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권은 자가 공형(公衡)이며 익주 파서군 출신입니다. 젊어서부터 군의 관리가 되어 일하다가 당시 익주목이었던 유장이 그를 초빙하여 주부(主簿. 비서관)로 삼아 곁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장송이 유비를 익주로 끌어들이자고 주장하고 유장이 찬성하고 나섰을 때, 황권은 반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유비는 용맹하다는 명성이 있는 자입니다. 지금 이곳으로 불러들이려 하시는데, 만일 부하로 대우하신다면 그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빈객으로 접대하신다면 한 나라에 두 명의 주인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니, 손님이 태산처럼 편안할 때 오히려 주인은 계란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단지 국경을 봉쇄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장의 깜냥으로 제어하지 못할 사람을 끌어들이느니 차라리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장송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유장은 황권의 간언을 물리치죠. 그 결과는 물론 아시는 대로입니다. 장로를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유비는 오히려 그 칼끝을 돌려 유장을 겨누었습니다. 유장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발악했지만 당대의 효웅이자 조조의 유일무이한 적수로 일컬어지는 유비를 이길 수는 없었지요. 결국 익주는 유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황권은 광한현의 현장으로 있었습니다. 다른 군현들이 모두 유비를 향해 항복할 때도 그는 오히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버텼죠. 왕련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유비는 그런 얼마 안 되는 유장의 충신들을 오히려 좋게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황권이 항복해 오자 유비는 그를 임시로 편장군에 임명합니다. 현령이 장군의 반열에 들었으니 승진한 셈입니다.
이후 황권은 유비의 휘하에서 본격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파서군 출신이었는데, 파서는 파(巴), 파서(巴西), 파동(巴東) 등 이른바 삼파(三巴)에 속하는 곳입니다. 성도를 중심으로 한 익주의 중심부에서는 다소 떨어져 있었고, 한중에 있는 장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삼파의 산악지역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살고 있었지요. 말하자면 파 일대는 유비 세력이 온전하게 차지하지 못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215년, 조조가 장로를 공격하여 한중을 차지하자 이곳에 살던 이민족 수령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조조에게 귀순합니다. 조조는 그들을 열후에 봉하고 그 지역의 태수로 삼았죠. 두호라는 자가 파서태수, 박호라는 자가 파동태수, 원약이라는 자가 파군태수로 각기 임명됩니다. 유비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지요. 파 지역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유비의 본진을 공격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들을 격파하고 파 일대를 안정시킨 자가 바로 황권입니다. 비록 연의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어버렸지만 실상 무척이나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죠. 나아가 황권은 한중 공방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유비는 일전일퇴 끝에 결국 하후연을 참살하고 나아가 한중을 차지했는데 그 세부적인 전략을 입안한 자가 바로 황권입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죠.
[[촉서 황권전] 연달아 두호와 박호를 격파하고, 하후연을 죽이고, 한중을 차지했는데, 모두가 황권의 계략이었다. (然卒破杜濩朴胡 殺夏侯淵 據漢中 皆權本謀也)]
이후 스스로 황제를 칭한 유비는 손권에게 복수하고자 이릉으로 진격합니다. 221년의 일이지요. 이때 황권 또한 유비를 수행했는데 당시의 진용을 보면 유비의 군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지위가 높았습니다.
그는 유비에게 자신을 선봉으로 세우고 유비 자신은 후방에 있으라고 간언합니다. 하지만 유비는 그 간언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앞장서서 이도로 진격하면서, 황권을 진북장군(鎭北將軍. 북쪽을 지키는 장군)에 임명하여 별도의 군을 이끌고 장강 북쪽으로 가도록 하지요. 이때 황권이 맡은 임무는 위나라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동오와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한꺼번에 둘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라고 시킨 것이니만큼 황권이 얼마나 유비에게 신뢰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육손이 화공으로 유비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자, 장강 북쪽에 주둔해 있던 황권은 돌아갈 길이 없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위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황권이 이끌던 군사들과 무수한 장수들도 고스란히 조비의 차지가 되었지요. 이것이 황권의 두 번째 항복입니다. 차마 손권에게 항복할 수는 없으니 차악을 택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그의 속내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조비는 투항해 온 황권을 크게 환영하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그를 진남장군(鎭南將軍. 남쪽을 지키는 장군)으로 임명하고 육양후에 봉했으며 또다시 시중(侍中) 관직을 더했지요. 시중은 관질이 비2천 석인 고위직이며 또한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명예로운 직위입니다. 또한 조비 자신의 수레에 함께 타도록 하는 특전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의 목을 날려버리기를 서슴지 않았던 조비의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황권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황권의 침착하고도 대범한 성품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기서 상당히 인상 깊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유비는 얼마 후 황권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적에게 항복한 자는 가족을 처벌하는 것이 나라의 법도였지요. 하지만 유비는 황권의 가족을 처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그가 나를 저버린 것이 아니다.”]
한편 황권 역시도 유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가족이 처형당했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조비가 상을 치르라고 권했지요. 그런데 황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은 유비, 제갈량과 성심으로 서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저의 진심을 알고 있을 것이니 그 소문이 사실일 리 없습니다.”]
과연 그 주군에 그 신하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황권이 위나라에서 받은 극진한 대우는 단지 그가 촉한에서 항복해 왔다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조비가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만도 아니었지요. 조비가 죽고 조예가 그 뒤를 이었는데도 황권은 여전히 고위직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조예가 죽고 조방이 즉위했을 때는 무려 거기장군(車騎將軍) 에 의동삼사(儀同三司)라는 엄청난 지위에까지 오르지요. 거기장군은 무관들 중에서 대장군과 표기장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자리입니다. 그리고 의동삼사는 비록 지위는 삼공보다 낮지만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명예직에 가까웠지만, 그럴지라도 위나라에서 최고위급 벼슬을 했다는 뜻이니 그가 얼마나 인정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당시 최고 실세였던 사마의조차도 그를 매우 높게 여겨서 촉에는 당신 같은 뛰어난 인물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에게 쓴 편지에서 황권을 일컬어 호방한 선비(快士)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황권은 240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옛 주군이었던 유비보다 17년이나, 그리고 그가 평소 무척이나 칭찬했던 제갈량보다도 6년이나 더 오래 산 셈입니다. 유장에서 유비에게로, 또다시 유비에서 조비에게로 두 번씩이나 항복했으면서도 오히려 그때마다 인정받았고 지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런 사례는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드물지요. 그럼에도 절개가 없다는 비난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비는 황권의 항복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그를 감싸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능력과 인성을 겸비했다는 뜻이겠지요.
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입니까. 실로 마성의 남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그에게서 잇따른 배반으로 호의호식하는 비겁자의 모습을 볼 겁니다. 또다른 누군가는 그에게서 유능하기 그지없는 인재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세상에 단면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황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두 가지 평가를 예시로 들었지만 어쩌면 둘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둘 다일수도 있으며, 둘 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언제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황권은 제게 알려줍니다.
여담이 하나 있습니다. 유비가 황권의 가족을 처벌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일화를 말씀드렸지요. 그로 인해 촉한에 남아 있었던 황권의 아들 황숭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촉한이 멸망을 앞두고 있을 때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을 수행하여 촉한의 최후 방위선을 지키러 출정합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결국 순국하지요.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의 궤적을 그린 셈입니다. 하지만 그 상반된 삶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후세의 우리들이 함부로 내릴 수 있는 게 아니겠지요.
ps) 삼국지 관련 글을 브런치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2-06 16:0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