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10/05 21:47:03
Name 어느새아재
Subject 하이 빅스비 (수정됨)
"하이 빅스비 한시간 뒤에 알람"
한번 게임을 하면 시간가는지 모르는 나에게 거는 최소한의 제약.
세상이 참 좋아졌다.
한 손은 마우스 한 손은 키보드에 둔 채 목소리 만으로 전화를 걸고 알람 설정을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이놈이 자꾸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잠깐만 목소리를 높여 정신없이 떠들다 보면 어느새 핸드폰에 빅스비가 호출되어 있는 것을 본다.
말도 안되는 문장을 인식하고
"죄송해요. 제가 무슨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어요"라고 사과를 하고 있다.
너 부른거 아니거든이라며 빅스비 알람을 끄지만, 블루투스 이어폰을 구매한 이후 다시 알람을 키게 되었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초등학교가 아니 국민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면 항상 내 덩치만한 개들이 날 반겼다.
동네를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서로의 똥을 집어먹었을 놈들이 달라들어 핥고 물고 난리가 났지만, 그게 싫진 않았다.
다음으로 장수 할머니가
"호랭이가 잡아갈 것들"이라며 개들을 후두려 패고 나에게 갓 딴 오이나 가지를 주곤했다.
그럼 오수 할머니는 말없이 내 가방을 들어 옮기고 얼굴을 씻겨 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두 분이셨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가 두 분이셨다.

장수 시골 깡촌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넷째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인근 마을 오수에 어느정도 사는, 하지만 아들이 없어
제사 지내기가 걱정인 어느 집에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입양가는 날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일어나지 않았다는게 항상 잊히지 않는다 하셨다.

입양을 간 아버지는 몇가지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는 밥을 항상 반 숟가라씩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밥을 싹싹 다 긁어 먹으면 오수 어머니는 꼭 밥을 더 주려 했고 아버지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그렇다고 밥을 많이 남기면 다음 부터 반찬을 신경쓰는 오수 어머니를 보는 건 더 힘들어 아주 조금 밥을 남기게 되었다
했다.
그리고 어디서 무슨 말소리가 들리면 잠을 자다가도 당장 일어나 달려가는 버릇이 생겼다 했다.
오수 아버지가 자기를 불렀는데 반응이 늦어 오수 아버지가 새벽에 혼자 일을 하는 것을 몇번 본 뒤부터는 목소리만 들리면 항상
단박에 잠을 깼다고 한다.
덕분에 군대에서 개념병사라고 칭찬도 받았다니 소득이 없었던건 아닌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성인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두분다.
어찌된 영문인지 장수 어머니도 아버지가 모시게 되었고, 집에는 두 명의 할머니가 계시게 되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한 우리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덕분에 그 집 큰아들인 나는 하루는 오수 할머니와 하루는 장수 할머니와 잠을 자게 되었고, 학교에서 할머니가 두 명이라는 얘기를 했다가
놀림도 받고, 더블로 케어를 받으며 그럭저럭 잘 커왔다.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는 잠귀가 너무 밝으시고, 아들의 몰컴을 그렇게 잘도 잡아내셨다.
고작 50년 만에 산에서 나무하던 아버지는 스마트폰으로 고스톱을 치신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만 어느새 나도 밥을 항상 조금씩 남기고, 잠귀가 밝은 걸 보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듯하다.

빅스비가 자꾸 내 눈치를 보는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민감도를 가장 최저로 내려야겠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2-07 10:2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10/05 22:0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술술 읽히네요
MrOfficer
19/10/05 22:2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9/10/05 22:3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읍니다. 저도 오케이 구글이라도 해봐야겟어요
회전목마
19/10/05 23:1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글 때문에 PGR을 더 자주 찾게됩니다^^
쪼아저씨
19/10/05 23:30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곰돌이푸
19/10/06 00:0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안군-
19/10/06 00:32
수정 아이콘
아니 왜 눈물이 나지.. ㅠㅠ 나이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ㅠㅠ
유자농원
19/10/06 01:16
수정 아이콘
닥추
smilererer
19/10/06 22:42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요즘 PGR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이런 글을 못보고 놓칠뻔했네요.
20/02/16 21:42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징하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114 (삼국지) 정욱, 누가 나이를 핑계 삼는가 [67] 글곰15890 19/10/10 15890
3113 만원의 행복 [25] CoMbI COLa14324 19/10/10 14324
3112 누가 장애인인가 [51] Secundo30723 19/10/07 30723
3111 하이 빅스비 [10] 어느새아재22183 19/10/05 22183
3110 돈으로 배우자의 행복을 사는 법 [57] Hammuzzi30576 19/10/02 30576
3109 (삼국지) 유파, 괴팍한 성격과 뛰어난 능력 [24] 글곰17412 19/09/29 17412
3108 몽골 여행기 - 1부 : 여행 개요와 풍경, 별, 노을 (약간스압 + 데이터) [39] Soviet March14945 19/09/26 14945
3102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을 찾은 DNA감정 [40] 박진호26577 19/09/19 26577
3101 (삼국지) 황권, 두 번 항복하고도 오히려 인정받다 [29] 글곰18813 19/09/09 18813
3100 [10] 여러 나라의 추석 [16] 이치죠 호타루12806 19/09/05 12806
3099 우리는 왜 안전한 먹거리를 먹을 수 없는가 [33] 18301 19/09/05 18301
3098 예비군훈련 같았던 그녀. [31] Love&Hate23978 19/09/01 23978
3097 베플 되는 법 [67] 2218808 19/08/25 18808
3096 [역사] 패전 직후의 일본, 그리고 미국 [26] aurelius19432 19/08/13 19432
3095 [기타] 철권) 세외의 신진 고수 중원을 평정하다. [67] 암드맨16761 19/08/05 16761
3094 [기타] [리뷰]선형적 서사 구조를 거부한 추리게임 <Her story>, <Return of the Obra Dinn> [18] RagnaRocky11560 19/07/27 11560
3093 [일상] 그냥... 날이 더워서 끄적이는 남편 자랑 [125] 초코머핀22019 19/08/09 22019
3092 신입이 들어오질 않는다 [81] 루루티아29098 19/07/31 29098
3091 [LOL] 협곡을 떠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글러, MLXG 이야기 [29] 신불해18490 19/07/19 18490
3090 [연재] 그 외에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들, 에필로그 - 노력하기 위한 노력 (11) [26] 2210277 19/07/19 10277
3089 [9] 인간, '영원한 휴가'를 떠날 준비는 되었습니까? [19] Farce13833 19/07/17 13833
3088 햄을 뜯어먹다가 과거를 씹어버렸네. [26] 헥스밤17236 19/06/28 17236
3087 (일상 이야기) "지금이라도 공장 다녀라." [55] Farce23225 19/06/27 2322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