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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22 03:56:28
Name UMC
Subject [일반] 허무와 열혈 - 가이낙스 단상

저편의 아스트라를 재미 있게 보고 있습니다.
아직 다 보지 않았기에 열혈 코미디물이라는 여섯 글자 밖에 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열혈로 생각나는 건 단연 그렌라간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지금까지 해왔던 여러 가지 생각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그것들을 조금 적어볼까 합니다.

첫 작품은 아니지만 가이낙스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은 '톱을 노려라!'입니다.
탑건과 에이스를 노려라의 패러디, 온갖 패러디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열혈 변태 소녀물입니다.
여기서 변태인 건 소녀들이 아니고 변태 시점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조차 일종의 패러디겠지만, 이 작품은 열혈을 과거의 것으로서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희화화하는,
그러면서도 숭배하는 약간 모호한 입장에서 접근하여 어마무시한 숫자의 힘을 빌려 감동에 도달합니다.
목성으로 폭탄을 만들어 적을 소탕하려고 할 때 작품군을 관통하는 주제를 스칩니다.

이어지는 작품은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입니다.
의외로 호불호가 갈린다는 역대급 히로인이 가슴에 불을 지피는 나디아 또한
천공의 성 라퓨타와 해저 이만리의 충실한 패러디로 기획되었고 동시에 NHK에 대한 조롱이었습니다.
유색인종(흑인), 채식주의자,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중2병, 츤데레 등 존재 자체가 금자탑인 나디아는
안노가 스승 미야자키에게 배운 것을 가지고 넘어서려는 노력이 엿보이면서도
산업 문명과 과학주의에 대한 의문점을 던지는 수준에 머무르며 좋은 작품으로 마무리합니다.
거의 모든 요소가 이어지는 작품의 거름이 되었다는 부분을 빼면 말이죠.

대망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떤 작품이 서사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버렸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잠깐 제 짧은 견식으로 본 역사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19세기 중반, 서양의 검은 철선에 놀란 일본은 아시아는 악이요 구미는 선이라는 극단적인 가치관을 세우고
하나 되어 탈아입구 한길을 돌파하듯 달려갑니다. 그 결과 릴보이와 팻맨으로 퍼스트 임팩트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이번에는 미국의 충실한 모범생으로서 근면한 경제 발전의 길을 갑니다.
이를 바로 잡으려던 운동 세력들은 사상 최악의 사건들을 여럿 일으키며 완전히 아노미적 붕괴에 이릅니다.
진리의 빛은 사라지고 모범생을 요구하는 부유하고 견고한 체제만 남는데, 이 또한 거품과 함께 무너집니다.
피곤하고 안정적인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삶의 기쁨과 고통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타인에게서 지옥 이외의 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지옥 등의 정서는
"다 죽었으면 좋겠다(모두 죽으면 좋을텐데)"라는 대사로 집약됩니다.

근대 인간의 근본 모순은 유와 개의 모순입니다. 유 혹은 개를 말살하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에반게리온에서는 개를 유로 통합하는 한 가지 혁신적인 방식을 제시합니다.
이는 개,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의 극단적인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 외에는 어떤 가치도 제시하지 않았고
그래서 완전한 공허와 동일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점에서 작품은 거기서 끝을 봤습니다.
그럼에도 이 서사는 당시 몇몇 일본 애니들에서 나타나던 조류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었고
인간이 머리만 가지고 사고를 진행시켜 나갔을 때 이를 수 있는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에반게리온은 공각기동대에서 몇 발자국만 더 밀어부친 겁니다.

