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찾아올 무렵,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에서 프로게이머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연극 <플레이어>가 공연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이 찾아와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여름의 태양과 같이 뜨거웠던 <플레이어>의 과정과 결과를 여러분께 공유하고 싶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전, 저는 모교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조기졸업을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약 7년 만에 학교라는 공간으로 돌아온 저는, 적어도 이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제가 프로게이머를 대표한다는
사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죠. 이러한 사명 의식과 더불어 선수 시절에 얻은 승리를 향한 전투 본능(?)이
저를 나름 성실한 학생으로 만들어 주었고, 감사하게도 그 결과 목표한 바를 이룰 수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 조명환으로서의 목표는 이뤄졌을지 몰라도, 예술가 조명환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공연 연출가라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된 저는 학교에서 함께 작품을 만들었던 친구들과 외부 입봉작을 하나 만들고 싶었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메시지를 오직 나만이 이 세상에 던질 수 있을까?" ...
문득, 대학 신입생 때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진행했던 게임중독 검사를 받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비가 오는 쾌쾌한 날이었는데, 반드시 참석을 해야 한다 해서 귀찮지만 출석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게임을 하다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현실 세계와 가상세계를 혼동한 적이 있나요?"
내가 10년 동안 게임을 하면서 누굴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캐논 러시를 당했을 때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동? 허허...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선수 시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항상 연습실이 폭파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시간이 넘는 연습과, 누군가에게 이기고 질 때마다 생기는 눈칫밥, 바로 옆에 있는 동료도 결국에는 나의 적, 경쟁자로 귀결되는 환경..
맨 마지막 칸에 자유롭게 남기고자 하는 말을 서술하는 칸이 있었는데,
"이런 검사에 종이와 인력 낭비하시지 말고 왜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지 생각해보라"라고 거친 어투로 글을 적고 나와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나중에 반드시 게이머가, 특히 프로게이머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 알리는 작품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했었죠.
그 검사가 프로게이머에 대한 편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었지만, 같은 게이머로서 기분이 나쁜 검사임은 자명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최근 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공식 분류한 것이 떠올랐죠.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연출 한 공연이 마무리된 6월 말, 다소 급하게 대본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연까지는 약 3달이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2주 안에 대본 작업을 마무리 짓고 연습에 돌입하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집필을 하며, 마지막 학기 때 들었던 수업인 <동시대연극연구>에서 배운 다큐멘터리 극이라는 양식이 생각났습니다. "현실을 무대 위에 매개하는"것이 핵심인 다큐 극이 제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을 많은 과거의 자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저와 가장 친하며,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프로게이머 출신인
저로 설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본 속에 나오는 조명환의 인생만을 통해 프로게이머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제 목표였지만, 피드백을 받아 보니
이 대본이 단순히 "내가 이렇게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아왔어요를 알려주는"것에 머물러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너무 한 개인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본이 집필 되어 있던 것이죠. - '음, 극작술적으로 구멍이 있구나. 어떻게 하면 이 작품이 내 개인의 삶이 아닌
보편적인 프로게이머의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을까?'
친분이 있던 선수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그들의 인터뷰를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게이머 지망생은 어떤 존재인지?
경쟁은 얼마나 가혹한지? 그들의 학창시절은 어땠는지? 등등등... 정말 신기했던 건, 인터뷰를 했던 게이머의 경험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경쟁을 겪고, 대부분 학창시절의 공백을 가지고 있고, 실패를 통한 좌절을 겪고...
"이들의 이야기가 연극이다!"
조명환의 이야기를 베이스로 서사가 흘러가고, 그 사이사이 프로게이머들의 실제 인터뷰를 무대 영상으로 삽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작품이 조명환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프로게이머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비추어질 수 있었죠.
4명의 선수와 함께 한 인터뷰에는 프로게이머 출신인 저에게는 물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공감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은퇴 이후 겪는 박탈감, 일반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가혹한 대가들...
작품 속에는 제가 2005년 프로게이머를 지망한 순간부터 2014년까지 벌어진 일들이 압축되어 표현되었습니다.
2005년 So1스타리그를 보고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5년 동안 커리지매치를 도전했지만 결국 준프로게이머를
취득하지 못한 것, 승부조작으로 인해 스타1을 그만두게 된 것, 그리고 결국에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데뷔전을 치르지만
결국 하나의 산을 넘은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등등...
그중 가장 핵심으로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는 제 자신이 프로게이머가 되고자 했던 이유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사실 게임이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되었다기보다는, 무대가 좋아서 프로게이머가 된 케이스입니다.
매우 큰 규모의 체육관인 선인체육관(지금은 폭파된)에서 열린 So1스타리그 결승 현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박수받는 프로게이머의 모습을 보고 "저런 무대 위에 서는 프로게이머가 되어야지"라고 결심을 했었죠.
하지만 긴 아마추어 시절의 경쟁, 프로가 되어서도 이어지는 지속적인 경쟁들... 무대 위에 서는 것이 1시간이라면
그 1시간을 위해 투자하는 몇 천 시간의 연습 시간에서 느껴지는 피로감.. 점점 지쳐가는 제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잘나가는 팀 동료들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금전적인 궁핍으로 인해 점점 꿈꿔온 무대가 아닌 현실을 쫓았던 저의 모습들이 표현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러하였듯, 마지막에 조명환이라는 인물은 프로게이머가 되고자 했던 이유를 잃어버리고 돈과 승리만을 쫓는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꿈 꿔왔던 수 천명의 관객 앞에서 경기를 해도 패배하면 깊은 좌절에 빠지고.. 무대가 큰 대회보단
상금이 더 큰 대회를 쫓아가고... 물론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꿈을 잃어버린 채 현실과 승리만을 쫓았던 저의 게이머 생활은 다시
돌아보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프로게이머 조명환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변화하는 과정들 속에서 벌어지는 이슈들 (경쟁과 친구관계의 파괴, 연애의 실패 등...)에 대해 말하는 프로게이머 출신들의 인터뷰가 함께 어우러지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서 프로게이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관객분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스승이신 양정웅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연출은 작품의 주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라고... 제가 던진 "프로게이머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관객분들께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셨길 바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 있습니다. 바로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말한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 발걸음은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이죠. <플레이어>는 이 발자국과 같은 작품입니다.
작은 극장에서, 적은 수의 인원으로, 적은 예산으로 진행한 아주 작은 작품이죠. 하지만 이 작품이 극장에 방문해주신
약 300명의 관객분들께 프로게이머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 "큰 도약"이 되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이 작품을 끝내고 프로덕션 구성원들이 행복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대다수가 학생 신분인 저희 팀원들은
많은 관객분들의 환호 속에 의미 있는 입봉작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잘한 큐 실수들과 개인적으로 아쉬운 극작술적 구멍들이
있지만, 더 학문을 갈고닦는다면 다음 <플레이어>는 더욱더 완벽하고 의미 있는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지 않을까요? 반드시 그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탄생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많은 국내/외 e스포츠 관계자와 팬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작품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셨더라도, e스포츠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셨던 수많은 선배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의 작은 작품이 그분들의 노력과 열정의 반이나마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플레이어>의 초연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에 이 작품이 세상에 선보일 땐 더욱더 발전한 모습으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