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0/01/20 23:12:40
Name 及時雨
Subject 한강 유람선의 호랑이 모형 이야기
qQyJo7u.jpg
漢江에 유람선 띄운다 경향신문 | 1985.03.14
https://bre.is/m2UFtroj



1985년, 서울시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을 마무리 지으며, 수상 이용에 대한 계획을 잡기 시작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민자사업자를 유치하여 운영하는 유람선 계획.
약 70억원 규모의 사업이었고, 신청을 받기 전부터 유수의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며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강 유람선 사업자는 주식회사 원광과 주식회사 세모, 2개 회사로 결정되게 됩니다.




86nLyyR.jpg
漢江에「호랑이 遊覽船」 6월부터 7개模型 운항 매일경제 | 1986.01.17
https://bre.is/UPMh2bP8



1986년 1월 17일, 두 회사의 유람선 모형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평범한 원광의 유람선과는 달리, 세모 측 유람선은 상당히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랑이와 사자가 각각 선수에 위치한 1, 2호, 갑판에 길이 20m 짜리 날개를 지닌 공작을 배치한 3호, 천마를 사이에 둔 채 양 쪽에서 유니콘이 옹위하는 모습의 4호까지.
모형과 시안이 공개된 이후, 상당한 반발이 일어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JBcqFZA.jpg
漢江유람선 動物모형 白紙化 매일경제 | 1986.01.21
https://bre.is/Ry7EKs2j



결국 고작 닷새만에 이 호랑이 모형 유람선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운행 백지화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시민들 반응은 "서울시가 한강을 어린이 놀이터로 생각하느냐", "당국의 유치한 심미안에 놀랐다", "서울에는 어린이만 사느냐" 는 등 자못 거센 반발투성이였습니다.




4J6plXE.jpg
"동물모형 유람선 왜 헐뜯나…" 동아일보 | 1986.01.27
https://bre.is/HtFTc35M



기묘하게도 이 무렵, 언론사에는 호랑이 모형 유람선을 옹호하는 독자들의 편지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편지들이 여론조작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보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는 점이었죠.
우체국의 소인이 모두 같고, 주소와 발신인이 거짓된 것도 있어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모형 유람선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xMiichW.jpg
漢江에 맹수는 안어울린다 경향신문 | 1986.02.04
https://bre.is/gbqGojad



당시 서울시 시정자문위원회에서 나온 전문 자문위원들의 평가 또한 상당히 혹독했기 때문입니다.
세모 측에서는 사자나 공작은 포기하더라도, 끝까지 호랑이는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호랑이만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세모 측에서 왜 하필 호랑이만은 꼭 지키고 싶어했을까요?
사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1Yu2q2b.jpg


하필 호랑이 모형은 이미 만들어 놨었거든요.
그것도 엄청 큰 규모로...
결국 이 호랑이 모형은 쓰임을 잃고 한동안 방치되게 됩니다.




rz4uuk0.jpg
漢江유람선 우여곡절 끝에「새模型」공개 매일경제 | 1986.02.15
https://bre.is/GPAmKtYN



세모 측에서는 결국 새로운 디자인의 유람선을 제작해 한강 유람선 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사업을 시작한 것까지는 좋은데...
기껏 만들어 놓은 호랑이 모형이, 이제는 그저 짐덩어리가 되고 만 게 문제였죠.
결국 1988년, 세모 측은 쓸모 없어진 호랑이 모형을 서울시에 기증합니다.




azs4dDG.jpg
호랑이모형 유람선 果川수송싸고 고민 경향신문 | 1988.03.17
https://bre.is/XTcUK2tf



일단 기증을 받았으니 어디 놓긴 놓아야겠죠.
서울시에서는 과거 시정자문위원들의 의견을 따라, 과천 서울대공원에 이 호랑이 모형을 세워두기로 합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다시피 워낙에 큰 모형이라, 육로로는 도저히 이동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동작대교까지 한강을 따라 수상 이동하고, 동작대교에서 건져올려 과천으로 이동하는 플랜을 세우게 됩니다.




B4YRclE.jpg
v9ScKGF.jpg
https://bre.is/ME95jDde


그리하여 이 기구한 호랑이 모형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강 유람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행주대교에서 동작대교까지 한강을 타고 이동한 뒤, 거기서 끌어올려져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호랑이 모형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라면 참 좋을텐데.
아마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 이야기의 끝이 고작 이렇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atfzoZ9.jpg
세모유람선 특혜 확인 한겨레 | 1991.08.21
https://bre.is/rXEAsSNP


1991년, 한강 유람선 사업의 특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원래부터 세모 측에게 사업을 넘겨주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고, 사업자 선정 기준 또한 이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당초 단일 기업이 참여하는 사업이 될 예정이었지만, 기준상 세모가 2위에 머무르자 억지로 사업자를 둘로 늘리기까지 했죠.
이는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의 지시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고, 명백한 비리 스캔들이었습니다.


이때 세모의 비리를 미리 뿌리 뽑았더라면, 어쩌면 먼훗날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세모의 한강 유람선 사업은 1997년 사업 부도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1999년, 청해진해운으로 이름을 바꿔 해운 사업에 발을 들인 이들은, 우리 모두가 결코 잊지 못할, 끔찍하고 참혹한 사고를 저지르고 맙니다.