그리고 사실상 일본이라는 나라의 시대정신은 그 지점. 이카리 신지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헤겔은 말합니다. 어느 민족 정신이 시대정신으로서 세계사를 이끌 기회는 한 두 번 밖에 오지 않는다고.
그 이후에는 사명을 다 하고 쇠락의 길을 걷는다고 말이죠. (정확히는 기억 나지 않아요 하하)
2011년, 세컨트 임팩트를 맞이한 뒤의 일본은 기괴한 행보가 더 뚜렷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수상을 앞세워 아름다운 나라를 되찾고
두 번째 올림픽을 성공시켜 그 상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역사가 돕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다음 작품은 톱을 노려라 2! 입니다. 여러 의미에서 갈 데까지 가본 가이낙스는 창사 20주년 기념 기획으로 톱을 노려라 2를 골랐습니다.
여기서는 다시 20년 전의 열혈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는 처음의 열혈이 아니고 완전한 부정과 공허를 경험한 자기 회귀로서의 열혈입니다.
인간은 우주에게 존재 자체가 악이라는 작품의 배경 설정과는 반대로,
열혈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는 중요한 깨우침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은 천원돌파 그렌라간입니다. 마찬가지로 패러디적 발상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 작품은 다른 의미에서 작품이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끝에 도달한 작품입니다.
전작들과 비슷한 배경과 가치관 설정을 생략하면, 이 작품에서 얘기하려는 것은
생명은 살아 있다는 것이며 살아 있다는 것은 피가 뜨겁다는 것, 피가 뜨겁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혈을 정의하자면, 열혈이란 외타적인 초월성의 부정, 옳은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 가슴, 피가 시키는 것이라는
아주 단순무식한 가치관입니다. 조커 만나면 한 방에 털릴 것 같은 얄팍한 세계관이죠.
그래서 열혈 주인공은 모순을 분쇄할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만.
여기서 열혈이 갖는 포지션은 본질의 본질을 계속 추구하는 과정의 끝에는 공허만이 존재한다는 반성입니다.
그 힘들게 얻은 공허는 보물도 뭣도 아니고 그냥 공허에 불과하다는 것이구요.
에반게리온이든 뭐든 갈데까지 가봤는데 공허건 뭐건 결국 등따숩고 배부르면 행복하더라, 단순한 행복에서 시작해서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나가자, 그런 류의 현실이상주의적 입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열혈은 하나의 서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궁극적인 귀결점 중 하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가이낙스, 안노, 혹은 재패니메이션이 도달한 열혈이라는 포지션은, 그러나
공각기동대와 에반게리온 등이 보여주었던 포지션과는 달리 하나의 희망사항일 뿐이고
일본의 분열된 시대적 자아의 하나가 다른 중심적인 자아, 혹은 사회에 대해 설득시켜 내지 못하고 있는
자기만족적 메시지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현실 상황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역사는 쉬어가는 챕터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느낍니다.

반면 한국의 역사는 아직 역동적인 장이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정권을 보면서 넌지시 느낀 건 일반적인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한 국민이 가질만한 지극히 일반적인.
기적의 대통령을 기적의 시위로 몰아냈지만 당연하게도 기적의 정권이 들어서지는 않았구나, 라구요.
대통령으로 말하자면 박정희부터 문재인까지, 어떤 역사를 지나왔고 시대정신이 강하게 움직여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어떤 민족 정신이 자라오긴 했을 겁니다. 대단히 역동적이면서도 엉성하고, 똑똑하면서도 무식한.
어디로 갈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원래라면 이 글은 실제 역사와 애니사, 두터운 작품평을 포함한 글이어야 했겠지만, 언젠가 할 숙제로 남겨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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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2 04: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그래도 저는 아스카의 기분 나쁘다는 마지막 대사는 희망이었다고 봅니다. 딱 거기까지가 좋지 않았나 싶어요. 에반게리온은 파괴와 재생이 반복되는 세계라던데, 열혈로 다시 태어난 에바는 솔직히 못봐주겠더군요(그렇다고들 하던데 저는 그게 열혈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어떤 열혈스러운 속성이 생긴 것 같긴 한데 그런 코드랑 영 맞질 않아서리).

