리
12/03/22 20:56
수정 아이콘
저희 할아버지도 복지관에 가시거나 명절때 친척들이 오면 흉을 보시죠..
요새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사실 매년 얘기하다보니 이제는 새로 뭔가를 말할 꺼리가 없거든요.

저희 부모님도 늙으면 자신들도 그럴거라고 말씀하시는데,
뭐 어쩌겠어요.
지금 슬슬 아버지가 할아버지 닮아가는 부분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저희집보다 훨씬 심해보이기는 하네요.
watervlue
12/03/22 17:43
수정 아이콘
글에서 뭔가 알싸한 느낌이 드네요.
저희는 전부 일찍 돌아가셔서 덜하지만 살아 생전에 어머니를 많이 고생 시켰다는건 알아요. 집에 오셨다 가신 다음날은 항상 우셨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 같은건 없습니다 . 그런데 부모님이 어느덧 할아버지 연세에 다가오니까, 비슷해 지는 느낌이 들어요.
요구사항도 까다로워 지고 , 조금만 아니다 싶어서 말하면 무조건 서운해 하시고.
차리리 조부모님이면 , 어느 정도 그려러니 하는데 부모님과는 서로 감정이 격해질때도 생기더군요. 따로 사는 자식 애지중지 하는게 뭔지도 알게되고...서운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조부님 닮아 가는 모습에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른 형제들에게 부담 주느니 그나마 제가 성향을 잘 아니까 제 몫이라 생각하려고요. 저도 또한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되겠죠?
시작은달콤하게
12/03/22 22:25
수정 아이콘
저는 어르신들 컴퓨터 알려드리는 강사일을 하고 있는데요.. 하하...
어째 대충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일하면서 느끼는데 어르신들은 갈 수록 더욱 아이가 되어가신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떠한 기점으로 점점 어려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치매라도 들면 완전히 갓난아이처럼 되어버리지요. 그래도 정신이 맑으실때
어르신 대하듯 하기보다는 내자식키우듯 하면 오히려 사이가 좀 개선되실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정신적인 피곤함은 크겠지만 사람의 큰 도리를 하고 계신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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