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브라질 시리즈를 쓰던 와중에 단편으로 써 본 남미 4개국이 관련된 비극적 전쟁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64년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국제전쟁이 남미대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파라과이 사이에 벌어진 파라과이 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당초 장기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 전쟁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면서 주요 전장이 된 파라과이를 문자 그대로 멸망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나폴레옹을 광적으로 흠모하였던 한 지도자의 무모함은 자신은 물론 조국을 파괴시켰고 대살육의 주체가 된 다른 국가는 전쟁으로 태어난 괴물과 20세기 내내 싸워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남미에 미친 영향: 남미 국가들의 독립열풍 그리고 파라과이의 계몽독재자들
1810년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가 강제로 퇴위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자리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조세프가 차지하였는데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은 완고한 카톨릭 국가의 끔찍한 이단재판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문명사적 의미 이외에도 지구 반대편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장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각 지역의 투쟁이 본격화 된 것인데 아르헨티나(당시 La Plata) 역시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이번 기회에 이웃 지역도 병합하여 남미의 대국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 파라나 강과 인근 국가들
아르헨티나가 노린 대상은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였습니다. 이 두곳은 미시시피 강의 남미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파라나 강에 인접해 있었는데 아르헨티나의 의도가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던 우루과이에는 아직 스페인 충성파들이 제법 존재하였으나 아르헨티나가 이들을 제압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브라질이었는데 염려대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진입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를 넘겨줘야 했습니다. 물론 브라질 영토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 지역은 나중에 브라질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한편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가 보기에 정말 만만해 보였습니다. 브라질과 같은 거대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민 태반이 토착 원주민인 과라니족이라는 사실도 아르헨티나 원정대를 더욱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파라과이 지배층과 과라니족들은 의외로 똘똘뭉쳐 게릴라전을 벌이며 아르헨티나 군을 괴롭혔고 결국 몇차례의 전투에서 파라과이 저항군이 승리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원정군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파라과이는 몇가지 중요한 점에서 다른 남미국가와 구별되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등 서구의 식민지 정책으로 다른 지역에서 토착 원주민 대부분이 대멸족에 준하는 운명을 맞았으나 파라과이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회(Jesuit)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자행되는 원주민 학대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며 특히 파라과이 지역의 과라니 족을 적극적으로 보호한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과라니족은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의 조우를 피해 내륙 깊숙이 들어갔고, 스페인에서도 파라과이를 브라질과의 완충지대로 생각하고 방치하다보니 자연스레 파라과이는 자치권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를 물리친 파라과이는 1811년 다른 여러 스페인 식민지 국가들처럼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남미 각 국가의 독립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국가별 국경선 획정이 불명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파라과이는 독립 이후 상당기간 이런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독립한 파라과이의 첫 지도자는 로드리게스 드 프란시아(Dr. Jose Gasper Rodrigues de Francia) 박사였는데, 동시대의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도자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프란시아는 법학박사로 지식인이었으며 프랑스 계몽주의(특히 루쏘의 영향이 컸습니다.)와 대혁명(로베스 피에르와 나폴레옹)에 큰 감화를 받아 스스로 계몽주의 독재자가 되어 파라과이를 과라니족 중심의 원주민 유토피아로 구축하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아 박사는 스페인 식민시절 인종적 계급구성에 대한 혐오감이 매우 높아 시골의 원주민이 그를 만나러 오면 정중하게 맞아들여 의견을 경청하였으나 지주가 찾아오면 오래 기다리게 하는 등 의도적인 냉대를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식민지 태생 백인들인 크리올의 권력독점을 막기 위해 백인들끼리의 결혼을 아예 금지시키고 과라니족과의 혼혈을 강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과라니족들은 프란시아 박사를 위대한 주인님(Great Lord)라고 불렀으며, 일부는 아예 그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며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을 흠모한 초기 파라과이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보면 나폴레옹이 남긴 또 다른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라틴 아메리카에 관련해서 아이티 혁명이 가장 뼈에 사무친 일이었겠지만 말입니다.
* 프린시아 박사
프린시아 박사가 1840년 죽자 과도기를 거쳐 그의 조카인 칼로스 안토니오 로페즈(Carlos Antonio Lopez 나중에 아들 로페즈에게 권좌를 물려주게 되어 부자를 구별하기 위해 아버지 로페즈로 부르겠습니다.)가 권력을 잡게 됩니다. 아버지 로페즈는 프린시아 박사의 유토피아 구축 정책을 계속 추진해 나갔습니다. 프린시아 박사가 부자들을 위한 시설이라고 판단한 고등교육기관을 폐지하는 대신 7살부터의 초급교육을 의무화한 것을 이어 받아 그의 재임시절에는 대상 아동의 절반이 의무교육을 이수할 정도였습니다.
