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이머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프로리그에서 데뷔전에 고참 게이머를 박살내는 경우도 있고,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인상적인 성적을 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래구, 박수호가 처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그가 아직 한 번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시절, 최초로 래더 점수 4000점을 돌파했을 때였습니다. 지금보다 래더 시즌의 주기도 짧았고 리그도 세분화 되어있지 않았던 탓에 선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훌륭한 척도가 점수였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고수 소리 듣던 사람들 중 자기 이름을 딴 빌드 하나쯤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는 또 ‘동래구식 업링 빌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예선 성적이 무척이나 저조해서 2010년이 지나 오픈시즌이 끝나고 11년 중반이 다 되어 갈 때도 우리는 동래구를 개인리그 본선에서 볼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처음 방송 무대에 나온 것은 개인리그 사이 단기 팀리그였던 GSTL에서였습니다. 처음부터 프라임과의 대장전에서 이정훈을 꺾으면서 등장하고, 4강 oGs와의 일전에서도 중견으로 나와 3킬로 마무리, 결승전에서도 비록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김동원을 상대로 벌인 역전극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명이 허명이 아님을 각인시켰습니다. 슬레이어스 대 MVP 9세트 대 문성원 전은 박수호와 문성원 사이의 새로운 라이벌 구도로 사람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는 불타오른 팬들의 실망만 가중시킬 따름이었는데, MLG 애너하임에 참가하여 치고 올라갔지만 정종현-문성원에게 패배하며 5위로 당시 해외대회 상위권 선수들에게 배부되던 코드 S 시드를 간발의 차로 놓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마침내 예선을 뚫고 코드 A에 진입했지만 허망하게 다시 예선으로 내려가고 맙니다. 하지만 박수호는 좌절하지 않고 MLG 롤리에 다시 한 번 참여, 3위의 성적으로 코드 S 시드를 받고 귀국합니다. 비록 첫 코드 S 무대는 16강에서 미끄러졌지만, 그 간의 경험으로 방송 무대 적응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곧이어 IEM 뉴욕을 우승, 연말 블리자드 컵의 참가권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그 블리자드 컵에서 여태껏 조금씩 생겨났던 거품설을 종식시키려는 듯 그 해의 우승자, 준우승자들만 모아놓은 곳에서 그 선수들을 하나씩 꺾으며 결승으로 올라가, 다시 문성원과 만나 풀 세트 접전을 벌였습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쳐 당해 최고의 선수 자리는 문성원에게 내주었지만, 당시 임재덕의 뒤를 이을 차세대 저그 최강의 자리를 넘볼 자격이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 그는 첫 시즌에 바로 코드 S를 우승하며 자신이 이제 최강의 저그라고 세계에 널리 알렸고, 프로게이머로서 더욱 높이 도약했습니다. 당시 북미 리그인 MLG 다섯 개의 시즌에 참가해 두 번의 준우승과 두 번의 우승을 거머쥐고, 스타리그마저도 결승에 올라가며 자신의 위치를 보다 확고히 했습니다. 이제 저그 선수를 꼽으라면 항상 가장 먼저 손에 꼽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승 이후 GSL에서의 성적은 오히려 썩 만족스럽지 못했고, 4강을 한 번 찍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16강에서 전전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승현(조작범)의 우승에 박수호의 빛이 바랬고, 연말 강철 오징어 대회와 블리자드 컵에서 연이어 이승현(조작범)에게 패배함으로써 잠깐 왕의 자리에 등극했더라도 결국 2012년 최고의 저그, 최고의 선수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해 군단의 심장에서도 박수호는 여러 대회에 참가하여 꾸준히 어느 정도의 성적은 내었으나, 우승컵을 들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한 번, 비(非) 프리미어 대회 우승을 차지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대 이신형 전이나 대 김준호 전에서 결승급 경기력이라고 극찬을 받으며 기세를 뽐내다가도, 바로 다음 라운드에 귀신같이 졸전으로 탈락하기가 일쑤였죠. 해외 저그 게이머 스칼렛의 부종 프로토스에 패배하는 굴욕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꾸준했고, 그 꾸준함은 14연속 코드 S 잔류라는 대기록으로 나타납니다. 그 기록은 8강에서 이신형에게 패배하고, 리그 개편으로 인해 시드권이 사라지면서 끊기게 됩니다. 국내에서의 긴 프로 생활을 경험한 동래구는 이제 신동원, 최성훈과 같이 해외 WCS에 참여하고 싶어했으나, 지역 락 탓에 실패하고 다시 국내 무대로 돌아옵니다. 공허의 유산에서도 박수호는 두 GSL 시즌 모두 본선에는 올라갔으나, 높은 성적은 내지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호라는 이름과 함께 떠올리는 것은 공격적인 뮤링링 운영일 겁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뮤링링 체제는 비록 수많은 저그들이 사용해왔지만, 박수호의 뮤링링 만큼은 세간의 예측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었죠. 그의 손길에는 장인의 정신이 묻어 있어서, 이미 대세가 감링으로 넘어간 뒤에도 곧잘 뮤링링을 꺼내들었으며, 곧잘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 뮤링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남달라 군단의 심장 초창기, 모든 저그가 테란을 상대로 허덕일 때, 지뢰를 상대로 산개를 하며 유리한 교전을 유도하는 개념을 그 강력한 이신형을 상대로 보여주며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죠.
