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시즌 롤드컵도 어느새 절반 이상의 일정을 마치고 단 네팀만이 남아있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펼쳐진 대장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어, 시카고를 거쳤고, 그리고 마침내 제가 살고 있는 이 뉴욕에서 결승의 두 주인공을 가리게 됩니다. 한국 대표 세팀 모두가 공연의 성지 메디슨 스퀘어 가든 안에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이, 이스포츠의 태동부터 지켜온 골수 게임팬인 저에게는 너무나도 설레는 일이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이 설렘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이스포츠와 게임을 좋아하는 이곳의 많은 분들과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13년 전으로 되돌려볼까 합니다.
2003년 가을, 9월의 어느날로 기억합니다. 온게임넷이 스타리그가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정확하게는 제가 살던 부산에서 야외투어가 펼쳐졌었습니다. 그 전에 코카콜라 스타리그때 대전에서 경기를 한적이 있지만, 엄청난 부지를 두고 야외무대에서, 결승도 아닌 8강에서 경기를 펼치는건 전례가 없는 모험이자 도전이였습니다.
당시 중학생이던 저는 8강 경기 장소이던 경성대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지하철도 한번 갈아타야 하고, 노선의 끝에서 끝으로 가는 여정이라 약 1시간넘게 걸리는 긴 거리였습니다. 설상가상, 밤에는 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스타리그 자체를 생방송이 아니라 집으로 와서 녹화 테이프를 돌려서 보던 때라 직관을 하러간다는건 생각하기 힘든 일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일생일대에 한번 있을것 같은 기회였기에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학원을 하루만 안가면 안되겠냐고 여쭤봤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하셨던것 같은데, 어린 자식이 떼쓰는데 이길 분은 아니셨던것 같습니다. 아빠에게는 비밀로 할테니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원래 하교 시간이 4시쯤 됐던걸로 기억하는데,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담임선생님께 경성대에 일이 있어서 청소시간을 빼먹고 먼저 하교하면 안되겠냐고 묻고 학교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행사길래 경성대에 가는거냐라는 선생님의 의문섞인 표정이 있었지만, 딱히 물어보시진 않으시고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저는 재빠르게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언덕길을 전력질주하며 저 멀리있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습니다. 게임 행사 때문이라고,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보러 가는거라고 얘기했다면 선생님은 뭐라고 했을지, 지금 생각하면 재밌기도 합니다.
5시 안팎으로 도착했을 무렵, 경성대 운동장으로 향하는 줄은 제가 생각한것 이상으로 너무나 길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당시 어느 팬카페에서 같이 가기로 하셨던 분들이 앞줄에 계셔서 비교적 좋은 자리에서 볼수 있었고, 그날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황홀했습니다. 제가 TV에서만 보던 저의 우상들이, 임요환, 홍진호, 박정석, 그리고 강민과 박용욱이, 제 눈앞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지켜보며 열광하는 수많은 관중들과 함께했습니다. 그 가을 밤의 광경은, 어쩌면 어린시절 단순한 취미였던 e스포츠를 지금까지도 열정과 사랑을 유지하게 해준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 날 학교에 돌아와서 애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전날 스타리그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 말고도 경성대에 뒤늦게나마 갔는데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투덜된 무리들이 꺼낸 주제였습니다. 저는 자랑스럽게 앞줄에서 모든것을 지켜봤다고, 마치 승리자가 된 마냥 으쓱됐고, 부러워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삼삼오오 스타리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덕밍아웃(..)이 된 셈입니다. 그전까지는 딱히 서로 공유하지 않던 스타리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때부터 몇몇의 친구들과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피시방에서 스타를 하며, 스타리그 VOD를 함께보며, 혹은 중요한 결승전이 있는날에는 친구집에 모여서 치킨을 뜯어먹으며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질풍노도와도 같던 사춘기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풋풋하고 즐거웠던 추억입니다.
뉴욕에서 E스포츠 경기를 직관하는게, 사실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작년에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북미 썸머 LCS 결승전이 있었기에 보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전 격납고에서 대기시간/경기시간 포함 9시간동안 감금당한(...) 이후에 "내가 다시는 게임 직관을 가나 봐라!" 라고 선언하고 5년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의 분위기는 13년전 경성대에서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흙밭에 간이의자 대열이 아닌, 행사를 위한, 뉴욕의 중심지에 위치한 최고의 실내체육관에서 펼쳐지는 이벤트라 좀 더 세련되었고, 더욱 관람자들의 편의가 제공된 공간이였습니다. 저는 경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해서 제 주변의 관객들을 둘러보곤 했습니다. 그중에는 저보다도 어린 친구들도, 더 나이가 많은 어르신도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욕에서 지켜본 최초의 E스포츠 직관이였겠죠. 한국 사람들의 관람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시도때도 없이 TSM을 외친다던가!),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와 환호성에서는 13년전 제가 느꼈던 즐거움과 환희가 보였습니다. 경기는 원사이드하게 끝났었지만, 적어도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였던 경험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롤드컵 4강이 눈앞에 있습니다.
