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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요? 아뇨. 저 쇼핑하러 왔는데.."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 또 학교에서 봐요~"
금세 멀어지는 그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녀는 얼빠진 기분이 들었다. 뭐하니 이 멍청이 쪼다 해삼 말미잘 해파리 같은 년아! 지금 당장이라도 접시물에 코 박고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 어리버리할 줄이야. 너무 오래 공부만 했나봐.. 그녀는 스스로가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영화 한편 보자는데 왜 그걸 거절하고 난리지? 몇 번을 되새길수록 자신의 변명이 정말 멍청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쇼핑을 해야 한다니, 그깟건 인터넷으로 사라고 이 멍청아!! 이마트랑 데이트하려는거니? 그런거니? 그녀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차가운 손의 느낌이 조금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어쩌면 이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 줄 지도 모르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래. 그냥, 그래. 이런 상황은 너무 뭐랄까 갑작스럽잖아? 그러자고 대뜸 따라가는 것도 우스웠을 거야. 응. 영화가 끝나면 시간이 늦어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을꺼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구! 티비 드라마도, 로맨스 할리퀸 소설책도 멀리한 지 오래인 그녀는 지금 마주친 현실이 마음속에서 계속 까끌거리며 속을 긁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공부, 공부만 열심히 했더니 어느 새 흔히 이야기하는 연애세포 같은것들이 죄다 죽어버렸나 싶었다. 그녀는 아찔했다. 아직 서른도 안됐는데.. 물론 그가 특별히 잘 생겼다거나 한 눈에 맘에 든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충분히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장을 보고 내일이면 또 다시 칙칙한 책장으로 둘러쌓인 채광도 별로 좋지 않은 퀴퀴한 냄새로 가득찬 연구실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구나. 그녀는 그 책 내음이 좋았지만, 오늘만큼은 내일의 하루가 실망으로 가득해짐을 느꼈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들키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조금 쿨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기는 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이렇게 영화를 보자고 해서 거절당하는 거야 크게 상심할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자신이 어리숙해 보였을까 싶어서 재빨리 뒤돌아온게 티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느와르, 신세계였다. 같이 안봐서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거 좋은 분위기로 만남을 가졌던 다른 '그녀'와 심야에 봤던 영화가 부당거래였을때,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애틋함과 두근거림 보다는 회한과 인생사, 마치 인생극장을 찍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은 이런 제안만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모든 일의 장점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꾸뻬'씨에게서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는구나.
영화 시간이 생각보다 널널하게 남았다. 원래는 딱 맞춰서 보려고 했는데, 그 애와 이야기하다 보니 다음 회를 보게 생긴것이다. 다행히 개봉관이 3개나 있어서 40분 정도만 기다리면 볼 수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용산을 둘러보기로 했다. 스타리그를 보러 가끔 왔을 때, 이 스포츠 스타디움을 보며 신기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늘은 뭔가 게임리그가 있으려나 하고 찾아갈까 하다가 관뒀다. 나는 이 스포츠를 좋아한게 아니라 스타리그를 좋아했었거든. 추억은 추억으로 훼손되지 않는 풍경화처럼 마음 한 켠의 벽에 걸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용산 아이파크몰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해 있었기에, 그는 재미있을 것 같은 가게들의 쇼 윈도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장바구니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식료품을 넣었다. 원래는 집에 떨어진 간장, 후추등과 야채. 그리고 과일을 좀 사려고 나온 길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카트에는 캔맥주,소세지,과자,우유 같은게 들어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그녀는 카트를 돌리고 다시 상품들을 제자리에 옮겨 놓기 위해 움직였다. 머리속이 온통 복잡했다. 쇼핑에 하나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건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결과를 통해 그녀의 노력은 꽤 괜찮은 보상을 얻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혼돈 그 자체다. 그녀는 그 때쯤, 자신이 포카칩 자리에 비엔나 소세지를 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카트를 반납하고 마트를 나왔다. 고작 30분정도 마트를 돌았을 뿐인데 온통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바보같을 줄은 몰랐다고, 마음속으로 계속 투덜거렸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아니, 한 번 거절했다고 바로 빠지는건 뭐야? 그냥 당황해서 툭 나온거라고!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그녀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왠지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학교에서도 예쁜 얼굴로 남자와 쉽게 어울리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 가는 사람들이 뒤돌아 바라볼 외모가 아님을 잘 알았다. 그냥 학습이 덜 되었을 뿐이라고! 그녀는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과제처럼 단계적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를 소망했다. 이건 말하자면 오류다. 에러. 수정이 필요하다. 수정하면 끝날 일이라고. 수정할 기회를 줬어야지 그럼!
