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37편
#1
다리 위로 이어진 계단은 곧 부서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인다. 그 계단을 진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두 사람은 눈을 떼지 않았다. 한강대교를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섬에 설치된 조명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푸른빛으로 변했다.
강민이 그 푸른빛 얼굴을 하고 오른팔을 올린다. 첫째 둘째 손가락만 펴고 있는 동작이 꼭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것 같다. 총이 쥐어지지 않은 빈 손이지만 마치 금방이라도 총성이 들릴 것처럼.
녀석은 나를 겨냥하고 있다.
그래, 어떤 면에선 나는 그 총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너도 인정할 거야. 내가 그 상황에서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면 의심받는 것은 나였어. '누구도 날 믿어 주지 않을 상황이었어', 이건 네가 잘 쓰는 말 아니냐?
내 말을 들었으니 너도 알겠지만 잡힐 범인이 아니었지. 그래서 난 자책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하지만 지금도 흰 티셔츠만 보면 내가 비굴해지는 느낌에 미칠 것 같아. 아직도 그게 그곳에 있어. 언제 경찰서에 전화가 갈 지 모르지, 나는 덫에 걸려 있어.
그 생각이 요환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민이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모두 폈다.
"두번 다시 형을 겨누지 않겠어. 정말 미안해."
그 푸른빛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갑자기 얼굴에 퍼져나간다.
"형을 의심한 날 이젠 용서해 줄는지 모르겠다."
"나도 날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누굴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런 말 하지 마. 연성이가 내려다보고 있어...... 그리고 아마 지금 형의 손을 잡아 주고 싶어할 거야."
연성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요환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한 사람의 게이머, 그 누구보다도 승리를 사랑했고 승리를 지키고 싶어했던, 그의 물량전 때문에 스타크래프트가 재미없어진다고 말하던 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나의 동료.
"내가 연성이 대신 잡아 줄께. 날 용서한다면 지금 내 손을,"
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환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형이 나를 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는다. 이제 나는 그를 덫에서 꺼내 주어야만 한다...... 한참 뒤 그가 고개를 들더니 다리를 건너 사라지는 진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2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듯한 며칠이 지났다.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진호는 사건 해결을 체념한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강민은 안심하지 않고 늘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딱히 달라졌다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숙소로 돌아온 후로 매일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목소리라도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갈 수 있지만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이 목소리가 큰 여성이었으므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누군지 몰라도 성격이 보통 드센 것 같지가 않다.
"휴대폰 수화음 맥시멈으로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저 녀석은 아직도 다 들리게 통화한다니까. 용호 너는 아냐? 뭐 하는 여잔데 진호가 매일 통화중이냐?"
"몰라. 그런데 형이 전화해서는 매번 성준이 잘 있냐고 병원엔 무슨 일 없냐고 물어보네. 뭐 그게 진짜 의도인 거 같진 않지만 말야."
"뭐야, 병원 사람이야? 진호녀석, 성준이 입원한 병원 의사인거면 진작에 나한테도 얘기할 것이지."
그 말을 한쪽 귀로 들었는지 진호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강민은 어느새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저만치 달아났다.
"강민 전화바꿨습니다. 안녕하세요? 좀 여쭤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앗, 그렇게 소리까지 지르시면서 좋아하실 필요는......이놈의 식지않는 인기 때문에 허허. 저기 성준이가 대체 뭐 때문에 쓰러진건지 정확히 알고 싶어서요. 아, 의사가 아니시라구요, 그럼 간호삽니까? 아직 학생이시라구요? 뭐 어쨌든 들은 게 있으니까 진호랑 연락하시는 걸텐데 저한테......"
진호는 체념한 채 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넉살도 좋지.
"그러지 마시고 아는대로 얘기해 주세요. 아니 아는 게 조금밖에 없으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명쾌한 답이 나온다는 거 모르십니까? 정확히 모른다고 해도 그냥 얘기해 주세요. 제가 진호랑 잘되게 팍팍 밀어드릴게요."
"이봐 깡만, 왜 남의 이름은 팔아먹어!"
"플루옥세틴이요? 뭡니까 그게. 음, 프로작,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요. 그리고 또 뭘 같이 먹어서 그렇게 된 겁니까? 무슨 마이드요?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까 줄줄이...... 오케이."
나한테도 모른다면서 절대 말해 주지 않았는데 민이에게 얘기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 그러면 둘다 본인이 일부러 먹었을 만한 약들이 아니고 더구나 같이 먹어서 문제가 되었다 이거죠? 그러면 말입니다, 이게 꼭 성준이 얘기란 건 아닌데, 그냥 성준이를 해치려는 A란 사람이 있다고 쳐봐요......"
강민은 진호의 서슬퍼런 눈초리를 외면하며 계속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부아가 치민 진호가 연신 문을 두드렸지만 민이 안에서 잠근 후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밖으로 나와 진호에게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도대체 무슨 대화가 오간 것일까? 진호와 용호 쪽은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폰을 꺼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욱아, 요환이형이 안 받는데 연습중이시냐? 되도록 빨리 전해, 누군지 알겠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던 진호가 연신 뭐라고 캐물었지만 민은 완전히 자기 세계에만 집중한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가더니 나중엔 마구 삑삑거렸다. 그는 흥분해 있었다.
"형 연습 끝나는 대로 전해......우리는 완전히 눈 뜨고 당했다고, 성준이를 볼 면목도 없다고!"
