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과 끝문장의 중요성 (바위처럼님과 poeticWolf님 글에 부쳐)
글을 쓰다보면 다양한 고민과 마주하게 됩니다. 글의 구조와 주제의식, 문체 등등 말이죠. 그 가운데 요즘 가장 절 고민에 빠뜨리는 지점이 바로 글의 도입부와 마무리, 이른바 '첫 문장과 끝 문장'입니다. 영화로 치자면, 오프닝과 엔딩에 해당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죠. 똑같은 글이라도 어떻게 포문을 열고 닫느냐에 따라 글의 풍미와 여운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피지알에서 수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두 분, 바위처럼(Nickyo)님과 poeticWolf님의 글을 통해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 독자를 문제적 상황에 내던지다
["네?"
소주잔을 채우다 말고 벙 찐 표정으로 되묻는다. 이 아가씨가 뭐라는거지? 눈 앞에 있는 누나는 단발머리가 찌개에 젖을 듯 말듯 하게 고개를 푹 숙인채로 기울어 있었다. 누나 잔에 한잔 주고 내 잔에 한잔 따르는 그 사이에 내가 꿈이라도 꾼건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 누나를 보며 멈칫한 손으로 다시 술을 따른다. 쪼르르르, 잔이 꽉 차고 병을 내려놓자 그녀는 단발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든다.
"건배!"]
-바위처럼님의 <너 누나랑 잘래요?>中 (
https://pgr21.com/?b=8&n=55831)
피지알에서 읽었던 수필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도입부 혹은 첫 문장을 하나 꼽으라면 바위처럼님의 <너 누나랑 잘래요?>입니다. 이 글은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독자를 대뜸, 주인공과 한 여성이 함께 대작(對酌)하는 술집 안 테이블로 던져놓습니다. 기-승-전-결이 아닌, 바로 글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대목, 이른바 문제적 상황이 처음부터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죠.
[너 누나랑 잘래요?]라는 도발적인 제목과 한데 어우러진
[네?]라는 도입부를 통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이 글은 제목 그 자체가 첫 문장을 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 글의 가장 큰 매력은 독자를 단숨에 끌어들이는 흡입력, 그리고 문제적 상황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내던지는 도발성에 있습니다.
영화로 치자면 주인공 오대수(최민식)가 옥상 난간에서 자살남(오광록)의 넥타이를 움켜쥐는 장면을 통해 시작부터 관객들을 대번에 영화 속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호기심과 몰입감을 증폭시키는
[올드보이]의 오프닝씬에 비유할 만합니다. 사실 처음에 글을 읽기 전 자유게시판 목록에서 제목만 보고서는, '이거 낚시글 아냐?'라는 심드렁한 생각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내공과 흡입력을 지닌 도입부를 마주하게 되면서, 글의 제목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이내 거두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전 눈꺼풀을 바쁘게 파닥파닥 거리며 이 글을 끝까지 단숨에 읽어내려 가게 되죠.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첫머리만 읽고 넘겨버린 사람은 없을 거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건 순수하게 제목과 어우러진 도입부의 매력, 이른바 첫 문장이 펼쳐놓은 도발적인 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수미상관의 구조를 넘어 여백으로 말하다
[그리고 그날은 그 30분으로 끝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서두르셨던지, 출근해서 일을 하실 때 꼭 필요한 앞치마를 집에 놓고 오셨던 것이다. 그 큰 김치통들에 비해 무게나 부피나 0에 가까운 짐이었는데, 그 한 장이 모자라 장모님은 10시쯤 문을 나서셨다. 두꺼운 점퍼를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하는 할머니를 보고 딸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고, 장모님도 몇 번씩이나 그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셨다. 어머님 뒷모습 위로 우리 대문이 닫히고 걸음 묵직한 바깥 찬 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그 바람이, 늦기 전에 어서 가라고 하던, 장모님 꼭 닮은 아내를 울리고 말았다. 여자 셋이 울고, 난 어쩔 줄을 몰랐다.]
-poeticWolf님의 <그리고 김치만 남았다>中 (
https://pgr21.com/?b=8&n=55237)
필력있는 분들이 자주 찾는 피지알엔 항상 수많은 명문들이 있고 좋은 문장들이 넘쳐나지만 그중에서도 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마지막 문장이 담긴 글은 poeticWolf님의 수필 <그리고 김치만 남았다>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문장의 매력은 글 전체를 다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수미상관식의 글의 구조는 글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즐겨 쓰는 흔한 구성 방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처럼 여백을 통해 여운을 더하는 글은 처음 접해봅니다. 필력이 조금이라도 늘면 늘수록 좀 더 화려하게, 혹은 좀 더 있어보이게, 그리고 좀 더 드러내며 글을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글을 쓰며 무언가를 자꾸만 덧입히고 덕지적지 꾸며내긴 쉬워도, 무언가를 절제하고 덜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글의 마무리가 훌륭한 까닭은, 제목과 어우러지는 수미상관의 구조, 즉
[그리고 김치만 남았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무난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이 문장을 덜어내고
[여자 셋이 울고, 난 어쩔 줄을 몰랐다.]라는 문장만을 담담히 남김으로써 더 진해진 감정의 깊이와 여운을 독자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였다면
[그리고 김치만 남았다.]라는 문장을 마지막에 써서 제목과 연결되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균형 있게 완성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poeticWolf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은 스스로가 마음속으로 제목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짓게 되고 다시금 제목을 보며 처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제목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죠. 덜어냄으로서 더 진해지게 만드는 것. 결국 이러한 것이 마지막 문장의 힘입니다. 굳이 영화에 비견하자면, 주인공 선우(이병헌)의 쉐도우 복싱씬을 뒤로한 채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영화의 제목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달콤한 인생]의 여운 있는 엔딩, 혹은 주인공 닉(벤 애플릭)이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독백하는 장면을 처음과 끝에 배치함으로써 같은 장면에 대한 전혀 다른 느낌을 이끌어낸
[나를 찾아줘]에 비유할 만합니다.
마치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은, <너 누나랑 잘래요?>와 <그리고 김치만 남았다> 두 글 모두 제목이 각각의 글 안에서 첫 문장의 역할, 또는 마지막 문장의 역할을 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제목이 본문에서는 빠져있고 이것이 각각의 글에서 전혀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도 꽤나 인상 깊고 흥미로운 부분이죠. 어쨌든 저는 이러한 문장의 힘을 통해 개인적으로도 많은 자극을 받습니다. 속빈 강정처럼 그럴듯한 말이나 중언부언하는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긴 쉬워도, 한편의 글 안에서 의미 없는 문장이 없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덜어내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래서 또 글쓰기라는 작업이 힘들면서도 매력적인 거겠죠.
그건 그렇고 오늘 글도 역시, 영 마무리가 힘드네요-_- 쓰다 보니 자꾸 중언부언하게 될 것 같고, 그러니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저 또한 앞으로 좋은 글 쓰도록 꾸준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다시 한 번 멋진 글을 써주신 바위처럼님과 poeticWolf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