7YIRUDX.jpg


아직도 서울대공원, 동물원 앞에 호랑이 모형은 앉아있습니다.
그저 아이들을 위한, 구경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호랑이 모형.
하지만 이 호랑이 모형에 얽힌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9-22 16:4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유리한
20/01/20 23:26
수정 아이콘
보자마자 엇 서울대공원 호랑이랑 똑같네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똑같은 호랑이네요 크크
及時雨
20/01/20 23:28
수정 아이콘
사실 지난주에 서울랜드 갔다왔는데 쟤는 왜 아직도 그대로인가 싶어서 유래를 찾아보니까 이런 스토리가...
동굴곰
20/01/20 23:30
수정 아이콘
그 이름 유병언...
20/01/20 23:39
수정 아이콘
세모.. 유병언.... 어린이??
덴드로븀
20/01/20 23:44
수정 아이콘
어째 어디서 많이 본 호랑이같은데? 설마? 했더니 진짜 서울랜드 그 호랑이네요. 헐... 이런 스토리가;;;
DownTeamisDown
20/01/20 23:4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세모가... 사실... 다단계로 큰회사였는데 무리도 많이했고... 거기에 나중에 부도냈지만 다시 청해진해운이 되고...
아 그리고 한강유람선은 이랜드 계열인 이랜드크루즈 라는 회사가 현재는 운영중입니다.
유지애
20/01/21 00:09
수정 아이콘
엄청난 나비효과네요...
오래된낚시터
20/01/21 01:23
수정 아이콘
오대양때나 세모 비리때 재대로 뿌리뽑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였죠
둘리배
20/01/21 07:20
수정 아이콘
와 이거 썰풀면 재밌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콩탕망탕
20/01/21 11:48
수정 아이콘
오.. 이런 사연이 있었네요.
사진의 각도 때문이겠지만, 한강에 떠있는 호랑이는 통통한 아기 호랑이 느낌인데
공원에 있는 호랑이는 뭐랄까 더 사납게 느껴지는 인상이네요
及時雨
20/01/21 16:35
수정 아이콘
정면에서 올려다보면 꽤 무섭습니다...
https://images.app.goo.gl/rFFQr6jjA6tptxnc8
及時雨
20/09/22 17:16
수정 아이콘
와 이게 추게라니 감사합니다
사실 좀 기대하면서 썼는데 덧글 안 달리길래 망한 줄 아랏는대
20/09/25 02:53
수정 아이콘
와 이런 스토리가 있었네요
터치터치
20/11/24 18:15
수정 아이콘
요즘 감성으로는 다시 한강에 띄우면 러버덕처럼 인기가 있을 거 같은데

물론 비리로 점철된 호랑이라는 아픈 상처도 같이 띄워야겠지만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137 멕시코는 왜 이렇게 되었나? 마약 카르텔의 탄생 [16] 알테마24813 20/02/25 24813
3136 개신교계열 이단의 계보 -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104] Alan_Baxter19216 20/02/24 19216
3135 [정보] 청소기를 청소해보자 [25] 율리우스카이사르13356 20/02/22 13356
3134 [일상] 두부 조림 [9] 연필깎이8038 20/02/20 8038
3133 어머니는 고기가 싫다고 하셨어요 [27] 이부키12167 20/02/14 12167
3132 미움 받는 남자(嫌われた男) [11] 스마스마12305 20/02/05 12305
3131 인터넷에서의 'vs 고자되기'에 관한 리포트 [30] 아마추어샌님11173 20/02/04 11173
3130 드라마 '야인시대' 세계관의 최강자급의 싸움 실력 순위에 대해서 [62] 신불해32649 20/01/27 32649
3129 지난 토요일 신촌에선 왜 지진이 난걸까? [59] sosorir22246 20/01/23 22246
3128 붕어빵 일곱마리 [38] Secundo10597 20/01/22 10597
3127 기업의 품질보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6] Daniel Plainview13839 20/01/22 13839
3126 한강 유람선의 호랑이 모형 이야기 [14] 及時雨11973 20/01/20 11973
3125 [역사] 1919년 어느 한 조선인 노스트라다무스의 기고글 [35] aurelius18165 20/01/19 18165
3124 한 해를 합리적으로 돌아보는 법 [14] 2212267 20/01/01 12267
3123 [11]"죽기 위해 온 너는 북부의 왕이야." [16] 별빛서가14999 19/12/23 14999
3122 [에세이] 나는 못났지만 부끄럽지 않다 [71] 시드마이어21787 19/11/07 21787
3121 족발집에서 제일 예쁜 여자. [74] Love&Hate41928 19/11/05 41928
3120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feat. 아인슈타인) [62] Gloria30135 19/11/02 30135
3119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일반화의 오류가 그것만 있다는 성급한 일반화를 멈춰주세요 :) [9] TheLasid13222 19/11/01 13222
3118 오스카와 노벨상 주인을 바꾼 그 바이러스 [23] 박진호22692 19/10/26 22692
3117 번개조의 기억 [37] 북고양이18887 19/10/25 18887
3116 어플로 여자 사귄 썰 푼다 [39] Aimyon29019 19/10/15 29019
3115 서문표(西門豹) 이야기 [29] 신불해18924 19/10/12 1892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