어릴 적 경성대에서 봤던 프로게이머들은 하나같이 다 멋있고 저보다 키가 큰 형님들이였는데, 어느새 4강에서 결전을 준비할 선수들은 저보다 동생뻘이고, 저는 이제 코치들이나, 해설자들과 비교해야 할 나이뻘이 됐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가 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한국 세 팀의 선수들이 모두 멋있는건 똑같고 더 나아가 대견함과 존경스러움까지 느껴집니다. 제가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게임리그를 보고 자라와서 그런지, 북미 선수들을 지켜보던 감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듭니다.
SKT를 상징하는 강력함은, 이스포츠를 떠나 스포츠 팬인 제가 어떤 전례를 찾아봐도 쉽게 비교하기 힘들정도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부진은 있어도 몰락은 없다"라는 그들의 모토가, 단 한번도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는 것에 경외가 담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페이커의 대단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안하고 갈 수 없을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임요환과 페이커, 누가 더 위대한 게이머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지만, 둘의 전성기를 지켜봐온 제가 확신할수 있는 사실 한가지는, 페이커 역시 임요환만큼 악착같은 승부욕과 팬들을 위한 플레이를 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프로게이머"의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췄다는 점입니다. 몇 년전, 스타팬들은 우리는 임요환이 프로게이머를 대표하는 사람이였다는 것에서 자랑스러워 했듯이, 지금의 롤 팬들 역시 이상혁이라는 선수가 한국의,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대표 프로게이머라는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SKT가 강력함의 상징이라면, 락스 타이거즈는 그에 못지않은 강함과 함께 누구도 따라 올수 없는 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락스의 선수들을 지켜보면, 늘 웃음이 나오고 즐거운, 해피 바이러스를 전도하는 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치 "즐겜"을 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우승후보를 떠나 언제나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승부 이상의 것을 선사하는 악동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롤, 스타크래프트, 다른 스포츠를 막론하고 제가 본 팀들중에 가장 "스포테인먼트"를 잘 보여주고 있는, 가장 애착이 가는 팀입니다. "게임은 원래 즐길려고 하는거야"를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학창시절에 베프였으면 싶은 친구들의 모임이라고 할까요.
올 시즌의 삼성 갤럭시는, 이번시즌의 신데렐라이자 소년만화의 주인공이며, 한국 e스포츠의 위대함을 직접 증명하는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주목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시즌내내 대두되던 끝없는 노력의 산물이 가장 큰 무대에서 가장 크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노력에,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롤 프로게이머인 엠비션의 관록과 리더쉽이 들어가서 삼성은 정말 슬램덩크의 북산같은 강팀이 되었습니다. 엠비션이 롤드컵 진출 당시 울먹였을때, 저 역시도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찡한 감정은 저만의 오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삼성 관계자분이 이 글을 볼지 모르겠습니다만 - 뉴욕에선 개인적으로 32번가와 5가 사이에 위치한 "동천홍" 짜장면이 제일 맛있는것 같습니다. 큐베 선수 참고하세요...)
강력함의 SKT, 즐거움의 락스, 근성의 삼성. 그들을 대표하는 단어는 다르지만 세 팀 모두 4강에 오를 자격이 있는, 더 나아가 소환사의 컵을 들기엔 충분한 매력이 있는 팀입니다. 혹자들은 미국팀이 없고 한국팀이 대부분인 롤드컵 4강이 미국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할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 얘기에 그렇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4강 경기를 지켜보는 본토 관객들이 "애국롤"을 지켜볼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수준 높은 경기력에 감탄하며 경외심에 쌓인채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월드컵에서 브라질이나 독일, 스페인의 경기를 보듯, 포스트시즌에서 커쇼와 채프먼의 투구를 입이 벌어진체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계 최고의 팀들이 롤드컵에서 펼치는 화려한 명경기들이, 아마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최고수준의 E스포츠 경연을 지켜볼 관객들에게 게임과 e스포츠를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뿌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13년 전의 어린 제가 느꼈던 그 감정처럼 말이죠. 저 역시 최고의 경기를 기대하며 그 자리에서 세 팀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유니폼은 SKT꺼밖에 못 구한 관계로 SKT 옷을 입을것 같습니다.... 락스 삼성 미안해요...)
세 팀의 선전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