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알렉시오스 2세는 자신의 고모 할머니, 안나 콤네나가 쓴 <알렉시아드(Alexiad)>에 몰두하고는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더불어 아버지 마누엘 대제 다음으로 존경하는 증조부, 알렉시오스 1세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교양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문학적 수사가 많은 책이었지만, 어린 알렉시오스 2세는 <알렉시아드>를 읽고 또 읽었다.
<알렉시아드>에서, 알렉시오스 2세가 가장 좋아하던 대목은 로베르 기스카르와 알렉시오스 1세가 디라키온에서 결전을 벌이던 대목.
비록 알렉시오스 1세의 대패로 끝나는 전투를 다루는 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오스 2세는 이 대목을 가장 좋아했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위기 한가운데서 기지와 무용을 발휘하여 활로를 뚫어내는 모습이 근사했기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자신이 만약 증조부가 맞이한 것과 같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과연 자신은 증조부처럼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그 때 그 시절의 증조부님처럼 해내지 못한다면 이번 싸움, 반전의 기회 따위는 없겠지."
좌우익, 중앙 할 것 없이 전 병력이 투르크 인들에게 압도당하는 광경에, 알렉시오스 2세는 쓰게 웃었다.
킬리키아의 중심부, 카디를리에서의 싸움.
이전, 실리프케 전투에서 대패한 알렉시오스 2세는 동쪽 아르메니아 방면에서 킬리키아 지역으로 진입한 조지아의 원군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원군과의 합류로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경기병 위주로 구성된 투르크 인들의 군세는 삽시간에 로마 군 진영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에 아직 패전의 후유증을 제대로 씻어내지 못한 로마, 조지아의 혼성군은 기세에서 적에게 압도당해, 서서히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전투가 펼쳐진 이래로 수 시간이 경과하였을 때, 로마, 조지아 혼성군의 열세는 보다 뚜렷해졌다.
투르크 인들이 저마다 들고 있던 군기(軍旗)는 다수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면, 로마, 조지아 혼성군의 것은 꽤 꺾여졌으니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밀리는 와중에도 진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이대로라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반전, 그것도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는 그런 반전이었다.
어떻게든 전장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만 있다면, 그때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어떤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알렉시오스 2세는 뭔가 결단을 내린 듯, 약간 헐거워진 투구의 끈 매듭을 풀어 단단히 고쳐매었다.
"근위대장."
"예, 폐하."
쇠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함성이 오가는 와중에 나직히 근위대장을 부르는 알렉시오스 2세.
"지금부터 짐은 근위병들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겠다. 혼전에 빠져 적 대열에 흐트러짐이 나타난 지금이 돌격의 적기일 터."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폐하! 적진 한복판에서는 소인들도 폐하의 안위를 보존하기 어렵나이다!"
황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알렉시오스 2세의 곁을 지키던 근위대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만류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2세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투르크 인들은 확실히, 기병을 이용한 싸움에 능하다. 그러나 하마(下馬)하여 벌이는 싸움에는 여전히 서툴지.
지금은 수적인 우위와 기세를 타고 용케 숨기고 있지만, 작게나마 틈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그 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여, 그 틈을 만드는 역할을 폐하께서 친히 하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하느니라. 지금이 아니라면, 그나마의 기회도 사라지게 될 터."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근위대장은 결국, 더 이상 황제의 판단을 바꿀 수 없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후 알렉시오스 2세는 자신을 호위하는 근위 기병과 잔존 카타프락토이 수 백 명을 모아 전방으로 돌격할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우리에게 승리는 없다! 전군, 돌격하라!"
백 여 년 전, 디라키온에서 알렉시오스 1세가 그러하였듯, 한 편의 반전극을 준비하는 알렉시오스 2세의 전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지난 화의 막바지에서, 치명적인 패배의 위기에 몰렸던 알렉시오스 2세.
[알렉시오스 2세 :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을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만 알렉시오스 2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언젠가는 딱 한 번 뿐인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를 지탱했습니다.
