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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17 19:39:54
Name 은때까치
Subject [일반] 로터리 티켓


우리가 아무런 사전 계획 없이 뉴욕에 간 것은 지난 2월이었다. 우리 둘 다 정해진 스케줄대로 누군가를 따라다니기만 하는 관광에는 신물이 난 지라, 이번에야말로 하고 싶은 것만 하다 오자라고 굳게 결심을 하고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굳이 따지자면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연사 박물관을 가지 않기로 계획했다.

가격 대비 효용성의 극대화가 우리 여행의 모토였다. 6년간을 알고 지냈던 우리는 서로의 성미에 대해 잘 알기에,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그렇기에 터무니없이 비싼 뉴욕의 랜드마크들을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쉽게 합의했다. 대신 우리가 택한 것은 뉴욕의 예술이었다. 기부금제로 운영되어 단돈 1달러만 내고 입장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이틀을 보냈으며, 브루클린의 카페에서 무료 재즈 공연을 감상했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도 당연히 보고 싶었지만, 제일 싼 좌석이 130달러라는 사실은 우리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 고맙게도 브로드웨이에는 가난한 여행객들을 위한 좋은 제도가 있었다. 당일 공연의 극장 맨 앞좌석, 최고의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시가 200불은 충분히 나가는 좋은 자리를 30불이라는 싼 가격에 판매하는 제도였다. 두 가지 판매 방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특정 시간에 먼저 오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러쉬 티켓 (RUSH ticket)’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시간에 추첨을 해서 판매하는 ‘로터리 티켓 (Lottery ticket)’이었다. 만일 러쉬 티켓이 있었다면 우리는 필경 아침부터 나가서 줄을 섰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보고 싶었던 공연에는 러쉬 티켓이 없었고, 오직 로터리 티켓만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일찌감치 도착해서인지, 추첨이 이루어지는 극장 앞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우리는 줄을 서서 이름을 써 넣고 추첨 시간을 기다렸다. 시간은 많이 남았고 우리는 공대생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첨 확률을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당첨이 되면 티켓을 두 장 살 수 있으므로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당첨이 되면 된다. 로터리 티켓에 할당된 좌석은 30석이므로 15명이 당첨의 기회를 얻는데, 여기 모인 사람은 얼추 보아도 서른 명이 채 안 되므로, 우리가 뮤지컬을 볼 수 있는 확률은 75%가 넘는다! 하지만 낙관적인 예상은 5분도 안 되어서 깨졌다. 사람들이 이름을 쓰러 줄을 설 때마다 우리는 계산을 수정해야 했고, 75%이던 확률은 60%, 40%, 30%까지 내려갔다. 결국 추첨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최종 확률은 26%, 모인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고작 15명이라니! 우리는 기대를 품고 호명을 기다렸지만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첫 시도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희망에 불타올랐다. 한 번 시도해서 성공할 확률이 26%라면, 두 번 시도하면 1 - 0.74^2 = 45%, 세 번 시도하면 1 - 0.74^3 = 60%가 아닌가! 뉴욕에서의 남은 시간은 10일, 우리가 매일 로터리를 시도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96%의 확률로 뮤지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정도로 확률이 높으면 의심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가뿐한 마음으로 그 날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매일같이 로터리 티켓을 추첨하러 브로드웨이에 갔다. 낮에는 다른 곳을 구경하고, 추첨이 이루어지는 6시에는 브로드웨이 50번가에 있는 그 극장으로 가서 제비에 이름을 썼다. 정말 보고 싶은 공연을 30달러에 볼 수 있다면야 이정도 수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하는 생각에, 추첨에 실패해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만에 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동안 해온 것이 아까운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지하철 50번가 역이 월평역 마냥 익숙해지고, 처음 갔을 때 받은 맥도널드 쿠폰을 다 쓸 때 즈음 우리는 드디어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토록 원하던 뮤지컬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매몰비용에 대한 집착과 확률에 대한 신뢰를 넘어선 것이다. 우리는 긴 논의 끝에 더 이상 로터리를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눈물을 머금고 130달러를 내고 마지막 날에 좌석을 예약했다. 지갑은 비었지만 마음은 편해졌고, 우리는 비로소 비효율적인 동선 때문에 가지 못했던 뉴욕 북부를 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은 예상치 못하게 끝난다. 정말 믿기지 않게도, 우리는 돌아가는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하는 날이 27일인데 뉴욕에서 출발하는 날이 27일이라고 멋대로 믿어 버렸던 것이다. 출발하기 바로 전날 저녁에 맥주를 마시며 내일 볼 공연에 대해 잡담을 나누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부랴부랴 숙소로 들어가 짐을 싸면서 티켓을 취소해 보려고 했지만, 야속하게도 환불이 불가능한 티켓이었다. 더더욱 깊은 좌절의 수렁에 빠진 우리는 온갖 커넥션을 사용해 티켓을 팔아보려고 했지만, 뉴욕에 연고도 없는 우리가 오프라인으로 직접 티켓을 파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아침에 떠나야 했기에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되는대로 가격을 낮춰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의 뮤지컬 티켓은 60달러, 장당 30달러에 이름도 모르는 미국인에게 팔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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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17 20:01
수정 아이콘
반값 티켓 파는 곳이 없어졌나요? 최신 인기 뮤지컬은 제외였지만 그래도 맘마미아나 라이언킹 같은 스테디셀러 뮤지컬 티켓을 팔아서 그래도 기분 좋게 봤었는데..벌써 2006년이야기니..
Nasty breaking B
15/08/17 20:13
수정 아이콘
오마이갓.. ㅠㅠ
15/08/17 20:18
수정 아이콘
하.. 깊은 멘붕을 어찌 이겨내셨는지..
방과후티타임
15/08/17 20:27
수정 아이콘
제대로 여행하셨네요.....
레기아크
15/08/17 20:40
수정 아이콘
안타깝게도 독립시행 확률에 관한 가장 흔한 오류를 범하셨군요.
superjay
15/08/17 20:50
수정 아이콘
어디에 오류가 있는거죠?
불곰드랍
15/08/17 21:01
수정 아이콘
독립시행의 오류는,
a가 당첨될 확률이 50%일때, 두번 연속 시도하면 한번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은 a의 당첨을 시도하는 각각의 시행은 독립적인 것이므로 두번이 아니라 백번을 해도 안될수도 있는거죠.
superjay
15/08/17 21:09
수정 아이콘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데요
쩌글링
15/08/17 21:11
수정 아이콘
글쓴 분은 러프하게 매 시행 마다 26% 확률이니까 두번째 시행시에는 1- (0.26 x 0.26) 으로 계산 한 듯 합니다. 보통 생각 하는 독립시행의 가장 흔한 오류는 아닌 것 같네요
15/08/17 21:19
수정 아이콘
별로 오류를 범한 것 같지는 않네요.

