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여러분의 스트레스는 안녕하신가요?
- 『브레인 룰스』와 『제5도살장』을 읽고.
<1> 호랑이 스트레스가, 상사(上司) 스트레스로.
우리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이는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스트레스는 소중한 감각이기도 합니다. 무통증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받고 있는 신체적 훼손을 감각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그 상황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처지가 되겠지요. 그래서 『브레인 룰스』의 저자인 존 메디나는 “어떤 유형의 스트레스는 학습을 촉진한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는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가며, 때로는 기운이 빠집니다. 이것이 ‘아드레날린(adrenaline)’이라는 호르몬의 작용입니다. 이 작동을 통해 우리는 ‘맞서 싸우거나 혹은 도망가기’라는 반응을 신속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코티솔(cortisol)’이라는 호르몬은 우리의 스트레스 요인에서 불쾌한 측면을 상쇄시키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인류 초기의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선조들이 경험했던 생존 문제의 상황들은 매우 극적인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쫓아 올 때 이에 대응할 수 있었던 시간은 짧았겠죠. 맞짱을 뜨거나 도망을 가거나 해야 했는데, 이때도 ‘허허, 동물 친구가 나를 반기는 구나’하며 느긋했던 개체들은 호랑이 밥이 되어, 우리의 선조가 되지 못했겠죠. 즉, 우리의 오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 같은 상황에서 스트레스 반응을 갖고 대처에 성공한 분들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신체적 밸런스가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극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건 생존 그 자체니까요. 다만 문제는 우리 선조들에게 이로웠던 스트레스 반응은 겨우 몇 초 지속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생겨났던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조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었던 복된 스트레스 반응은 현재의 우리에게 ‘만병의 원인’이라고 불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스트레스는 호랑이와 마주하는 몇 초간이 아니라, 매일 보는 강아지의 어버이 같은 상사의 얼굴이나,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돈 문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는 장기 지속되는 환경이고, 우리의 스트레스 반응은 이와 같이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체의 시스템이 아닙니다. 아드레날린과 코티솔은 훌륭한 호르몬이지만, 이것이 너무 많이, 그리고 장기적으로 분출되면 치명적인 문제를 낳습니다. 즉, ‘만병의 원인’이 되지요. 만성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일으킬 위험이 특히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스트레스 관리 기술입니다.
<2>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해라”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의 생물학적 기초를 변동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놓여 진 선택지는 관리의 기술을 익히는 것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나에게는 어떤 기술이 있지?
커트 보니것의 걸작 소설인 『제5도살장』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다른 날에는 당신이 보거나 읽었던 어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안 보고 말지요.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는 기분좋은 순간들을 보면서 영원한 시간을 보냅니다.(…)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해라.”(강조는 인용자)
소설의 이 부분은 빌리 필그림이라는 사람이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한 수 배우는 장면입니다. 이 외계인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사는 그런 존재지요. 『제5도살장』은 운명론과 반(反) 혹은 비(非)운명론이 묘하게 길항하는 그런 작품입니다. 문학적 상상력은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했지만, 저는 나름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많은 경우는 불확실성에서 옵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서 옵니다. 그것이 곧 ‘운명론’의 먹이지요.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또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를 따져보면, 실상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무언가를 수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나의 기상시간은 내가 선택한다기보단, 나를 고용한 회사의 출근시간에 맞춰져 있을 따름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만나고 있는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보단 만나야 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스트레스를 줍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 만나야 하는 사람. 살고 싶지만 살수 없는 동네, 살기 싫지만 살아야 하는 집. 만사가 이런 것 같다는 심정마저 듭니다.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많은 환경들은 내가 통제하고 조작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사는 동네를 바꿀 수 없고, 나의 상사를 교체할 수 없으며, 나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에 도전하는 여정은, 또 다른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끔찍한 시간에 들어가는 길이 되죠. 그래서 어차피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 바꿀 수 없는 불행에 몰두하기 보단, 좋은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사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투성이고, 대부분의 시간이 나의 관리 범위 밖에 있어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들을 소중히 여기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영역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좋겠지요.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따라서 한정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내가 주체적으로 세워질 수 있는 시간에 더 투자하고 싶습니다. 한탄하고, 미워하고, 자조(自嘲)하는 것 보단 말이죠.
<3> 배설하나요?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해라.”는 말을 들어도, 그리고 ‘내가 고민해도 어차피 통제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일들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차라리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선택지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어도, 또 그렇게 되지 않고 스트레스를 마음에 쌓아가는 게 우리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복싱을 배우며 샌드백을 때리고, 또 누구는 달콤하고 매콤한 사체를 씹어 삼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임계점을 넘으면 시(時)를 쓰게 됩니다.
많은 시인들이 나름의 시론을 펼쳤습니다. 누구는 자신의 시를 ‘죄의 일기’라고 했고, 또 누구는 ‘무의미의 의미’라고 했고, 또 누구는 ‘마음의 거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의 시가 ‘배설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창작한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쓰여진 시를 바라보면, 근사한 빛은커녕 쏟아낸 감정의 냄새만 납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그래서 제 시 같습니다.
시를 쓴지도 벌써 십 팔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종종 묻곤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쓸 수 있었냐고요. 하지만 저는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서로에게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똥, 오줌을 싸오셨어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렇듯 저에게 시 창작은 배설이기에, 그냥 그렇게 쏟아왔을 뿐입니다. 이제 저는 금전적 동기가 없을 때는 거의 글을 쓰지 않는 그런 인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배설물은 돈이 되지 않음에도, 계속 쓰게 됩니다. 그것이 저의 생리이고,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트레스가 내 마음에 쌓이는 탓입니다. 싸고 나면, 시원하듯이, 쓰고 나면 후련합니다. 또 내장엔 똥, 오줌이 쌓이겠지만요. 그건 그렇고, 그런데,
당신의 배설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