읽고 쓰기에 이어 음악교육도 중시해서 5천개의 플룻을 수입할 정도였습니다. 교사들도 모두 국가에서 제공하는 동일한 유니폼을 입도록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린시아 박사와 아버지 로페즈의 노력으로 파라과이는 원주민 중심의 작은 나라였음에도 문맹률이 인근 국가에 비해 낮고 사회적 통합수준도 높은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로페즈는 이제 산업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유럽국가들로부터 증기선과 증기기관, 제철공장, 조선소, 군수공장 설비를 수입하였고, 기술자들(비록 삼류기술자들이긴 했지만)을 들여와 철도와 전신망을 구축하였습니다. 비용은 마테차와 같은 농산물을 팔거나 영국 무역상의 자금지원으로 충당하였습니다.(영국 상인들의 역할은 후에 파라과이 전쟁을 영국이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음로론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파라과이의 계몽독재자는 대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파라나 강에 인접한 세 이웃나라(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정세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처음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내륙국가인 파라과이는 브라질에서 파라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통해 대서양으로 나가는 파라나 강이 유일한 해상 교역로 였습니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파라과이를 미수복된 반란자들의 자치영토로 바라보고 있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분쟁 속에 갓 독립한 우루과이는 브라질의 지속적인 영향력 확대 위협 속에 내부적으로 친유럽계인 콜로라도당과 반유럽 지주중심의 블랑코당으로 나뉘어 갈등 중에 있다보니 수로의 안정성에 대한 파라과이의 불안은 작지 않았습니다.
아들 로페즈의 승계와 세나라를 동시에 적으로 둔 파라과이 전쟁의 발발
1862년 계몽독재자인 아버지 로페즈가 사망하면서 아들 로페즈(Francisco Solano Lopez)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아들 로페즈는 프란시아 박사와 아버지 로페즈 이상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때부터 군사령관과 전쟁장관을 맡으면서 유럽을 방문하며 나폴레옹과 나폴레옹 3세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들 로페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자신이 서 있는 동안에는 모두 앉아 있게 할 정도로 과대망상적 인물이었습니다.
*아들 로페즈
한편 인접국과의 분쟁 가능성이 커지자 파라과이는 유럽에서 각종 무기를 수입하고 파라나 강이 U자로 꺾이는 요충지인 후(우?)마이타(Humaita)에 매우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였습니다.
후마이타 요새를 기반으로 이제 강건너 아르헨티나 수역까지 통제가 가능해지자 수로 폐쇄의 위협을 느낀 인근 국가들도 분쟁에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상류에 위치한 브라질은 철갑선을 사들여 해군을 꾸렸습니다.
이런 시점에 우루과이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1864년 파라과이의 로페즈와 동맹을 맺고 있던 우루과이의 블랑코 당과 경쟁자인 콜로라도 당 사이에 무력투쟁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침입하여 콜로라도 당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도록 지원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름 군비를 확충하여 자신감이 넘쳐났던 아들 로페즈는 차제에 수역의 우선권을 확보하고 파라과이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전쟁을 결심합니다.
로페즈는 브라질의 우루과이 개입이 역내 균형을 깨는 행위라는 명분으로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브라질 내륙 Mato Grosso를 공격합니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토와 인구 등의 국력에서 서로 비교가 안 될 정도인 브라질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브라질의 전쟁 준비를 보면 한편 이해가 가는 면도 있습니다. 브라질의 페드로 2세는 포르투갈의 왕자로 브라질에 왔다가 할아버지에 반기를 들고 브라질 왕국을 창건한 아버지 페드로 1세가 1831년 당시 5살이던 자신만을 놔두고 유럽으로 돌아가자 졸지에 황제에 올랐습니다.
페드로 2세는 어린 나이로 인해 섭정이 대신 통치하였으나 1840년 14살에 직접통치하면서 제2 제정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여간 페드로 2세는 철갑선을 구입하며 해군력은 어느 정도 확보했지만 육군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육군은 편제상 있긴 하였으나 훈련상태가 매우 부실하여 제대로 된 군대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전쟁 초기 파라과이의 공격에 브라질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페드로 2세는 비책이 하나 있었는데 영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유지하고 있던 노예제를 활용한 것입니다. 페드로 2세는 흑인노예들에게 자유를 댓가로 군입대를 독려하였습니다.
