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기와 폭력, 박해의 텍스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에는 과장되거나 거짓된 이야기와 진실이 함께 뒤섞여 있다. 시대가 흐르고 살아남은 텍스트를 모든 후대인들은 남겨진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비교해보며 교차 검증을 거친다. 거기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이야기들은 진실에 가까워진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만들었다.
1. 전쟁이나 질병, 재해 등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규칙'에 살짝 금이 가게 되면, 사람들은 큰 공포를 느낀다. 우리가 지켜 오던 질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2.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질서와 생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3. 이에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규칙을 가장 확실하게 위반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내고, 그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 전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쉽게 인정받는다. 왜나하면 그들은 어쨌든 뭔가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니까. 세계에 규칙에 금이 가게 만든 일에 대해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현재 눈앞에는 조치 가능하고 폭력적 욕망도 만족시킬 수 있는 '분명한 죄인'이 놓여있다.
박해와 폭력의 텍스트는 그런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외쳤기 때문에 텍스트를 기록하는 이는 자신들이 잘못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다음 세대는 잔인하고 미개하게 기록된 텍스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2. 희생양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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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에 대해서 아나?"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는 봤어. 날씨가 추워지면 나뭇잎의 색깔이 변한다는 이야기 말이지?"
"그래. 너희들의 밀림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지. 그리고 직접 보게 되더라도 우리들만큼 그 색깔에 큰 감동을 받기는 어려울 거야. 이 파름산도 가을이 되면 퍽 훌륭한 단풍이 들지. 그리고나서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뜨리고 헐벗게 되지. 동물과 식물의 재미있는 차이야. 동물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더 길고 두툼한 털을 가지게 되는 놈들이 많지. 혹은 음식을 잔뜩 섭취해서 체중을 불리거나 하지. 그런데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오히려 헐벗지."
"그야 나무들은 체온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그 잎으로 태양빛을 마시지. 그렇다면 햇빛이 부족한 겨울에는 더 많은 나뭇잎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 편이 더 많은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왜 나무들은 반대로 행동하는 거지?"
"나뭇잎을 늘여서 얻게 되는 이득보다 나뭇잎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분을 아끼는 쪽의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
"정확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이 왔을 때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확장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야.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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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의 붕괴는 전쟁이나 재해 같은 커다란 일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개념은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누군가의 것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시작되고, 당연히 그 '무언가'는 희소하다. 모두가 갖고 있다면, 또는 내가 그것을 가진다고 해도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을 물건이라면 갖고 싶어 하지 않을테니까.
성서의 구약 시대에서는 이 욕망을 집중적으로 경계했다. 하라. 하라. 하라. 하지마라, 하지마라, 하지마라 등으로 구성된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남의 것을 욕망하는 것' 자체를 규제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0:17)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이런 식의 규제로는 욕망과 욕망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세상에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갖지 못한 불만은 사회 내에서 더욱 커지고, 사람들의 분노는 빠르게 상승하고 집중되며, 그것을 풀기 위해서 하나의 타겟이 정해지는 것도 잦아지게 된다.
신기한 건,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XXX 탓이야!!"라고 외치는 그 'XXX'가 해소되었을 때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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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다시 나무로 돌아가볼까. 겨울이 왔을 때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공격한다면 나무는 죽고 말 거야. 그래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만장일치하에 잎을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거야. 잎의 희생으로 나무는 살아남게 되지. 사람들의 집단도 마찬가지야.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아. 그 공포와 증오는 희생양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으니까.“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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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으로 사람들의 삶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사람들은 희생양의 희생만으로 무언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을 '정의롭지 못한, 죽어 마땅한' 집단으로 프레임을 씌우게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 집단이 희생되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방관한다. 결국 그들이 죽지 않으면 이 스트레스와 공포는 해소되지 않을 테니까.
'죽어 마땅한 이'가 죽었으므로 앞으로도 박해와 폭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겠지만, 여기서 독특한 하나의 이벤트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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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독특한 관점이군."
"무엇보다도 독특하며 신기한 것은 증오의 대상이어야 하는 그 희생양이 어느 순간부터 존경과 애정, 숭배의 대상으로 바뀐다는 점이지."
"어째서 그렇지?"
