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높고 머나먼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남자는 자신이 몇가지를 놓쳤거나, 덜 물어보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세세한 것은 더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 첫번째는 도대체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가 정확히 무엇이냐인 것이고, 두번째는 이세계로의 환생마냥 소위 이 선택도 '로또'에 가까운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일단 그는 긍정적인 사고를 품어보기로 하고 내려온 상황까지를 정리해보았다. 다소 근방을 둘러본 결과, 다행이게도 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이 살았던 시기 현대지구의 대한민국 서울이 틀림 없었다. 불어오는 계절의 바람, 익숙한 표지판과 광고들, 오고가는 거리에서 들리는 유행가, 행인들 수다 속에서 들리는 사회 이슈 등등을 보았을 때 자신이 죽은 직후 쯤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시간도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남자는 알 수 있었다. 그래, 분명 내 소원풀이를 위한 장소 자체는 제대로 도착했다-고 생각한 남자였다.
"그래 그것까지는 괜찮아. 괜찮은데-"
남자는 쥐어뜯을 수도 없는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도대체 왜 곰인형이 된거냐~~~~!!!!"
그렇게 소리 질렀다.
"하...... 그래 이게 바로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상태'라 이거지?"
한바탕 샤우팅 뒤, 남자는 냉정을 되찾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지만 상태만 보아선 확실히 저승에서 만난 여자가 한 말 그대로였다. 혼도 멀쩡히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들과 접촉할 수도 있고, 물체도 만지고 할 수 있으니 완전히 '죽었다'고 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해도 엄연히 무기물상태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보기는 더욱 힘든 상태. 남자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삑-삑-삑-삑-
"이거 참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하나."
-삑-삑-삑-삑-삑-삑-삑-
"어떻게 한다..."
-삑-삑-삑-삑-
"아~ 진짜 곰인형한테 아기 삑삑이 신발 소리는 왜 나는건데!"
정보 좀 수집해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그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마음편히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발소리까지 귀에 안들어올 수 없는 상태이니 젊은 여자들이나 아기들에게는 말그대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뭔가가 정리 되어있는 상태라면 또 모르겠으나, 눈에 띄지 않게 정보를 수집하고 싶었던 그에 있어선 그런 주목도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아- 인공지능 컴퓨터가 바둑으로 이세돌도 꺾는 시대에 걸어다니는 곰인형에 뭐 그리 관심들이 많아가지고는."
남자는 살아있을 때나 이렇게 반겨주던지 원 이제와서-라며 투덜투덜거렸다. 생전에 인기의 이응조차도 지분으로 가져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현재 자신의 몸뚱이나 다름없는 솜털 곰인형조차 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남자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원사의 저주를 받은 非미남형 非부자 아재가 아이와 여자대상 인기투표로 곰인형한테 밀리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저 그것이 '타당한 일'인 것이 분했을 뿐이다.
"...그나저나 세상이 이렇게 컸던가...."
미취학아동이었을 때는 커녕 초등학교 초년생이었을 때도 가물가물한 그였다. 소위 위너의 키라는 180cm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평균신장만큼은 되었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다시 유치원생은 될까말까한 키로 다시 줄었으니 이것은 동화만 아니다 뿐이지 걸리버여행기가 따로 없었다. 일단 남자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건 마찬가지로구만."
잠시 고민을 한 그는 일대를 둘러보다 인근 하천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가 살짝 지상과 가까워지며 붉게 물드는 시간. 아직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그들의 공간을 벗어나 여유를 갖기에는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원으로 가는 뚝방길로 올라가는 계단을 작은 몸뚱이로 올라간다고 낑낑대느라 다소간 후회가 밀려오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통째로 가린채 큰걸음으로 걷는 아주머니들과 하천 옆 자전거도로를 따라 라이딩을 즐기는 아저씨들 몇명을 제외하곤 대체로 한산했기 때문이다.
"하아~ 뭐, 이렇게 오랜만에 여유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나쁘지는 않지만 딱히 좋다고 할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덕질을 하는게 소원이라고는 했지만 결국 무엇을 덕질할지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뚜렷하게 결정한 것도 아닌데다가 지금으로서는 뭘 결정했다고 해도 일개 곰인형이어서야 달리 방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눕자!"
공원내 한산해보이는 벤치를 찾은 그는 잠시의 낑낑거림 후 안락을 취했다. 어쨌든 이제 그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끙끙거릴 필요도 없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아도 된다.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 때문에 자라나라머리머리를 밤이면 밤마다 외울 필요도 없으며, 그 나이먹고 결혼할 여자 못데려오냐고 닥달을 받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솔로본능에 있어서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한명 쯤 있다면 그건 울 엄마야라고 자조할 필요도 없고, 모아둔 돈이 없어서 노후가 망했다며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는 지금 그런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남자는 지금까지 살아서 한게 다 뭐가 되나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휘휘 손을 내저으며 지워버렸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이 발인날짜 즈음일텐데 참 이거 나는 너무 편하구만. 불효자식일세 그냥."