한편 파라과이는 브라질 내륙 공격에 이어 우루과이에 병력을 파견합니다. 문제는 우루과이에 가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 영토를 지나야 했는데 아르헨티나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로페즈는 원정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파라과이를 안좋게 보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그리고 콜로라도 당이 정권을 잡은 우루과이와 비밀 협약(이른바 삼국동맹)을 맺고 파라과이에 공동으로 맞서기로 합니다. 동맹군의 주도는 브라질이 맡기로 하였습니다.
협약에서는 파라과이를 양분하여 나눠갖고 전쟁 배상금을 물리며 로페즈가 축출될 때까지 전쟁을 이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브라질은 18,000명, 아르헨티나는 8,000명, 우루과이는 1,000명의 병력만 준비가 되었지만 파라과이는 64,000명의 병력과 함께 21,000명의 예비군을 갖추고 있어서 삼국연합군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총력전의 양상을 띠자 판세는 역전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은 흑인노예를 포함하여 135,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꾸리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파라과이는 자기보다 25배나 인구가 많은 삼국동맹과 무모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전쟁의 전개와 종말: 광기와 대학살의 비극
전쟁 초기 파라과이는 선제타격으로 삼국동맹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으나 파라과이가 아무리 전비를 갖추었다고 해도 빈곤한 내륙국가의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흑인노예들로 병력을 확충한 브라질 군은 총사령관인 Caxias 공작(Duke of Caxias)의 지휘아래 콜레라와 싸우며 악전고투를 벌였지만, 1865년말부터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영토에서 아르헨티나군 및 우루과이군과 함께 파라과이군을 내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파라과이의 저항도 거셌습니다. 1866년 파라과이 영토에서 벌어진 Curupayty 전투는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3년에 걸친 파라나 강의 후마이타 요새 공략에 삼국동맹군이 성공하자 삼국동맹군은 결정적 반기를 잡게 됩니다.
사실 파라과이의 전략 요충지인 후마이타 요새는 안에 주물공장과 제철소를 두고 대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었으며 수천명의 군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보니 크림반도 남쪽의 요새 세바스토폴에 비유될 정도로 강고했습니다.
브라질 군은 파라나 강에 철갑선을 띠워 요새를 공략했고 파라과이 군인들이 군함에 오르면 선내로 수병들을 피신시킨 다음 철문을 모두 잠그고 다른 군함에서 총격을 가하도록 하여 손쉽게 퇴치하였습니다.
결국 1868년 요새가 함락 직전이 되자 사령관인 앨런 장관은 로페즈에게 퇴각을 허락받으려 하였으나 로페즈는 사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앨런은 권총을 머리에 싸서 자살하였으며 요새는 끝내 함락되었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로페즈의 후임으로 요새를 지휘한 장군의 후퇴를 막고자 로페즈는 장군의 아내를 쇠사슬로 묶고 고문을 하다가 요새가 함락되자 장군의 아내를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 브라질 전쟁 사령관 카시아스 공작
* Curupayty 전투를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Candido Lopez 작품, 칸디도 로페즈는 아르헨티나 참전 군인으로 전쟁 중 오른팔을 잃었으나 왼팔로 자기가 본 전장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 Curupayty 전투에서 패전한 삼국동맹군 시체의 옷을 약탈하는 파라과이 병사 그림
* 파라나 강에서 벌어진 수상전의 모습
* 파라과이 전쟁의 주요 전투: 1864년 12월 브라질 내륙 전투, 1865년 아르헨티나 코린테스 전투, 1866년 6월 Tuyuti 전투 등
따지고보면 파라과이군의 패배는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수년간 전쟁준비를 해왔다고는 하지만 가난한 내륙국으로 거기에 유럽정보에도 어두운 국가가 수입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이 결코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머스킷 소총과 17세기 스타일의 대포(cannon)와 목조선이 파라과이 군대가 가진 무기의 전부였습니다.