그의 호전적인 스타일은 테란전에만 그치지 않고 토스전 역시 초반부터 바링을 짜내서 몰아치면서 시작하는 플레이를 즐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공격으로 주도권을 지어야만 빛이 나는 플레이어는 아니었고, 오히려 사람들이 더욱 주목했던 것은 그의 초반 압박을 버터내는 수비력이었습니다. 그 어떤 플레이어가 압박을 와도 뚫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폭압적인 중반 운영으로 역전해내는 플레이는 피를 끓게 만드는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후반 군락 운영이 그의 아킬레스 건이었죠. 기존 체제의 한계와 무감타 체제의 강력함을 알게 된 저그들이 감링에 이은 빠른 군락으로 수비적인 전략을 들고 나왔을 때 그의 전성기도 끝났습니다. 그 역시 노력하는 프로의 한 사람이라 엄청난 연습량으로 장기전 명경기를 수많이 만들어내었지만, 타고난 성향은 어쩔 수 없는지 그런 경기들은 명경기의 희생자가 되기 일쑤였죠.
그는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팀리퀴드에서 작년 초에 게시했던 “역대 최고의 선수들” 리스트에서도 다른 ‘최고의 선수들’에게 밀려 14위에 올랐을 뿐입니다. 최강의 계보를 따라가자면, 임재덕과 이승현(조작범)의 정통 후계 사이 잠깐 빈 왕좌에 앉아있던 선수였습니다. 그는 다른 왕들처럼 기존 운영의 틀을 깨고 또다른 정석을 확립하지도 않았고, GSL 우승조차도 1회가 전부입니다. 허나, 그는 새로운 메타로 타 저그들을 선도하는 위엄 있는 적통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박수호는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해 오직 야심 하나로 계단을 기어 올라와 마침내 왕좌를 차지했던 위대한 서자였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뭇 사람들이 왕좌를 내놓으라 소리 지를 때도, 그는 스스로를 변화시켜 시대에 맞추기보단 그가 가진 능력을 더욱 갈고닦아 시대가 그에게 맞추도록 명령했던 압제적인 군주였습니다. 그의 그 오만함은 수많은 우승자들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따로 찾아내 연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박수호에게는 많은 명장면들과, GSL 우승과, 그리고 수많은 해외대회 우승들이 있지만, 저의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드림핵 발렌시아 인비테이셔널의 우승이었습니다. 비록 큰 규모의 상금이 아닌데다가 예선이 없이 오로지 초청으로만 이루어진 자그마한 대회였지만, 아직 그가 사람들에게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했던 시기에 저 홀로 새벽 내내 방 안에서 응원했던 대회라 기억에 남습니다. 새벽이 밝아오고 아침 해가 뜰 때, ThorZaIN 선수를 상대로 3:2 신승을 거두며 박수호 선수가 우승할 때 느꼈던 희열은 또 무슨 리그를 보며 느낄까 싶네요.
2012년, 전 이스포츠 최대 상금 규모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스타크래프트 2의 가장 찬란한 시기에 자신을 가장 찬란히 빛냈던 프로게이머 박수호 선수를 기억합니다.
업적 :
2011/06/18 LG 시네마 3D 스페셜 리그
우승 (3:2 김승철)
2011/08/28 MLG 릴로 3위 (1:2 최종환)
2011/09/17 드림핵 발렌시아 인비테이셔널
우승 (3:2 ThorZaIN)
2011/10/16 IEM 시즌 6 - 뉴욕
우승 (3:2 김원기)
2011/11/20 MLG 프로비던스 3위 (3:4 이동녕)
2011/12/17 2011 블리자드 컵 준우승 (3:4 문성원)
2012/02/26 2012 MLG 윈터 아레나 준우승 (2:4 이정훈)
2012/03/03 2012 GSL 시즌 1
우승 (4:2 정민수)
2012/03/25 2012 MLG 윈터 챔피언십 준우승 (2:5 이정훈)
2012/04/22 2012 MLG 스프링 아레나
우승 (4:3 이정훈)
2012/06/10 2012 MLG 스프링 챔피언십
우승 (3:1 양준식)
2012/07/19 2012 GSL 시즌 3 4강 (0:3 장민철)
2012/10/27 2012 온게임넷 스타리그 시즌 1 준우승 (1:4 정윤종)
2013/01/26 아이언 스퀴드 챕터 2 준우승 (3:4 이승현)
2013/12/01 IEM 시즌 8 - 싱가포르 4강 (0:3 김준호)
2014/08/10 2014 레드 불 배틀그라운드 글로벌
우승 (2:0 강민수)
명경기 :
2011 블리자드 컵 결승 7세트 (vs 문성원)
">
-------------------------------------
글 쓰는 재주는 없지만, 박수호 정도 되는 선수, 제가 정말 응원했던 선수가 입대를 하며 사실상의 은퇴를 하게 되는 데 기념문 하나 없이 보내는 것이 너무 아쉬워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