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의 아들. 내게 그는 그런 존재였다. 알고 있다. 내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유자(儒者)들은 나의 불경함에 치를 떨 것이다. 대신들은 내게 강상의 죄를 엄중히 물을 것이고, 개중 흥분한 이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은 지엄하신 촉한의 황제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그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이고 이마를 땅에 대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 그는 그런 존재였다. 현덕의 아들.
“승상께서 멀리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신 지 미처 한 해도 지나지 않았거늘 어찌 다시 험로로 떠나기를 자청하신다는 말씀이오?”
승상.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아부(亞父)라 부르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새삼스럽게 그의 나이를 되새긴다. 현덕의 죽음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힘겹게 진압하고 지난해는 노수를 건너 남만까지 평정하였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옥좌 위의 그를 보니 거기 앉아 있는 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현덕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침상 옆에서 서럽게 울던 어린 아이는 어느덧 나이 스물의 훤칠한 장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린다.
“비록 익주가 안정되었다 하나 저 간악한 조씨 일당이 감히 제위를 참칭하고 있는 바, 신이 어찌 일신의 편안함만을 좇을 수 있겠나이까. 부디 북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승상께서 올린 표문을 읽고 짐도 눈물을 금할 수 없었소. 허나 짐은 우선 승상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소.”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현덕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의 긴 귀와 찢어진 눈에서 나는 현덕의 모습을 본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갑작스레 폭풍처럼 일어난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허리를 굽힌다.
“신은 본래 남양에서 밭을 갈며 난세에 목숨이나 부지하려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제(先帝)께옵서......”
현덕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가 세상을 떠나던 순간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백제성에서 만난 그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나약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부끄럽구먼, 공명. 내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다. 지금은 그 때를 떠올릴 때가 아니다. 나는 침착하게 다시 말을 잇는다.
“......뜻밖에도 귀하신 몸을 낮추어 신의 초려를 세 번이나 찾아 천하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신은 감격하여 선제께 제 힘을 다하여 한실을 부흥케 하리라 약속드렸습니다. 그로부터 어느덧 스무 한 해가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하찮은 신이 쓸 만하다 여기셨는지 붕어하실 때 나라의 큰일을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이 뇌리를 뒤덮는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두 손으로 그 손을 마주잡았다. 한평생 전장에서 살아온 그의 손은 뜻밖에도 작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내게 웃어 보이더니 손을 들어 주변을 물렸다. 백제궁 한 가운데, 그 스산하고 추운 방 안에 오직 나와 현덕만이 남았다. 그가 말했다. 미안하네, 공명. 내가 물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그가 답했다. 모든 것이. 그 행간을 나는 읽어냈고, 그렇기에 침묵했다. 그는 웃었다.
“이제 다행히도 남만은 평정되었고 병장기와 갑옷도 충분히 마련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중원을 평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은 용렬하나마 힘을 다해 한실을 부흥하고자 하오니, 이것이 바로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네만 유선을 부탁하네. 그 아이의 재간이 쓸 만하거든 자네가 그 아이를 보필해 주고, 쓸 만하지 않다면 차라리 자네가 제위에 오르게. 나는 현덕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구태여 화들짝 놀란 척하거나 혹은 벌벌 떨며 충성을 다하겠노라 다짐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대답할 뿐이었다. 제 아들처럼 보살피겠습니다. 당신의 아들이니까요. 현덕은 다시 웃었다. 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날 밤 현덕은 눈을 감았고 그의 아들이 촉한의 두 번째 황제로 등극했다.
현덕의 아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가 너무나도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상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한 나라를 다스리는 복잡한 일을 온전히 떠맡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평소 잔소리가 많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신하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좋아하는 유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즐거움 사이에서 그는 곧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승상의 뜻이 그토록 높고 갸륵하니 내 차마 막을 수 없구려. 북벌을 허가하겠소. 세부적인 내용은 승상부에서 결정토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머리를 숙인 후 뒷걸음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 대전의 입구에서 다시 허리를 굽혔다 폈다. 현덕의 아들은 반대편 끝에 놓인 옥좌에 앉아 있었다. 너무나도 멀어 얼굴조차 분간하기 힘든 거리였다. 나는 눈을 들어 그를 일별했다.
현덕. 당신의 아들이 저곳에 있다. 성도의 황궁 가장 높은 곳의 지엄한 옥좌 위에 당신의 아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아들에게 지금 작별을 고하고 전장으로 나간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많은 장수와 병사들의 죽음, 그리고 언젠가 닥쳐올 나의 죽음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게 있어 죽음이란 다시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신의 곁으로 갈 수 없다. 그대가 내게 당신의 아들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재간이 당신만 못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당신이 너무나도 거대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의 잘못도 아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아들을 보필할 것이다. 죽기 전까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대를 기리는 방식이다, 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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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
https://pgr21.com/?b=8&n=59707&c=2285758 이 댓글을 보고 문득 떠오른 감상에 휘갈겨 쓴 단편입니다. 처음에는 감부인과 미부인, 그리고 유비의 세 아들과 공명이 뒤엉킨 상당히 저속한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습니다마는 쓰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승상빠기 때문일 겁니다. 다음 링크(
https://pgr21.com/?b=8&n=51815)를 참조하시면 초기 버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사족2) 대사는 대부분 출사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특정한 구절은 후출사표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