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19/09/26 02:18:58
Name Golden
Subject [기타] 후기 - 프로게이머의 삶에 관하여, 연극 <플레이어> (수정됨)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찾아올 무렵,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에서 프로게이머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연극 <플레이어>가 공연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이 찾아와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여름의 태양과 같이 뜨거웠던 <플레이어>의 과정과 결과를 여러분께 공유하고 싶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전, 저는 모교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조기졸업을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약 7년 만에 학교라는 공간으로 돌아온 저는, 적어도 이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제가 프로게이머를 대표한다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죠. 이러한 사명 의식과 더불어 선수 시절에 얻은 승리를 향한 전투 본능(?)이
저를 나름 성실한 학생으로 만들어 주었고, 감사하게도 그 결과 목표한 바를 이룰 수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 조명환으로서의 목표는 이뤄졌을지 몰라도, 예술가 조명환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공연 연출가라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저는 학교에서 함께 작품을 만들었던 친구들과 외부 입봉작을 하나 만들고 싶었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메시지를 오직 나만이 이 세상에 던질 수 있을까?" ...



문득, 대학 신입생 때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진행했던 게임중독 검사를 받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비가 오는 쾌쾌한 날이었는데, 반드시 참석을 해야 한다 해서 귀찮지만 출석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게임을 하다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현실 세계와 가상세계를 혼동한 적이 있나요?"

내가 10년 동안 게임을 하면서 누굴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캐논 러시를 당했을 때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동? 허허...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선수 시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항상 연습실이 폭파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시간이 넘는 연습과, 누군가에게 이기고 질 때마다 생기는 눈칫밥, 바로 옆에 있는 동료도 결국에는 나의 적, 경쟁자로 귀결되는 환경..

맨 마지막 칸에 자유롭게 남기고자 하는 말을 서술하는 칸이 있었는데,
"이런 검사에 종이와 인력 낭비하시지 말고 왜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지 생각해보라"라고 거친 어투로 글을 적고 나와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나중에 반드시 게이머가, 특히 프로게이머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알리는 작품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했었죠.
그 검사가 프로게이머에 대한 편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었지만, 같은 게이머로서 기분이 나쁜 검사임은 자명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최근 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공식 분류한 것이 떠올랐죠.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연출 한 공연이 마무리된 6월 말, 다소 급하게 대본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연까지는 약 3달이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2주 안에 대본 작업을 마무리 짓고 연습에 돌입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집필을 하며, 마지막 학기 때 들었던 수업인 <동시대연극연구>에서 배운 다큐멘터리 극이라는 양식이 생각났습니다. "현실을 무대 위에 매개하는"것이 핵심인 다큐 극이 제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을 많은 과거의 자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저와 가장 친하며,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프로게이머 출신인 
저로 설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본 속에 나오는 조명환의 인생만을 통해 프로게이머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제 목표였지만, 피드백을 받아 보니
이 대본이 단순히 "내가 이렇게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아왔어요를 알려주는"것에 머물러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너무 한 개인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본이 집필 되어 있던 것이죠. - '음, 극작술적으로 구멍이 있구나. 어떻게 하면 이 작품이 내 개인의 삶이 아닌 
보편적인 프로게이머의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을까?'



친분이 있던 선수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그들의 인터뷰를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게이머 지망생은 어떤 존재인지?
경쟁은 얼마나 가혹한지? 그들의 학창시절은 어땠는지? 등등등... 정말 신기했던 건, 인터뷰를 했던 게이머의 경험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경쟁을 겪고, 대부분 학창시절의 공백을 가지고 있고, 실패를 통한 좌절을 겪고...

"이들의 이야기가 연극이다!"

조명환의 이야기를 베이스로 서사가 흘러가고, 그 사이사이 프로게이머들의 실제 인터뷰를 무대 영상으로 삽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작품이 조명환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프로게이머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비추어질 수 있었죠.
4명의 선수와 함께 한 인터뷰에는 프로게이머 출신인 저에게는 물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공감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은퇴 이후 겪는 박탈감, 일반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가혹한 대가들...



