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반말체로 쓰는 점 양해바랍니다.
*개인적인 일기와 같은 글입니다.
무던히도 한 게임을 오래 즐겼다.
도중에 다른 게임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와우도 했었고, 디아2도, 디아3도 했었고, 포트리스나 카트라이더 같이 가벼운 게임도 즐겼었다.
하지만 다른 게임은 언제나 한 시기였지만 브루드워는 항상 함께였다.
시간이 흘러 2010년 즈음이 기점이었던 거 같다.
02학번이었던 내 친구들은 하나, 둘 사회의 한자리를 찾아 떠나갔고,
약간의 방황을 거치며 대학원이라는 곳에 정착한 내 주위엔, 함께 술한잔 걸치고 스타 한판할 친구라는 것이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스타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피시방에 몰려가 하는 게임이 아니라
집에서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가며 생전 모르는 사람들과 한판 두판 즐기고 나오는 게임으로 바뀌어갔다.
뿐만 아니라 온게임넷 마지막 스타리그가 없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LOL과 스타2로 빠지면서
스1 배틀넷엔 스타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진성 스타유저들만 남게되었다.
이제는 공방에서조차 이기기 힘들어졌고 점차 1:1은 기피하면서 일주일에 2~3판 팀플이나 즐기는 매우 라이트한 유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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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한 대학원에서 함께 스타를 즐길만한 사람을 찾지 않은건 아니었다.
매번 남자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의례껏 묻는 나이, 고향, 전공을 거쳐
뒤에 남는 질문은 항상 '스타는 할 줄 아냐? 당구는 칠 줄 아냐? 술은 좋아하냐?' 였다. 마치 내 대학생활을 대변이라도 하듯.
하지만 이놈들이 지독하게 공부만 한건지, 내가 지독하게 놀기만 했던건지 성에 차는 신입생은 들어오지 않았고
그렇게 대학원 입학 4년차가 되어 난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런 걸 묻는 것조차 방정맞게 되었고 스타는 신입생들과 나의 세대차이(?)를 느끼게 해주는 기제가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선배가 스타 잘하신다면서요?"라고 묻던 그 녀석이 등장했던 건.
평소에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공부얘기만 하면 주눅들던 그 녀석이 먼저 말을 건낸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반짝거리는 눈을 보면서 알았어야만 했다. 이 녀석은 위험하다는 걸.
서로간의 약간의 게임 추억을 풀어놓은 다음에 "다음에 한판 꼭 하자" 라고 했던 약속이 실현된 건 생각보다 늦은 시기였다.
3월말에 했던 말들이 5월 초에나 성사가 되었으니까.
바쁘기도 했고, 박사씩이나 되서 석사 끌고 나가서 게임하는 모양새가 게임을 좋아하지 않은 선량한 학생들의 눈에 이상해 보일까 걱정도 됐고,
무언가 내 직감이 내 발목을 잡아 끌기도 했다.
그러던 5월의 황금 연휴 중 하루, 나는 밀린 공부를 하러 학교에 나갔고 학교에는 그 후배놈과 다른 후배놈 하나가 있었다.
연휴라 학교 식당이 문을 닫았고 점심을 먹으러 우리는 밖으로 향했다.
그때 눈에 띈 피시방, 나는 잊혀졌던 기억의 한 끄트머리를 꺼내서 "우리 밥먹고 스타 한판 할까?" 라고 말을 꺼냈고,
다시 그아이는 눈을 밝게 빛내더니 한마디 꺼냈다. "아 마우스 놓고 왔는데..."
짜장면을 한그릇 먹고 오랫만에 남자 셋이 피시방으로 향했다. 다른 후배놈은 디아3나 하고 있으라 하고 스타를 켰다.
우선 가볍게 한판 서로의 실력이나 알아보자고 이야기를 했다. 종족은 내가 저그고 내가 선배니까, 후배놈이 프로토스를 했다.
맵은 파이썬. 나는 6시, 후배놈은 9시였다.
그런데 그런 게 있다. 동네에서 스타좀 한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 정석플레이를 한다.
왜냐하면 변칙적인 수에만 안당하고 중장기전만가면 내가 무조건 이긴다는 오만함이 있기 때문에.
오랫만에 자존심이 걸린 1:1 승부였지만 그 오만함은 다시금 머리를 치켜들었고
나는 무난하게 12앞-스포닝-3시앞마당 3해처리 체제로 갔다.