근데 또 어떤 분들은 현 정권도 기적의 정권이라고들 생각하겠죠.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죠. 이런 시대야말로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고 하는 이야기의 설득력이 강하게 통할 만한 세상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열혈과 같은 광신들이 몰아치는 세상이지만요. 허무주의도 열혈도 널리 통하는 세상, 그냥 뭐 그런 것 같습디다. 글은 재밌게 잘읽었네요. 추천요.
황금경 엘드리치
20/12/22 04:23
수정 아이콘
좀 피 끓는 애니가 보고 싶을 때도 많고
대작도 보고 싶을 때도 많은데
요즘은 좋은 작품 안 나오는 건 아닌데, 소품 같은 작품들이 많아요. 큼직큼직한 게 안 나와서 아쉽..
물론 왜 그러는지는 압니다.. 돈이 안 된다..
한뫼소
20/12/22 04:48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가이낙스를 재패니메이션과 등치시키기엔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지 한참 되었고, 가이낙스스러운 담론에 근거한 시대정신의 해석도 그 주체인 안노 자신이 빠져나간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아 해석하는 건 가이낙스가 가지는 대표성&가이낙스라는 집단의 맥락도 없어진 상황에서 취사선택과 비약이 지나친거 아닌가 싶습니다.
작퓸의 흥행 혹은 화제성이 곧 대중기호(굳이 확대하면 시대정신 혹은 일부 사회계층의 인식)이고 그것에 근거해 사회를 해석할 수 있다면 스즈미야 하루히와 마도카 마기카로 대표되는 2000년대 후반부터의 세카이계의 재생산으로 보는 지독한 답보 상태나 에바Q, 신고지라에서 보이는 재난 이후에 대한 세상에 대한 시각… 최근이면 귀멸의 칼날이 보여주는 구시대적 가족주의가 아직도 대중에 울림을 주는 사회라든가 뭐 여러가지 갈래가 있다고 보는데 지나치게 편의주의적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2/22 05:20
수정 아이콘
안노의 요즘 행적을 보면 나디아 에바를 만들던 그 끓어 넘치던 재능을 다 소모해버린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안노가 스승으로 여기던 미야자키랑 토미노가 안노보다 더 나이 많은 시절에도 정정하게 현역으로 활동했던걸 보면 개인적으론 좀 아쉽더라고요. 얼마 안있음 개봉할 에바 신 극장판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거라 성급한 판단이긴 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한뫼소님 의견처럼 안노의 작품들이 재패니메이션을 대표하여 일본의 정치사와 일본인의 인식을 드러내 보일만큼 대단한 명작인가 라고 물어보면 좀 아리송해 집니다. 물론 저도 안노의 작품들을 좋아하고 명작 반열에 오를 만큼 잘만든 애니인건 인정합니다.
20/12/22 06:42
수정 아이콘
한뫼소 님 덧글과 한꺼번에 답변을 달자면, 애당초 역사 및 작품평에 기반해서 치밀하게 쓰려고 하지 않은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니메이션을 폭넓게 보는 편이 아니어서 특히나 2000년대 이후의 개괄적인 평론도 아니고, 가이낙스나 안노에 대한 통사적 관점도 없는
지극히 보고 싶은 측면으로만 바라본 글이었습니다. 편의주의적인 논의가 덧글을 통해 지적되면 논의의 확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입장은 시대상을 반영한 서사라는 측면에서 재패니메이션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과 고스트 인더 쉘에서 일종의 끝을 보았고
거기서 제시된 '소멸 욕구를 가진 자아'는 여전히 시대정신적으로 극복되지 못했고 트럭에 치이는 수많은 주인공들로 반복 생산 되고 있고
후계자들(?)이 제시한 열혈이라는 정신은 정답이긴 하나 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진 못했다... 한국의 서사가 궁금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라나
20/12/22 07:02
수정 아이콘
가이낙스라.. 프메2,3는 아직도 가지고 있네요 크크
중년의 럴커
20/12/22 08:11
수정 아이콘
왕립우주군.... 아무도 기억해주지는 않지만 제 마음속에는 최고의 작품.
20/12/22 11:22
수정 아이콘
사실 가이낙스는

건버스터 - 나디아 - 그랜라간

특히 그랜라간이 '진짜'고 정사지

에바는 사실 일종의 예외인데.. 이 예외가 차원이 다른 급으로 가버려서..
20/12/22 13:32
수정 아이콘
재미 있는 관점 간결하게 정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역사나 철학의 디테일한 부분은 저는 잘 모르지만, 잘 모르는 입장에서나마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20/12/22 13:56
수정 아이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보고는 '아 재밌다.'
공각기동대를 보고는 '아 지루하다.'
에반게리온을 보고는 '아.... 애매하다..' 요정도만 느낀 저에게 제페니메이션은 너무 심오한 세계네요.
차단하려고 가입함
20/12/22 14:3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신극장판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지만, 제가 신극장판 파를 볼 때의 충격은 진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수준의 충격이었어요. 영화나 애니를 많이 본건 아니지만 그렇게 입이 떡 벌어지는 충격은 처음이었네요. EOE를 볼때도 그정돈 아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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