작품 속에는 제가 2005년 프로게이머를 지망한 순간부터 2014년까지 벌어진 일들이 압축되어 표현되었습니다.
2005년 So1스타리그를 보고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5년 동안 커리지매치를 도전했지만 결국 준프로게이머를
취득하지 못한 것, 승부조작으로 인해 스타1을 그만두게 된 것, 그리고 결국에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데뷔전을 치르지만
결국 하나의 산을 넘은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등등...

그중 가장 핵심으로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는 제 자신이 프로게이머가 되고자 했던 이유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사실 게임이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되었다기보다는, 무대가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된 케이스입니다.
매우 큰 규모의 체육관인 선인체육관(지금은 폭파된)에서 열린 So1스타리그 결승 현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박수받는 프로게이머의 모습을 보고 "저런 무대 위에 서는 프로게이머가 되어야지"라고 결심을 했었죠.

하지만 긴 아마추어 시절의 경쟁, 프로가 되어서도 이어지는 지속적인 경쟁들... 무대 위에 서는 것이 1시간이라면
그 1시간을 위해 투자하는 몇 천 시간의 연습 시간에서 느껴지는 피로감.. 점점 지쳐가는 제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잘나가는 팀 동료들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금전적인 궁핍으로 인해 점점 꿈꿔온 무대가 아닌 현실을 쫓았던 저의 모습들이 표현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러하였듯, 마지막에 조명환이라는 인물은 프로게이머가 되고자 했던 이유를 잃어버리고 돈과 승리만을 쫓는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꿈 꿔왔던 수 천명의 관객 앞에서 경기를 해도 패배하면 깊은 좌절에 빠지고.. 무대가 큰 대회보단
상금이 더 큰 대회를 쫓아가고... 물론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꿈을 잃어버린 채 현실과 승리만을 쫓았던 저의 게이머 생활은 다시 
돌아보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프로게이머 조명환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변화하는 과정들 속에서 벌어지는 이슈들 (경쟁과 친구관계의 파괴, 연애의 실패 등...)에 대해 말하는 프로게이머 출신들의 인터뷰가 함께 어우러지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서 프로게이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관객분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스승이신 양정웅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연출은 작품의 주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라고... 제가 던진 "프로게이머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관객분들께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셨길 바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 있습니다. 바로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말한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 발걸음은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이죠. <플레이어>는 이 발자국과 같은 작품입니다.
작은 극장에서, 적은 수의 인원으로, 적은 예산으로 진행한 아주 작은 작품이죠. 하지만 이 작품이 극장에 방문해주신
약 300명의 관객분들께 프로게이머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 "큰 도약"이 되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이 작품을 끝내고 프로덕션 구성원들이 행복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대다수가 학생 신분인 저희 팀원들은
많은 관객분들의 환호 속에 의미 있는 입봉작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잘한 큐 실수들과 개인적으로 아쉬운 극작술적 구멍들이
있지만, 더 학문을 갈고닦는다면 다음 <플레이어>는 더욱더 완벽하고 의미 있는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반드시 그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탄생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많은 국내/외 e스포츠 관계자와 팬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작품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셨더라도, e스포츠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셨던 수많은 선배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의 작은 작품이 그분들의 노력과 열정의 반이나마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플레이어>의 초연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에 이 작품이 세상에 선보일 땐 더욱더 발전한 모습으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9/26 03:47