그렇게 그녀가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cgv였다. 계단을 오르고 에스컬레이터를 지나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걸음을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냥 그가 만약 아직 영화를 보러 들어가지 않았다면 무언가 이 상황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이파크몰에는 영화관 바로 옆에도 수많은 가게들이 있었고, 그냥 어.. 쇼핑을 하러 왔다가 개봉한 영화가 뭐가 있는지 잠깐 살펴보려고 하는.. 뭐 그런 적당한 핑계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30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영화를 안 보고 있을리가 없지. 그녀의 마음속에는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어?"
이것도 우연이 또 겹친건가? 그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았다. 뭔가 안절부절한 얼굴로 두리번 거리는 그녀의 뒷 모습이 있었다. 매일 어두운 계통만 입고 있던 그녀였는데 새삼 상아색 원피스와 하늘거리는 연녹색 가디건, 빨간색 머리끈으로 살짝 묶은 짧은 머리가 참 봄스럽다고 느꼈다. 밝은 옷만 입으면 더 예쁠텐데. 그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앗,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희고 매끈한 볼이 보였다. 뽀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고 약 1초후에 '으악' 하고 두세걸음 물러났다. 으악이라니. 그는 다시 한번 웃음을 참아야 했다.
"여기서 뭐해요?"
"어?아. 어.. 왜 왜 영화 아직 안보시는거에요?"
얼마나 당황했으면 말까지 더듬는다. 귀엽게.
"아.. 그게.."
"아하.아하하. 저는요 그냥 그.. 영화 보신다고 해서 그냥 요새 무슨 영화가 있나.. 저기 저기서 뭐 살 것도 있었구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멋진 전차 프라모델이 유리 장식안에 들어있고, 건담이 멋스럽게 세워진 가게였다. 그는 입술이 씰룩거리는걸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프라모델 좋아해요?" "네? 프라모델이요?"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이 가리킨 위치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금세 귀까지 빨개졌다. 그는 그녀의 속내는 잘 몰랐지만, 어쩐지 나쁘지 않은 상황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아까 거절 당했을 때는 꽤 축 늘어졌었는데 지금은 팔팔하게 다시 일어선 기분이 들었다. "쇼핑은 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꺼냈다.
"그..저.. 아까는 제가 그, 그쪽이 싫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러니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 물론 영화를 꼭 같이 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오해하실까봐 하하 네..그.. 그냥 우연히 올라왔는데 또 마주치네요 신기해라.. 신기하죠 그쵸? 하하..하.. 영..영화 재밌게보세요!!"
이런 모습이 있었나? 그는 그녀가 이렇게 말을 빨리 하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그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휙 돌아가려는 그녀의 팔을 자신도 모르게 붙잡았다. 허, 삼류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 같네. 그녀는 아까보다 눈이 두배는 커져서 날 돌아봤다. 꽤 이거 진부한 클리셰 아닌가? 눈이 마주치고 약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속으로 침착하자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면심리조차 아마추어의 블로그 소설같네.
"사실 아까 이야기하다 영화시간이 지나서.. 어떡할까 하고 있었거든요. 영화가 별로라면..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요? 우리 둘 다 저녁 안 먹은 것 같은데."
그녀는 똥그란 눈으로 입을 뻥긋뻥긋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하루에 두 번 거절당하는 건 버티기 힘들었을거야. 그때 그녀가 팔을 움찔 움찔 하고 손에서 빼려고 하는 듯 했다. 그는 아차 하고 얼른 손을 풀었다. 그녀는 약간 찡그린 얼굴로, "너무 세게 잡아서 아파서.." 하고 잡힌 팔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미안해요. 긴장을 해서.." 이번에는 조심해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재빨리 나보다 약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뭐..뭐 좋아하세요? 제가 여기 되게 잘 알거든요!" 손을 잡으려 뻗었던 팔이 왠지 민망했다. 그는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고기면 다 좋아해요." 잘 안다던 그녀는 그새 스마트 폰을 꺼내서 아이파크몰을 검색하고 있다. 집중하는 그녀에게 살며시 다가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어깨 너머로 스마트폰을 보았다. 그녀의 스마트폰은 아이폰이었다. 상큼한 샴푸향과 새곰한 살내음이 살며시 풍겼다. 그리고 닿을랑 말랑 하는 볼의 온기가 살그머니 전해져왔다. 스마트폰의 화면은 아이파크몰 지도를 검색하며 작은 동그라미가 빙글빙글 원을 만들어 돌고 있었다. 빙글, 빙글. 빙글. 로딩이 끝나지 않습니다. 장비를 정지합니다. 어 안되잖아?
빙글 빙글 빙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