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최근 몇달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일이지만,
물론 이 역시 당사자들간에 가시적으로 언급된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매주 토요일 오전의 암묵적인 룰,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집앞 놀이터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는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짧지만 휴식을 보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아빠도 육아에 있어서 그래도 뭔가 하고 있지 않느냐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현대 사회의 가정이 만들어낸 불문율과도 같은 룰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그렇다.
때때로 토요일 오전에 비가 와서 놀이터에 갈 수 없을 때면, 당연스레 하늘을 원망해야 하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빠가 안절부절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설하고, 오늘도 역시 토요일이다. 너무도 당연스럽게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오며,
아내에게 조금 잠이라도 더 자라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남편 역할을 하는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놀이터에는 이 법적 강제성이 없는 룰이 통용되는 가정에서 살고 있는 같은 처지의 아빠들이
각자의 정당성을 마음껏 뽐내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게임 렙업에 정신이 없는 아빠,
토요일이지만 업무 관련 전화로 목소리를 높이는 아빠, 벤치에 앉아 부족한 잠을 채우고 있는 아빠,
그리고 아이보다도 더 신나게 정글짐을 타며 정상에 올라 환호하는 아빠 등.
그들 사이에서 난 중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저께 겨우 승률 50%복귀와 200승을 동시에 달성한 당구 3구4구의 멀티플레이를
어서 빨리 재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참아야했다.
그렇다고 내 스스로 저 아이들 속에 섞여 함께 놀기에도 나는 너무 노쇄해버렸다. 군 제대후 7호선을 타고 지나던
뚝섬 유원지의 어린이용 눈썰매장이 너무 가고 싶다며 친구와 둘이서 그 타이어 눈썰매를 들고 입장해 아이스 설산 다운힐을 외치다가
학부모들 사이에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던 그 시절의 그 패기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니까.
아이가 미끄럼틀에 올라선다. 나는 아이가 내려올 곳을 예측하여 그 자리에서 기다리며
손뼉을 치면서 어서오라는 자상을 눈빛을 보낸다. 그래, 이 정도면 중도겠지, 너무 방관적이지도, 그리고 너무 나대는 느낌도 아닌.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면 아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이 순간, 이 얼마나 행복한가.
자, 사랑하는 내 아이는 미끄럼틀에서 내려와 다음 코스로 철봉을 선택한 듯 하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근지구력에 큰 관심을 보인다. 나도 함께 이동하여 그의 근력운동에 조언을 아끼지 않을 타이밍이 왔다.
아들아,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빠는 체대를 졸업했단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 없지만 사실이야. 피지알 유게 문과이과 싸움에
끼어들어갈 자리조차 보이지 않는 예체능 계열 출신이란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미끄럼틀 앞에서 철봉으로 이동하려는 나의 의지는
알알이 흩어진 미끄럼틀 앞 발구름판 같은 곳의 모래에 롤링스톤 당하며 신체 리듬에 커다란 변화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넘어지고 있는 것이다.
넘어지고 있다. 나는 넘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넘어지는 순간에 나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술취해 넘어지는 일이야 일상다반사로 겪어 아무 생각이 없이 내 이몸 알콜의 의지에 맡긴 채 지면과 부비부비하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던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뇌는 2+2x2에 두뇌풀가동을 하던 채연보다 많은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다.
1. 나는 넘어지고 있다.
2. 이것은 나의 오른발이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는 모래알에 의하여 지면과의 마찰력을 발생시키지 못함이 원인이다.
3. 그 결과 상체의 밸런스는 앞으로, 오른발은 밸런스를 잃은채 무거운 머리를 중심으로 내 몸은 지면을 향하고 있다.
이 상황이 닥치자 나의 뇌는 순간적으로 다음과 프로세스의 사고를 한다.
1. 일단 넘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으나, 할 수만 있다면 넘어지고 싶지 않다.
2.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의 확률은 보장할 수 없으나 이 넘어짐에 직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왼발을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
3. 밸런스를 잃은 오른발은 잊어버리자. 마치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을 내딛으면 물위를 걷는 것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왼발을 서둘러 내밀어 보자.
위의 사고를 거쳐 나는 왼발을 서둘러 앞으로 내밀어 무너진 체중의 밸런스를 지키며 멋지게 넘어지지 않음에 성공하기 위한 발악을 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 물위를 걸을 수 없듯이 이미 잃어버린 밸런스는 왼발의 내딛음조차 용서하지 않으며 그냥 넘어지면 살포시 넘어질 수 있는 상황을 철푸덕 허우적 투탕탕탕 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면서 넘어지고 알파고였다면 이런 판단을 하지 않았겠지 라는 후회에 휩싸여 스스로에 실망하고 있었다.
앞선 판단에 실패해 한없이 아뢰옵기 황송한 뇌이지만,(뇌 이놈!)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서둘러 다음에 닥쳐진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것이 그의 일이기에.
1. 결과적으로 넘어졌다.
2. 현재 오른쪽 고관절 부분이 매우 아프다.
3. 아이는 어디 있는가? 안전하게 놀고 있는가?
4. 아빠는 쳐다보지도 않고 철봉 근처에서 아주 신나게 놀고 있으니 일단 내 걱정을 하자.
위의 사고가 완료되자, 두 가지의 갈등이 다시 한번 찾아온다.그것은 바로 아프다. 그리고 창피하다. 인 것이다.
이 두가지의 사고가 양립을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잔혹한 갈림길이다. 과연 이 양립하는 갈등에 대한 솔루션이
무엇이 우선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감동받은 바 있는 나는 창피함부터 대면해 나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아주 다행히도 아무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이면 어쩌지? 다들 속으로 키득거리면서 나를 바보처럼 보고 있는 것이면 어쩌지? 라는 생각도 잠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사전 지식은 그럴리 없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했다. 퍼즐앤드래곤을 플레이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되는 저 아이아빠는 분명 과금을 해도 와이프에게 걸리지 않을 방법에 더 많은 신경세포가 작용하고 있기에 당연히 나의 넘어짐따위는 아웃오브안중, 어젯밤 먹은 술은 분명 친구놈이 사기로 했었는데 왜 내 핸드폰에는 상당 금액의 카드사용내역이 있는지에 억울함을 달래며 뒤늦은 잠을 청하는 또 다른 아이아빠 등 각자의 뇌는 각자의 사고에 여념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나의 넘어짐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자극부여를 하지 못 했다.
자, 나는 이제 내가 아픈 것에만 신경쓰면 되는구나. 아이고 정말 다행이다.
이러한 평화로운 결론을 내려준 나의 뇌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분명 최초에 언급한 암묵적인 룰에 의하면 한시간은 더 놀고 와야 정상이지만 나는 나의 신체적 고통으로 인한 정당성을 확보했다.
아프니까, 아프니...아프면 환자지. 뭔 청춘이야.
세상의 모든 아빠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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