수정 아이콘
골든 선수 항상 고민 많이 하시고 이스포츠 커뮤니티에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는 활동도 계속 해오시는걸 보면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하시는일 꼭 잘되시길 바랍니다.
19/09/26 16:3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세인트루이스
19/09/26 06:40
수정 아이콘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연극 내용이 궁금하네요. 혹시 온라인으로 볼수 있는 방법도 있을까요? 연극은 큼큼한 대학로 소극장에 보는 맛이 있겠지만, 스트리머셨던 만큼 온라인으로도 중계를 시도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19/09/26 16:35
수정 아이콘
아쉽게도 확보한 저작권들이 공연에서만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취득한 것들이라 영상 공개는 조금 힘들것같습니다. 다음 공연때 찾아와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19/09/26 22:13
수정 아이콘
답변감사합니다. 있는 대본으로 연극 올리는 것도 엄청난 일이던데 창작극을 올리시다니.. 화이팅!
암드맨
19/09/26 08:15
수정 아이콘
저번 글은 그냥 지나쳤는데... 조명환이라는 이름을 보니 아이디인 골든이 바로 슬레이어스 골든으로 연결이 되네요.
응원합니다.
19/09/26 16: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윌모어
19/09/26 10:10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 누르고 갑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응원합니다!
19/09/26 16: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及時雨
19/09/26 12:39
수정 아이콘
늘 도전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19/09/26 16:3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6887 [LOL] 4강을 앞두고 결산해보는 8강 주요팀 각 선수들 챔피언 폭 [8] 삭제됨8716 19/10/28 8716 1
66886 [LOL] 이번 8강에서 보여준 경기력으로 각 라이너 최고를 뽑자면?? [41] 스톤에이지9136 19/10/28 9136 0
66885 [LOL] 4강 팀이 확정된 시점에서, 개인적인 각 팀별 평가 [36] 프테라양날박치기10352 19/10/28 10352 1
66884 [LOL] SKT vs G2. MSI 4강 리매치 성사! - 2일차 후기 [171] Leeka14487 19/10/28 14487 7
66883 [LOL] 소드 선수가 비난을 그만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175] 호두파이16316 19/10/28 16316 20
66882 [기타] 진수도사, 오토체스 인비테이셔널 우승! [155] 피를마시는새20439 19/10/27 20439 6
66881 [LOL] 역대 최초 롤드컵 픽 97개 돌파 - 현재까지의 라인별 픽 정리 [42] Leeka10385 19/10/27 10385 2
66880 [LOL] 2019 LoL 월드 챔피언십 8강 토너먼트 2일차 경기 Preview [68] 어제의눈물12116 19/10/27 12116 1
66879 [LOL] 옴므 이야기. (feat 랑싱) [67] Leeka12824 19/10/27 12824 4
66878 [LOL] 그리핀 vs IG. 지표 통계들과 잡담 [165] Leeka16592 19/10/27 16592 9
66877 [LOL] 케일의 도벽에 대한 간략한 정리 [29] 프테라양날박치기10038 19/10/27 10038 1
66876 [LOL] 그리핀 탈락 후 탑 관련해서 씨맥이 썰 풀었네요. [374] 대패삼겹두루치기28343 19/10/27 28343 5
66875 [LOL] 중국 결승진출 확정! 그 상대는 과연? [34] Leeka10662 19/10/27 10662 3
66874 [LOL] 19살 더샤이의 커리어 [91] 신불해20588 19/10/26 20588 18
66873 [LOL] 그리핀의 다전제와 역대급 탑 차이. [278] Leeka19599 19/10/26 19599 5
66872 [LOL] 2019 LoL 월드 챔피언십 8강 토너먼트 1일차 경기 Preview [53] 어제의눈물12569 19/10/26 12569 5
66871 [LOL] 역사상 가장 많은 챔피언이 출전하는 롤드컵의 그림자 [54] 프테라양날박치기11051 19/10/26 11051 0
66870 [LOL] 지극히 주관적인 오늘자 롤드컵 예상: 그리핀 대 IG [84] 랜슬롯11792 19/10/26 11792 2
66869 [LOL] NA vs KR 역대전적 [39] ELESIS11222 19/10/26 11222 4
66868 [기타] [블리즈컨] Road to BLIZZCON 2019. [21] 은하관제13992 19/10/26 13992 5
66867 [기타] 크루세이더 킹즈3 개발자 Q&A [23] 에셔11251 19/10/25 11251 6
66866 [LOL] 2018-2019 롤드컵에서의 자야와 카이사 [38] 가스불을깜빡했다10654 19/10/25 10654 0
66865 [LOL] 롤하기 딱 좋은 나이 [44] Dango14050 19/10/25 14050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