그러나 생각이 가족에게까지 미치자 남자는 다시 착잡해졌다. 자유의 몸이 되었기도 하지만 엄연히 망자. 보고 싶다고 곰인형 몸뚱아리로 찾아 가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 그였다. 말이 안되도 쳐들어가자 생각한다한들 여비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는 상태. 비행능력, 그것도 상당한 고속, 고공이동이 가능한 비행능력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남자는 악마같은 방법으로 이야기를 듣는 마법소녀는 옆에 없지만 일단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커플들 절대 옆에 오지마라. 대폭발 쓸거야."
그렇게 나직히 읊조리며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이내 그의 상식대로라면 들리 없는 잠에 빠졌다. 산사람도 아니고 영혼만 깃든 곰인형이 잠을 잔다는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가, 라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일어나면 기억나지 않을 세계로 간 것이다. 살아 움직이며 말하고 생각하는 곰인형이라면 또 모를까, 벤치에 널부러져있는 곰인형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으므로 그는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남자의 시간은 멈춘 것이나 다름 없지만 공원안에 세워진 시계 속 시침과 분침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시침과 분침의 걸음에 맞춰 붉게 타오르던 하늘은 서서히 산화되어 이내 검푸른 재만이 흩뿌려지게 되었다.
"헉- 헉- 헉- 헉-."
그가 잠든 사이 한 소녀가 러닝을 하다 남자의 인근에서 멈춰섰다. 주변을 잠시 두리번 거리던 소녀는 자세를 고쳐잡은 뒤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는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가녀린 소녀의 몸에서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을정도로 우렁찬 소리를 강가를 향해 발사했다. 덕분에 나름 숙면 중이었던 남자는 화들짝 놀라 깨고 말았다.
"하~ 지르니깐 좀 낫네."
준비해온 타올로 땀을 닦으며 소녀는 남자의 옆에 걸터 앉았다. 계란한판이 왔다갔다하는 시간동안 남자의 곁에 자발적으로 다가서는 여자는 한명도 없었기에 남자는 짐짓 매우 놀랐으나, 이내 소녀가 성인남성이 아닌 곰인형의 곁에 앉게 된 것임을 깨닫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주인은 어디가고 너 혼자 이렇게 있니-."
소녀는 인형에게 말을 거는 타입의 친구였다.
"아니면 혹시 너도 선택받지 못한거니?"
남자는 '선택'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며, 소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봐도 그녀가 '선택받지 못하다'는 말을 할정도로 그렇게 많은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랄까 아직 창창한 10대임이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죽어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아앙~!! 이번에는 틀림없이 될 줄 알았는데~~!!!"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절규한뒤 머리를 양손으로 마구 긁적였다.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소녀이기에 남자는 겁나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아~ 몰라 마셔! 마셔부러!!"
갑자기 일어난 소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백에서 콜라 한캔을 꺼내 거칠게 딴 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남자는 그런 소녀의 범상치 않은 자세를 보면서 미래의 음주가무 유망주를 발견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크~ 내가 말이야 응? 체중감량한다고 말이야 끅~ 이 맛난 거도 못마시고 말이야~ 응? 완전 멍뭉이고생을 했는데!!"
남자는 살아서도 못본 '콜라 마시고 취한 여자'를 죽어서 보게 되었다. 아 이게 베모여신님의 귀여움을 더하기 위해 그냥 조작된 설정이 아니구나하고 내심 감탄하면서, 내세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또 데뷔조에서 떨어진거냐고......"
남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동안 우렁차게 포효하던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진짜... 진짜 그게 내 최선이었는데.. 그게 진짜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쥐어짜낸거였는데......"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잘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눈에 들어온 반짝임은 틀림없이 눈물이었다. 남자는 데뷔조라는 단어를 듣고서 소녀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좌절하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저기 곰아.. 난 진짜 아이돌은 글러 먹은걸까?"
갑자기 그에게 시선을 돌린 소녀의 물음에 남자는 놀랐지만 고정자세를 풀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이미 곰인형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렇게 혼자 한바탕 그간의 감정을 폭발하고나면 원래대로 돌아와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든, 새로운 선택을 하든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선택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응? 곰아? 대답 좀 해봐?"
그러나 남자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소녀 홀로 감정을 푸는 것까진 맞았지만 그게 남을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것까지 의미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곰인형이 된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소녀는 먹던 콜라를 잠시 벤치 아래에 내려놓고 양손에 번쩍 들어올렸다.
"응 얘기해봐. 내가 잘못된거야? 응? 응??"
양 손에 그를 들어올린 소녀는 점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남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더 이상 남자가 평정심이 우수한 곰인형으로 있기 곤란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기어코 소녀의 숨이 그의 얼굴에 닿을 정도에까지 이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