오버로드로 살펴보니 후배놈도 앞마당에 포지 짓고 포톤하나 넥서스를 간다.
3해처리가 완성되고 서서히 드론을 채우고 해처리를 늘려나갔지만 큰 마찰이 없었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이 놈도 나처럼 정석적으로 장기전만 가면 내가 무조건 이겨. 라고 생각하는 동네 고수가 아닐까?'
그리고 놈의 첫 진출. 까마득히 밀려나오는 질드라에 나는 나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놈의 첫 진출은 나의 3시 앞마당을 향해 날을 세웠고 3시 앞마당을 심시티 해놓긴 했지만 심시티로 막을 수준의 병력이 아니었다.
럴커.. 럴커가 필요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자원이 부족했던건지 분명히 눌러놨던 럴커 업그레이드가 안눌리면서
내 럴커 개발이 늦어졌고 불행히도 3시 앞마당의 히드라 6기는 이제 막 럴커에그로 변하고 있었다.
시간.. 시간이 필요했다. 히드라와 저글링으로 이리저리 시간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나의 상황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오히려 놈은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까지 무리하게 3시 앞마당으로 밀치고 들어왔다.
뒤늦게 완성된 럴커와 생산된 히드라들로 놈의 병력은 전멸시켰지만 3시 앞마당은 부서져버렸다.
다행히 3시 본진에 해처리를 폈기 때문에 드론의 피해가 많지 않았고 놈의 병력도 다 잡았기 때문에 아직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앞마당에 해처리를 피고 드랍업을 완료하면서 대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후배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선배로서의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그래도 대학원에서 제일 스타잘하는 놈이라고 유지해왔던 나의 지위를 잃지 않고 싶어서일까?
이후 30분간 혈전이 이어졌고, 나는 내 스타인생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집중력과 피지컬을 보였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커세어와 셔틀드랍을 거의 대부분 스컬지로 요격했고
상대의 넥서스도 꽤 부쉈으며 디파일러의 스웜과 플레이그까지 완벽하게 사용하였다.
비록 자원이 발목을 잡아 울트라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나의 스타인생에서의 '인생게임'을 했다.
가볍게 서로 실력이나 테스트 해볼까 하며 시작했던 게임은 50분이 흘렀고, 중간엔 동시에 자원 릴레이를 하는 처절한 양상으로까지 진행됐다.
'gg'를 치고 나오는 순간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다른 후배놈이 놀려대기 시작했다.
"우캬캬 형 뭐에요? 형이 스타 제일 잘한다면서요? 캬캬캬"
패배자에게 어김없이 쏟아지는 야유를 뒤로하며 씁쓸히 흡연실로 담배를 물고 가는 나에게 승리자가 한마디 건낸다.
"와 형 진짜 잘하시네요. 깜짝 놀랐어요."
분통이 터졌다. '내가 진짜 잘하면 니는 그럼 얼마나 잘한다는 거냐?' 라고 쏘아주고 싶지만 선배의 체통을 지키고 싶어
"아냐 잘했다. 진짜 잘하네" 라고 간단한 축하의 인사를 남긴채 담배를 물었다. 제길, 후배놈의 대사가 항상 나의 대사였는데.
담배를 물고 생각했다. '내가 저녀석과 10판을 붙으면 몇판이나 이길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생각했다. 아마 1~2판도 힘들꺼라고.
왜냐하면 나는 정말 솔직히 그 경기가 '인생경기'였다.
손속은 어렸을 때보다 느렸을지 몰라도 침착함과 맵의 이해도, 전술적인 판단은 거의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것이었고,
럴커 개발이 한번 안눌려서 늦어진 걸 제외하고는 나의 실수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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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패배는 아쉽고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실력의 차를 느낀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후배놈에게 고마웠다.
덕분에 나는 나의 인생에서 꽤나 오랫동안 기억남을 만한 게임을 했고 아직도 자기전에 그 게임을 생각하면 설렌다.
더이상 늘 리 없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며 남몰래 흥분한다.
그리고 아마도 또 꽤나 오랫동안 스타를 할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패배의 기억들이 늘어가고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순간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기억에 남는 경기를 하기 위해서, 추억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 아마도 배틀넷을 들락날락 거릴 것이다.
ps- 게임게시판에 써도 되는건가요? 안맞는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주셔도 좋습니다.
ps2- 오랫만에 겜게에 글을 쓰는데 스타1 카테고리가 없네요. 슬퍼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