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암걸리면 죽어?"
"드라마보니까 보통 죽던데!"
하교 길에 두 꼬마가 나눈 대화다. 질문을 던진 꼬마는 얼굴이 어두워졌고, 대답을 한 꼬마는 이를 모르는지 먹고있던 컵떡볶이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굴이 어두운 꼬마는 처음으로 아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2003년, 월드컵의 열기가 식어갔고 나는 중학교에 적응하기 바빴다. 처음 입어보는 교복, 처음 걸어보는 등교길. 그나마 익숙했던 친구들. 처음이 주는 설렘에 벗어날 때 쯤, 또 다른 처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14살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없었던 가족의 부재. 항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을 것 같았던 엄마 아빠 대신 외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며 엄마가 병간호를 가셨단다. 큰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가족끼리 비밀은 없는법. 평소 나와 친하던 외숙모에게서 '암'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고, 드라마가 남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 가족의 부재는 꽤나 힘들었다. 항상 아침 저녁을 챙겨주시던 엄마는 부엌에 없었고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던 아빠도 자리에 없었다. 학교에서도 내 탈선에 대해 걱정하고, 위로를 해주기 바빴다. 나는 그럴수록 주변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철이 든 것처럼 행동하고, 학업에도 더욱 열심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셨는지, 면회를 거부하셨고, 그렇게 3개월동안 아버지는 보지 못한 나는 걱정만 점점 커져갔다.
시간이 지나 아빠는 수술을 하셨고, 항암치료에 들어가셨다. 그때서야 엄마는 면회를 제안했다. 우리의 커져만 가는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한 면회였을 것이다. S병원에 들어서 아버지 병실로 향하는 동안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어떤 모습일까 머릿 속으로 그려보기도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 무슨 얘기를 해야 아버지가 기뻐하실까 등으로 머릿 속은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병실 앞, 문고리를 잡는 순간 지금 생각해도 그보다 무거운 문고리는 없었던 것 같다.
문고리를 돌려 병실로 들어서고 아빠를 보는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예전 80kg이던 몸무게는 50kg까지 빠지셨고, 항암 치료 탓에 머리도 많이 빠진 모습이셨다. 너무 야위신 모습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이제 다 괜찮다고, 회복도 금방 될 것이라며 우릴 위로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평소에 유쾌하신 아버지 성격대로 "울일도 많다"며 우리를 놀리시고는, 호흡기 운동하는 기구로 공을 5개나 들어올리시며 건강 아닌 건강을 과시하셨다.
병원 생활을 마친 후에도 집에서 수개월 휴식을 취하실 때도, 아버지 방의 문고리는 꽤나 무거웠다. 내 무거운 마음만큼이나 아빠에게도 문고리는 무거웠다. 혼자 문을 여시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좋으셨고, 때로 우리를 불러 문을 열어달라고 하실 정도였다. 한번은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에 2층에 올라가보니 아버지가 눈만 깜빡깜빡하시며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실 때는 정말 내 마음의 천장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위로받고, 가족들은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2015년 지금, 대장암을 앓기 전보다 더욱 건강해지셔서 너무 밖에서 돌아다니신다. 골프에 취미를 붙이시더니 골프 도대회도 나가시고, 전보다 군것질은 더 많이 하신다. 얼마전엔 스트레스받는다고 코스트코가서 과자를 25만원어치 사오셨다며 나에게 자랑하는 통에 엄마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으셨다. 언젠가 내가 "나는 철이 언제들까 아빠?"라는 질문에 "나도 아직 안들었는데 뭘"이라 하시며 껄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철이 들지 않은 아빠의 모습은 내 롤모델이다. 가족의 화목을 최우선시하고 아들 딸을 사랑하는 아빠처럼 살고 싶다.
그리고 지금 아빠는 리암니슨에 빙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