마침내, 보병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룸 술탄국의 병력이 전진하는 와중에 대열이 흐트러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알렉시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2세 : 이 때다! 이대로 단숨에 적 본진까지 밀고 들어간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중기병 전술 가운데 최강 전술이라 할 수 있는 분쇄 돌격을 띄우면서 룸 술탄국의 병력을 박살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순전히 운빨에 의한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좌우익, 중군이 동시에 밀리면 어지간해서는 역전이 안 나오거든요.
게다가 주인공인 알렉시오스 2세의 마셜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다보니 분쇄 돌격이 뜰 가능성은 오히려 낮은 편이었습니다.
이후, 위의 스샷에서 나오듯이 경기병의 Harass 전술까지 발동하면서 룸 술탄국의 병력은 그대로 모랄빵이 나고 맙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극적으로 승리로 장식한 알렉시오스 2세.
그러나 룸 술탄국과 혼인 동맹을 맺고 있었던 압바스 가문이 전쟁에 끼어들자, 그는 각개격파를 위해 먼저 적 원군을 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하필이면 압바스 놈들이 끼어들 줄은... 투르크의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시일이 걸리니 그 전에 원군을 처리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킬리키아에 이르는 먼 길을 쉬지 않고 행군한 압바스의 병력은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윽고 알렉시오스 2세는 다시금 모여든 룸 술탄국을 아르메니아의 복잡한 산악 지형으로 끌어들여서는,
[알렉시오스 2세 : 이겨도 이겨도 끝이 없구나. 이대로 가면 전쟁이 꽤나 길어지겠는걸...]
다시금 룸 술탄국의 주력을 격파합니다.
하지만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산지에서의 싸움이 거듭되다보니 로마 측 병력의 소모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전쟁 승리 점수 75점은 채웠으되, 점령 점수 25점을 뚫지 못해 확실한 승리 선언을 하기 어려운 상황.
이쯤에서 알렉시오스 2세는 전쟁이 났음에도 여전히 흑자 재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 과감한 수를 선택합니다.
[별의 용병단 단장 : 급료만 잘 주신다면야, 저희 용병들은 얼마든지 함께 싸워드릴 따름입죠. 흐흐흐...]
고용 비용이 꽤 비싸기는 한데, 어차피 얘네들은 공성 점수 따기 위해 성벽에 닥돌시킬 예정이라 별로 부담도 없습니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에서 배 띄워서 킬리키아로 보내기까지의 시일이 은근히 걸리는 관계로...
[알렉시오스 2세 : 짐은 애초부터 유대인들의 돈을 빌려쓰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도다. 어차피 돈은 돌고 도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유대인들로부터 긴급 대출을 받습니다. 어차피 로마는 부유한지라, 전쟁만 끝나면 대출금 금방 다 갚고도 남습니다.
다른 영주가 유대인 대출을 받으면 사채 쓴거나 마찬가지이지만, 로마가 대출 받으면 신용카드 잠깐 긁은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유대인 찬스도 썼겠다, 빠른 승리가 필요해진 알렉시오스 2세는 바퀴벌레급 생명력을 자랑하는 룸 술탄국 주력을 다시 한 번 박살내줍니다.
[알렉시오스 2세 : ...정말 지긋지긋한 것들 같으니라고.]
적의 끈질김에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세스코 뺨치는 퇴치력을 보여주는 알렉시오스 2세.
사실 이는 순전히, 도합 일만이 넘는 병력을 자랑하는 길멘 용병단이 룸 술탄국의 봉신으로 있는 탓이었습니다.
한 번 병력을 소모하면 다시 채우는데 시간이 걸리는 징집병과는 다르게, 용병단 병력은 금방금방 차오르니까요.
이러한 점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이미 룸 술탄국이 성립된 시점 이후의 시나리오부터는 얘들 상대하기가 엄청 힘든 편입니다.
예전에 도로시 님이 연대기는 때 룸 술탄국 봉신으로 시작하셔서 얘들 뒤통수 때리셨는데,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컨셉으로 한 번 플레이해 봤는데 반란 일으킬 때마다 바퀴벌레 같은 길멘 용병단 놈들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었는데요... 크;;;
어쨌든 적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는 것으로, 킬리키아를 둘러싼 로마-룸 술탄국 간 전쟁은 로마의 승전으로 끝맺음을 맞이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드디어... 킬리키아를 되찾았습니다, 아바마마.]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알렉시오스 2세는 본격적으로 군사 전술을 연구하고 무예를 연마하게 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로마의 황제는 무릇 언제든 전장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전장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가 로마의 황제로 군림할 경우,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역사가 말해주는 바입니다.