반면에 연합군은 사거리가 훨씬 긴 라이플 소총, 개틀링 기관총, 강선이 달린 대포(artillery) 그리고 철로 만든 군함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충원 가능한 예비병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의무교육을 이수한 파라과이군인들의 충성도와 용맹성은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 머스킷 소총과 칼로 무장한 맨발의 파라과이 병사 모습
*브라질 기병과 보병: 라이플을 소지하고 있고 신발을 신고 있는 브라질 군인들
* 아르헨티나 보병: 여기도 신발은 신고 있습니다.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로페즈는 브라질에 비밀리에 평화조약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브라질의 페드로 2세는 자신의 명예를 수호한다며 로페즈가 완전히 실각할 때까지 공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로페즈가 앞으로 닥쳐올 파국을 생각하였다면 이때라도 무릎을 꿇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페즈의 무모한 도박은 그의 과대망상을 더욱 부채질하여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자기의 지지자였던 수천명을 가두고 고문하였으며 여기에는 70살의 노모(로페즈가 혼외정사로 낳은 아이라고 실토한 것의 보복으로)와 여동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급기야 외국의 외교관과 주요 지휘관 그리고 자신의 남동생을 포함한 700-800여명을 처형시켰습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창검으로 이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답니다.
삼국동맹군을 실은 배들이 수도인 아순시온에 이르자 로페즈는 수도를 더 내륙으로 옮기면서 결사 항전을 다짐하기에 이릅니다.
로페즈는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 모든 남자들을 징집하는데 이로 인해 농업부분에서 노동력 부족해지자 기아사태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야생 오렌지를 따먹으며 버텨봤지만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이 창궐하며 파라과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로페즈의 망상은 도를 더해 갔습니다. 멀쩡한 성인 남자가 부족해지자 부상병과 소년들까지 징집하여 군대를 꾸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줄 무기가 없다보니 총처럼 보이는 나무막대를 지급하고 가짜 턱수염을 붙이고 전장에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입고있던 빨간색 군복이 열대우림 기후속에 누더기로 변하면서 대부분의 소년병들은 벌거벗은 채 나무막대만 가지고 삼국연합군의 십자포화를 맞아야 했습니다.
더 기가막힌 일은 현재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이 2천명의 소년병들이 몰살한 전투를 기념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1870년까지 로페즈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브라질 군은 로페즈를 Cerro Cora라는 곳에 몰아넣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서도 굴복을 거부한 로페즈는 "승리 아니면 죽음(victory or death)"를 외치며 "나는 조국과 함께 죽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1870년 로페즈의 죽음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비슷한 시기(1861-1865)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에 가려져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파라과이 전쟁은 실로 엄청난 참극으로 끝났습니다.
브라질군은 5만명이 죽었으며 2/3는 콜레라, 천연두 등으로 인한 질병사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3만명, 우루과이는 5천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 물론 남북전쟁으로 미국인 60만명이 죽은 것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당시 신생국이었던 이들 나라의 규모를 생각하면 작지않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전쟁의 희생자 수의 차이는 파라과이의 희생자로 대부분 메꾸어집니다. 후마이타 요새 함락 이후 파라과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거의 일방적 살육에 가까웠습니다.
브라질 군은 아순시온 동쪽에 이르자 만나는 모든 이들의 목을 베었으며 파라과이 측 부상병으로 넘쳐나는 병원문을 밖에서 잠구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후 시행된 파라과이의 인구통계를 보면 16만명의 인구가 조사되었는데 이중 15세 이상 남자는 2만9천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전쟁 이전 파라과이 인구를 45만에서 60만명으로 추산한 것과 비교하면 6년간의 전쟁으로 무려 인구의 65-70%가 감소하였습니다.
근대적인 전쟁이 벌어진 이후 한 국가의 구성원 대다수를 죽게 만든 전쟁은 파라과이 전쟁이 거의 유일할 정도입니다.
참극은 인구통계학의 비극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878년까지 브라질이 파라과이를 점령하면서 기존 국토의 절반에 가까운 영토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넘겨줘야 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회색부분이 양국에 뺏긴 영토입니다.
당초에는 전쟁 삼국동맹 시점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맺은 협정대로 두 나라가 파라과이를 이등분 하여 나눠가질 생각이었으나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의 완충지대를 두길 원했고 그리하여 파라과이가 국가로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브라질은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에 있던 모든 기록문서를 자국으로 가져가서 봉인해 버렸습니다. 이로인해 파라과이 초기역사와 이 비극적 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이는 한 나라의 기록을 지워버린 반문명적 조치였습니다.