#3
2005년 9월 23일.
가을이 되면서 숙소에서 기승을 부리던 온갖 벌레들의 극성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긴 추석 연휴 동안 충분히 쉬고 다시 연습하려니 어깨와 허리가 더욱 뻣뻣하게 느껴진다. 한번이라도 허리를 펴려고 마당으로 나온 진호와 병민은 정석의 시범에 따라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분위기다 싶었더니 병민이 그리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처음 KTF왔을 때는 다들 범인 잡자는 얘기뿐이더니 이젠 아무도 사건들엔 관심 없나봐?"
정석이 그 말을 무시하고 병민의 엉터리 스트레칭 자세를 지적했다. 진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민이 말대로 곡괭이라도 들고 가서 동수형 집을 파보기 전까진 아무도 몰라. 누구누군 다 알고 복수극을 준비하고 있겠지만 나는 관심 끊기로 했어."
"그러면 한번 들고 가보지 곡괭이...... 숙소에 그런 건 없어도 삽은 몇 자루 있던데 그거라도."
스트레칭은 신경도 쓰지 않고 농담만 던지는 병민을 정석이 또 나무랐다. 진호는 이번엔 대꾸도 않으려다가 결국 한 마디 했다.
"그런 것도 있었냐. 누가 그거 들고 마당에서 삽질하던?"
"응. 누가 밤중에 마당 저쪽을 파고 있더라고."
"밥 해주시는 아주머니들이 김장도 하셨나?"
대화에서 소외된 정석이는 중얼중얼 디스크 예방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숙소로 들어가버린다. 병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한참동안 자세히 쳐다보았는데도 워낙 감쪽같았으므로 뭘 묻은 자리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병민은 삽을 가져오더니 그걸 들고서, 스트레칭 가르치는 정석의 동작을 코믹하게 흉내내기 시작했다.
#4
바로 그날 밤에 유달리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최근의 연패로 가슴이 답답해진 진호가 마당에 나가 담배를 꺼내 문 것도.
'김장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이왕이면 좀 풀지, 사먹는 김치에서 기생충 나왔다던데."
밤공기가 서늘하다. 이게 가을일까. 어릴 적에는 그 뒤에 겨울이 올 거라는 사실 때문에 가을을 두려워하곤 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섬뜩하지?'
진호는 마당을 서성이다가 병민이 가지고 놀던 삽을 집어들었다.
'한밤중에 김장독을 묻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그런 어처구니 없는 호기심 따위 스스로 덮어버렸겠지만 지금은 밤공기가 너무나 서늘하지 않는가.
첫 삽을 뜨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호기심이 점차 머릿속에서 끔찍하게 변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점점 그의 동작이 빨라진다. 삽이 딱딱한 무언가와 부딪치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지자 그의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삽을 멀리 던져버리고 허리를 숙여 신문지에 싸인 길다란 물체를 집어들었다. 둘둘 감긴 신문지를 풀어보자 차가운 느낌이 손에 닿았다.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그 차가운 느낌 때문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둠 속에서 조금이나마 자세히 볼까 하여 얼굴 근처로 가져가 보니 놀랍게도 피 냄새가 확 끼쳐온다. 두렵다. 이, 이건!
<"그냥 두껍고 뾰족한 거였어요. 칼도 아니고, 연장 같지도 않고, 쇠인 것 같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고...... 30센티는 넘었어요.">
그 순간에 떠오른 것이 바로 경찰서에서 요환이 진술했던 말이었다. 이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써 그것을 쥐어 보았다. 전혀 두껍지가 않았다. 막대기라기보다는 가느다란 꼬챙이랄까, 길이는 30센티가 좀 안 되는 것도 같다. 미칠 지경이었다. 이 물건이 도대체 왜 우리 숙소 마당에 파묻혀 있는 거야?
진호는 폰을 꺼내서 액정 불빛으로 대충 비춰보았다. 지문이라고 하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놓고 떡하니 찍혀 있는 붉은 자국. 이 일급의 증거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이걸 가져다가 여기에 묻은거야!'
발이 땅에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들리지가 않았다. 경악. 공포. 배신감. 의혹.
'누구야, 대체 누가, 어떻게 이걸 가져온 거야...... 혹시 범인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는 상황이 더욱 끔찍해진다. 진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그가 숙소 쪽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꽈앙-
뒤통수에 금속성의 물체가 부딪는 소리가 단 한 번 울렸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삽은 누군가의 손이 풀림과 함께 허탈하게 떨어져 나뒹굴었다.
※작가 코멘트
이번 편이 짧은 것은 이번 주 수요일 밤 11시 안에 38편이(<지상 최후의 넥서스>2편도 함께) 업데이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PGR 팬픽 공모에 도전하는 새로운 연재소설 <지상 최후의 넥서스>.
10~12부작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한달 동안 연재하여 12월 11일에 완결될 것입니다.
(<지상 최후의 넥서스>는 <왜 그는 임요환부터...?>의 주인공 세 명 외에도 이윤열, 서지훈 선수까지 다섯 명의 주인공이 나오게 됩니다.^^)
<왜 그는 임요환부터...?>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은 물론, 그 어떤 분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제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어서 쓰고 있습니다. <지상 최후의 넥서스> 1편, 꼭 읽어 주시고 좋은 반응 주셨으면 합니다. (아래 링크해놓았습니다.)
링크: 지상 최후의 넥서스 1편 새 창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