처음 시도하는 날은 10번 시도하면 높은 확률로 될거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계산 자체도 0.5 + 0.5 = 1 이 아니라 1 - 0.5*0.5 = 0.75 와 같이 진행되었네요.

(다시보니 0.742, 0.743 부분은 오타이신 듯하고 결과값 자체는 정상)
은때까치
15/08/17 22:22
수정 아이콘
1-0.74^2, 1-0.74^3인데 제가 실수로 제곱표시를 빼먹었네요. 지금은 수정했습니다.
15/08/17 21:21
수정 아이콘
좋은 여행 친구를 두셨네요.

그리고 일상을 담은 수필형식의 글도 깔끔하게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뮤지컬...이 대체 뭐였을까요?
은때까치
15/08/17 22:2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뮤지컬은 위키드였어요. 작년 2월이었답니다.
Nasty breaking B
15/08/18 03:12
수정 아이콘
크 위키드.. 내한공연도 했지만서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보셨다면 멋진 추억이 되었을텐데 너무 아쉽네요
치맛살
15/08/18 09:54
수정 아이콘
카~ 작년에 위키드 볼거라고 로터리 줄 섰었는데.
전 두 번 줄 서보고 손 털었지만요
15/08/17 21:36
수정 아이콘
하스스톤을 하고 있었다면 뉴욕은 안갔을텐데...(농담입니다.)

꼼꼼한 사람 둘이서 여행가야겠네요. 한명이 놓쳐도 다른 한명이 체크할 수 있게.
이상적인 파티는 꼼꼼이 둘과 분위기파 1명인거 같습니다.
은때까치
15/08/17 22:24
수정 아이콘
히히 그래서 작년 2월에는 전설을 못 달았답니다
15/08/17 23:06
수정 아이콘
전설 달기 너무 어려워졌어요. 5급에서 6급갔다 다시 5급 복구시키고 자는게 요즘 일상입니다.
멘붕 여행기 글에서 뜬금없는 하스 얘기 죄송합니다.^^

혹시 가능하시면 쪽지로 노하우 좀...
민트초콜릿
15/08/17 22:26
수정 아이콘
위키드와 라이언킹은 인기뮤지컬이라 반값티켓(TKTS?)이 없었던걸로 기억하네요. 저는 작년에 브로드웨이 TKTS 매표소에서 뭐볼까 고민하다가 빨강치마에 검정 망사스타킹입고 홍보나오신 시카고 누님들 보고 시카고를 봤습니다. 70달러정도에 1층 중간 중앙에서 봤으니 대만족이었네요. 아, 물론 영어 실력이 딸려서 내용은 반쯤만 이해했습니다ㅠㅠ
뉴욕커다
15/08/17 23:42
수정 아이콘
크크 전 다행히도 전에 뉴욕에 거주했어서 시간이 많았기에 주말마다 도전해서 성공한 기억이 있네요 크크
15/08/17 23:51
수정 아이콘
Tkts덕에 바쁜 뉴욕에서의 시기에서도 브로드웨이에서 즐거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네요. 여전히 타임스퀘어 계단 뒤쪽에서 파는지 기억이 가물하네요.
뉴욕, 좀더 여유있게 다시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Ms.Hudson
15/08/18 00:44
수정 아이콘
크으... 작년 2월이면 그 티켓 저한테 파셨으면 정말 잘봤을 것 같네요.
다시 뉴욕에 오셔서 꼭 위키드 보고 가시길 바래요!
ImpactTheWorld
15/08/18 03:13
수정 아이콘
안타깝네요ㅠㅠ 혹시 다음번에 가신다면 친구랑 찢어지세요 그럼 혼자와서 두장 당첨된 한국인 꼭 있을거에요 크크 위키드 로터리 과장좀 보태서 15명중에 10명 한국사람이죠
15/08/18 10:35
수정 아이콘
????? 난 왜이걸 로리타 티켓으로 봤단 말인가
음란마귀야 물러가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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