* 파라과이 전쟁 전후의 변화된 파라과이 영토
참고로 빨간 점선이 파라과이 전쟁 이전의 국경선인데 볼리비아 쪽의 늘어난 영역은 1932-35년 또 다른 남미 내륙 빈곤국인 볼리비아의 무모한 전쟁 도발에서 승리(?)하여 획득한 챠코지역입니다.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태평양전쟁으로 태평양 진출로를 뺏기자 대서양 진출로의 확보에 애썼으며 특히 챠코 지역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헛된 망상으로 1차대전의 퇴역 독일 장군을 스카웃해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파라과이군의 예상지 못한 반격과 기후때문에 퇴각하게 됩니다.
고지대의 선선한 기후대였던 볼리비아군은 양털로 만든 군복을 입었는데 건조한 챠코지역에서는 탈수증세를 부채질하였고, 파라과이 군인들이 무선으로 스페인어가 아닌 과라니어로 말하는 바람에 작전정보를 전혀 해석할 수 없었던 것도 실패의 한요인이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백인장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원주민 출신 병사들이 별로 없었던 점도 볼리비아측 패착의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볼리비아군 퇴각시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 영토까지 추격하였는데 이번에는 파라과이 군이 고산병과 보급곤란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결국 미국 등의 중재로 챠코지역을 파라과이가 차지하고 볼리비아는 대서양으로 가는 수로를 확보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차코지역에서는 어떠한 석유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지역은 유럽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이주한 재세례파의 한 일파인 메노파 교도들만 남아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답니다.
전쟁이 파라과이 사회에 남긴 비극적 유산
성인남자가 거의 사라진 파라과이는 극도의 여초사회가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비극적 문화를 낳았습니다.
우선 브라질 군인들에 겁탈당한 파라과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흑인이면 태어나자마자 죽이는 끔찍한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극도의 여초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성폭력과 성도덕의 타락에 매우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로 이어졌습니다. 남자들이 저지르는 온갖 성폭행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광장이나 거리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성행위에 대해 강간인지 매춘인지구분하려 하지 않았고 일종의 남자의 특권이라는 인식이 사회에 퍼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2008년 카톨릭 사제 출신으로 서민의 챔피온이라는 별칭으로 인기를 얻어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페르난도 루고(Fernando Lugo)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4명의 여인들이 루고가 자기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고 대통령은 이중 2명의 주장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즉, 사제신분으로서 적어도 2명의 여인들과 관계를 맺고 아이들을 낳고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고 대통령은 이 추문과 전혀 관계없는 사유로 2012년 의회의 탄핵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당시 그의 탄핵사유는 국가안보 불안 및 부정부패였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 루쏘의 유토피아에서 나찌의 유토피아로
파라과이 전쟁은 파라과이를 남미 정글 속 나찌의 비밀기지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전후 인구증가가 파라과이 정부의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로 떠올랐는데 차제에 유전적으로 우월한 인종을 받아들여 국가를 융성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프린시아 박사가 들으면 경기를 일으켰겠지만 파라과이 정부의 홍보는 유럽의 인종주의 세력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New Australia"나 "Nueva Germania" 등의 백인 식민지 건설운동이 파라과이 이민을 독려하였습니다.
특히 Nueva Germania는 니체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가 그의 남편과 조직한 아리아족 정착촌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끄는 독일인 14 가족 선발대가 아리아족 유전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1887년 파라과이의 정글에 정착을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착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의사도 없이 문명과 유리된 남미 정글은 생존 자체를 담보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지도자인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약물을 이용하여 자살하였고 엘리자베스 니체는 다시 독일로 돌아옵니다.
그후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명성에 의존해 살아가다가 니체가 죽자 니체를 반유대주의의 화신으로 재창조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 파라과이의 아리아족 공동체 마을 안내표지
* 파라과이 아리아 공동체에서 생산한 허브 티 광고지(?): Superior grade non-blended라는 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편 파라과이의 아리아 공동체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질병과 자살로 얼룩졌지만 일부 가족은 정착에 성공하여 지금도 독일인 후손들이 다수인 지역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다만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으려는 당초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후손들은 파라과이인들과의 혼혈이 많습니다.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니체의 영향은 제법 컸는데 1차대전을 전후로 많은 독일인들이 파라과이로 계속 이주해 왔고 이중에는 파라과이를 35년간(1954~1989)이나 집권한 군사독재자인 알프레도 스트로스너(Alfredo Stroessner)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스트로스너는 장교로 복무하며 볼리비아와의 차코 전쟁에 참전해 이름을 날리는데 그는 아들 로페즈를 파라과이 애국자의 화신으로 숭배하였으며, 결국 권좌에 있는 동안 로페즈를 다시 파라과이의 국민적 우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파라과이 국민들은 아들 로페즈에 대해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매우 동정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파라과이 전쟁의 끔직한 사실들을 전시하는 역사박물관은 수도 아순시온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답니다.