"조금 전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어. 질서와 평화가 도래하는 거지. 이것은 집단에겐 신비롭기까지 한 경험이야.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하면 무질서와 혼란이 오는데, 그 희생양을 공격하니까 질서와 평화가 온 거지. 그런 놀라운 차이는 집단을 당황하게 하고 결국 집단은 그 희생양에게는 다른 자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고 믿게 되지. 그래서 집단은 그런 희생양에게 특별한 숭배를 바치고 다른 자들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이 가장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야. 나무의 경우 그건 단풍이라고 부르지. 집단의 경우에는 뭐라고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왕이라 부르는군.“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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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제물을 바치고 질서를 잡은 구성원들의 마음속에서 광기가 물러난 뒤 양심이 돌아오면 이와 같은 마음이 자리잡게 된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어.'
여기서 구성원들이 양심고백을 하고 다시 희생양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면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겠지만, 구성원들은 이 생각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다. 이미 희생양은 죽었고, 죽은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내가 그 희생양을 변호함으로써 얻을 어떤 소득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내가 다음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더 쉬운 생각을 택한다.
'근데 어쨌든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
덕분에 적나라한 박해와 폭력의 텍스트는 다음 세대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발견한 세대는 희생양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의 누명을 벗겨 주고 인정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또다른 광기와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고, 그들 시대의 희생양을 죽이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역사가 반복된다.
3. 메커니즘의 붕괴 시도
십계명만으로 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성서에서는 신이 그의 아들을 내려보냈다고 한다.
'신의 아들'은 새로운 계명을 선포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욕망하길 원했고, 자신을 보낸 이를 욕망하길 원했다. 그래서 십계명의 진의였던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반복되는 피의 역사가 여기서 끝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과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그는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어야 했다. 우러러보는 대상, 아이돌(Idol)이 되었어야 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에게 이를 원했으나 그는 그 자리에 서지 않았다. 오히려 당대의 가장 낮은 자들과 함꼐 먹고 마시며 그들의 편이 되었고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 칭했다.
결국 그는 세상을 흔들고 수많은 욕망들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들이 원하던 열망들을 충족시키지는 못했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의 질서는 붕괴되었으며 이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결국 그가 죽어야 했다. 그를 원하고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한 목소리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외쳤고, 제자들은 분노에 찬 군중들 속에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왕의 대접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그는 얼마 뒤 예루살렘에서 그 수많은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결국 세상에 또 하나의 분노가 뭉쳤고, 또 하나의 희생양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4. 반전
이제까지의 메커니즘은 [무질서의 고조 → 희생양 살해 → 질서의 회복] 순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인 질서의 회복에는 '그래도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는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동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죽음 이후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겁에 질려 흩어져버렸던, 모래알같은 그의 제자들이 숨어있기는커녕 세상 밖으로 나오더니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일들을 시도한 것이다.
"당신들이 죄 없는 예수를 죽였다. 하지만 그분은 부활하셨다."
두 번째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듯 했으나 첫 번째 이야기에 세상이 흔들렸다. 리더가 모두의 증오를 떠안고 희생양으로 죽은 마당에, 이들은 무엇을 얻겠다고 다시 뭉친 걸까? 그가 정말 부활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들이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희생양이 죄가 없었다고? 그렇다면 우리 죄 때문에 죽은 거라고?
5. 계속
인류는 언제나 희생양이 필요했다.
우리와 같은 사람 중 하나를 우러러 볼 수 있는 위치에 둔 다음 희생시켰다.
희생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그 희생양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고
증오의 대상이 죽으면 증오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대상을 기린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모두가 같이 죽였기 때문에 기릴 수 있다.
사실은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해도 공범자들은 서로를 정죄할 수 없으니까.
펜으로, 키보드로 희생양을 지정한다.
국민청원으로, 지지서명으로.
40만, 60만이 넘어가는 청원에 반전이 있어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그 수많은 청원을 올린 사람들이 내 반대편에 서서 이렇게 얘기할테니까.
"어쨌든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
이천 년 전 '사람의 아들'의 제자들이 외친 말은
어째서인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이천 년 전처럼 수많은 의혹의 시선들을 함께 지닌 채.
그리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희생양은 만들어지고 또 죽어가고 있다.
참고도서
-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 오지훈, 『희생되는 진리』 (홍성사)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황금가지)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9-22 16:4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