역대 최악의 황가 가운데 하나였던 두카스 가문의 경우, 황제들 모두가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것이 정권 붕괴의 발단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알렉시오스 2세는 두카스 황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이번 전쟁의 승리로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무(武)를 연마합니다.
그렇지만 이 노력의 결과가 빛을 발하는 첫 순간은, 공교롭게도 로마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이게 됩니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린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들, 마누엘 콤네노스가 공공연히 반(反) 알렉시오스 2세 세력을 끌어 모았기 때문이죠.
이대로 마누엘 콤네노스의 난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여긴 알렉시오스 2세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그대 아비의 자리를 내가 돌려받은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칼을 들어라!
내 지금 이 행위가 기존의 법도와는 맞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나, 그대가 정 원한다면 기회를 줘보는 수밖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를 공공연하게 처단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교묘하게 판을 깔아놓는 알렉시오스 2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들이지만, 그로부터 교활함을 이어받지는 못한 마누엘 콤네노스는 이 수작에 홀라당 넘어갑니다.
운 좋게 알렉시오스 2세를 결투로 죽일 수만 있다면 반대 세력의 지지도 있겠다, 자신이 황제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생각한거죠.
그러나 그는, 알렉시오스 2세가 몇 번의 사선을 넘으면서 이미 어엿한 전사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마누엘 콤네노스 : 폐하! 하, 한 번만 살려주시옵소서! 저희는 같은 가문, 한 핏줄을 타고 난 사이 아니옵니까! 부디 자비를... 끅...!]
[알렉시오스 2세 : 그따위 것에 연연하여 네 놈을 살려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칼을 뽑은 순간부터 그대는 베어야 할 역적이었으니.]
알렉시오스 2세는 '가문친족 살해자(Dynastic Kinslayer)'라는 불명예를 무릅쓰고 마누엘 콤네노스를 베어버리고 맙니다.
Holy Fury DLC에서, 친족살해자 트레잇이 더욱 세분화되었습니다.
살해한 대상이 플레이 캐릭터와 어떤 관계였는지에 따라 다른 칭호가 맺어지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먼 친척뻘을 죽이면 얻는 트레잇이 '가문친족 살해자(Dynastic Kinslayer)'입니다.
이전의 친족살해자 트레잇 그대로였다면 페널티가 꽤나 부담이 가는 수준이었을텐데, 가문친족 살해자 정도면 그래도 감당이 됩니다.
이 참에 눈에 거슬리는 클레임 갖고 있는 친족들을 정리하여, 크킹을 플레이하는 모두가 참된 중세를 즐기시길 바라겠습니다. 후후;;
이제 클레임만 믿고 멋모르고 까불던 것도 치워버렸겠다, 알렉시오스 2세는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기로 합니다.
[알렉시오스 2세 : 현재 아르파드 가문은 대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따라서 크로아티아 여왕과의 약혼은 언젠가 큰 힘이 될 터.]
크로아티아 여왕의 가문인 아르파드 가문의 직계 혈족이 멀지 않고, 또한 형제 자매가 없음을 눈여겨 본 알렉시오스 2세.
그는 이를 미래를 향한 포석으로 이용하고자, 자신의 후계자 콘스탄티노스와의 약혼을 제의합니다.
만약 콘스탄티노스와 여왕 사이에 아들이라도 태어난다면, 그 아이가 크로아티아 왕국의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동시에 콘스탄티노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될 아이이기도 하니, 수십 년 후의 로마는 합법적으로 크로아티아를 병합할 수 있겠네요.
기적적인 승리 이후, 로마를 아버지, 마누엘 대제 휘하에서와 마찬가지로 패권국으로 발돋움시키고자 하는 알렉시오스 2세.
그의 칼끝이 새로이 향하게 될 곳은 과연 어디가 될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요즘 롤판 스토브 리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멘탈 깨질 것 같네요.
KT야, 제발 행복 회로 좀 돌리게 영입 소식 보여다오... 킅디디... 제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