아리아족의 유토피아에 현혹된 사람들은 2차대전이 끝날무렵부터 파라과이를 지속적으로 찾았습니다. 바로 나찌 잔당들인데 이중에는 SS간부이자 의사로 아우슈비츠를 담당했던 조세프 멩겔레도 포함되었습니다. 멩겔레는 1974년 UN에 의해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브라질로 도피하였다가 1979년 수영 중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 멩겔레의 파라과이 도피에 영감을 받아 1978년 제작된 SF(당시에는 SF였겠지만 지금에는 그렇게 불리기 힘들기는 합니다.)영화,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의 포스터(영화 제목과는 달리 영화의 주요 배경은 파라과이입니다.)
영화에 대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더하면 그레고리 펙(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매력은 더 이상 없지만)과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을 맡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파라과이를 나찌 도망자들의 낙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파라과이 독재자 스트로스너 정권의 비호아래 아우슈비츠의 의사였던 멩겔레 박사는 1978년 시점에서는 매우 놀라운 생명공학 실험을 수행합니다. 참고로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은 검은 머리와 파란색 눈을 갖고 청소년기 아버지가 모두(?) 죽게 됩니다. 37년전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볼만합니다.
전쟁이 브라질에 남긴 영향
파라과이 전쟁은 나름 근대(?) 국가간의 전쟁으로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방적 학살로 바뀌어 갔습니다.
브라질은 돔 페드로 2세의 자존감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이런 학살을 스스로 제어할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리우에서는 18대의 피아노와 650명의 연주자가 참여한 극도로 사치스런 연회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파라과이 전쟁은 브라질에도 뿌리깊은 저주를 남깁니다.
바로 브라질에서 국가안의 국가(deep state)로 자리를 잡게 되는 군부가 이 전쟁을 계기로 수면위로 부상한 것입니다.
비록 우루과이 독립 이슈로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이기는 했으나 파라과이 전쟁 이전까지 브라질 군부는 큰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파라과이 전쟁으로 장교가 1,500명에서 10,000으로 증가하게 되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여러 전쟁 영웅이 나타나자 군부는 브라질 정치사의 막후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장 페드로 2세의 축출도 참전군인들의 반발때문이었습니다.
브라질의 정치군인들은 결정적 국면마다 막후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1964년에는 아예 직접 정권을 잡아 1985년까지 21년의 군부독재시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경제개발을 최대 과제로 대중에게 선전하였습니다.
물론 대중적 여론이 차단된 군부독재정권은 자기들 이해에 따라 국가간 역사적 앙금을 단칼에 털어내는 과단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브라질 군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목적으로 대형 수력발전소 건설에 적극적이었는데, 파라나 강의 이타이푸(Itaipu) 댐 건설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문제는 강 반대쪽에 위치한 파라과이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점이었습니다.
결코 브라질에 우호적이지 않은 파라과이였지만 브라질 장군들은 파라과이의 독재자인 스트로스너과 담판을 벌여 이 초대형 프로젝트 건설에 합의합니다.
1975년 건설을 시작하여 1984년부터 발전을 개시한 이타이푸 댐은 중국의 삼협댐에 맞먹는 수준입니다. 2013년과 2014년 발전량은 각각 이타이푸 댐 98.6 TWh, 87.8 TWh, 삼협댐 83.7 TWh, 98.8 TWh 이라고 합니다.
* 이타이푸 댐 모습
그러나 군부독재자 간의 일방적 협정은 결국 문민정부가 되었을 때, 문제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파라과이는 이타이푸 댐 관련 조약이 불평등하다며 기존 조항의 수정요구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맺는 말
이상으로 파라과이 전쟁과 이 전쟁이 파라과이와 브라질에 남긴 효과를 개략적으로 정리해봤습니다.
본래는 브라질의 경제개발을 정리하고 룰라와 호세프 정권의 문제에 대해 써보려고 했지만 브라질 정치사에서 군부의 성장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라과이 전쟁을 알아야 할 것 같아 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