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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30 20:55
문학적 관점에서 아이러니는 두 개의 내적 화자가 작품 안에 공존하며 이중적인 시선으로 상호 비판 혹은 작품의 입체화를 수행하는 개념이고, 역설과는 비슷하지만 아이러니는 이중적인 시점에서 발생하는 의미적 모순을 다루는 데 반해 역설은 표층적인 부분 자체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거기에서 표현적 효과를 얻는 개념입니다만… 혹시 질문자께서 말씀하시는 모순이 역설을 의미하시는 거라면(ex:나는 기다릴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러한 개념 정도로 정리하시면 될 듯합니다만.
08/04/30 21:12
아이러니는 보통 뭔가 기대했던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로 일어난다는것을 뜻하구요.
모순은 그 자체로 말이 논리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문학코스 한개 들은 이과생의 자세.
08/04/30 21:27
아이러니는 정신분열과 깊은 관계가 있지요. 두 개의 내적 화자가 작품 안에 공존하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이러니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예 중 하나는 <햄릿>이죠. 분명히 복수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왜 하지 못할까? 염상섭의 <두 파산>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옥임이는 분명히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결과는 '성격 파산'입니다. 두 개의 내적 화자가 '옥임'이라는 개인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예전에 발표 자료로 쓴 글인데, 도움이 되시길 비며 올려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옥임이다. 그녀는 이십대까지만 해도 ‘셰익스피어 원서를 끼고 다니고,「인형의 집」에 신나하는’ 등의 낭만적인 태도를 보이는 신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삼십년 친구에게 빚 독촉을 해대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기까지 하는 몰염치한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을 보인다. 무엇이 옥임을 이토록 변하게 만들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지닌 ‘불안’을 이해해야 한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서문에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지도 삼아 나아갈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옥임의 ‘불안’은 바로 더 이상 지도로 삼을 ‘별’이 없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별’이라 함은 개인의 사고나 행동에 준거가 되어줄 수 있는 관습이나 도덕, 규범을 의미한다.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개별자들의 삶을 규정하는 초월적 진리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초월적 진리가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삶을 영위했고, 그러한 삶이 올바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초월적 진리에 대한 믿음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의 죽음이 선언되고, 개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다. 그리고 각 개별자들은 비로소 근대적 주체로 거듭난다. 그러나 자유를 획득한 대가로 근대적 주체의 내면에는 불안이 자리 잡게 되었다. 어떠한 예언적, 초월적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미래에 대해 확고하게 전망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근대적 주체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삶의 순간들마다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선택들은 긍정적인 미래를 가져올 수도, 부정적인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이 부정적인 미래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은 근대적 주체에게 커다란 불안으로 작동한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전망이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불안에 떠는 근대적 주체의 내면에서는 ‘자기보존본능’이 어느 때보다 강렬해진다. 옥임은 과거에 도쿄에서 유학을 하는 이른바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유연애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이는 당대의 분위기 혹은 옥임 자신에게 계몽적인 비전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제 시장의 법칙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과거처럼 윤리를 잘 지키거나 덕이 있는 사람 혹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이익을 잘 따지고 효율성을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 된다. 이때 옥임은 정례 모친처럼 겉으로만 시장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 기존의 자신의 가치관을 배반하고 늙은 도지사의 후실이 된다.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그녀는 ‘도지사 대감의 실내 마님으로 떠받들려 호강을 하고, 아이도 낳지 않고, 세상 고생과도 무관해’보이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옥임이 이러한 삶에 완전히 만족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옥임이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대가로, ‘젊고 잘생긴 서방’과 ‘쭉쭉 뽑아놓은 자식들’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처음에는 이러한 기회비용에 비해, 도지사의 후실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더 컸기 때문에 기회비용의 존재를 망각한다. ‘결혼을 처음 했을 시절’이나 ‘도지사 관사에 드나들던 시절’의 옥임의 눈에, 정례 모친과 정례 부친은 ‘어디 존재도 안 하던 위인’들이었다. 그러던 중 ‘처지가 바뀌어서’ 도지사였던 남편이 반민자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다. 시장의 법칙에 야합하여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선택이 오히려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다. 앞서 말했다시피 정례 모친의 경우에는 시장의 세계의 법칙을 준수하면서도 이것이 내면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옥임의 경우는 앞장서서 그것을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불안은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다. ‘도지사’라는 직함을 가진 남편이 자신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 믿어 선택했지만, 그 기대는 배반당한다. 이로 인한 불안은 그녀가 극도의 자기보존본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그녀는 불안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더욱 악랄해지는 전략을 택한다. 이미 시장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불안을 야기하는 변수를 철저히 줄이고 승자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교장과 수작을 하여 정례 모친의 문구점을 넘긴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제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지 ‘체면’이나 ‘우정’과 같은 전근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철저하게 ‘돈’을 추구하는 그녀의 마음에 균열이 생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례 모친 때문이다. 정례 모친은 지금까지 자신과 비교의 대상이 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위기의 순간에 봉착하자 정례 모친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그녀는 젊고 신수가 훤한 호남자에, 조직부장이니 훈련부장이니 하며 정당 활동을 하는 남편을 두고 있다. 게다가 장성한 자식들이 셋이나 된다. 정례 모친은 옥임에게 그녀가 이해관계를 따르기 위해 과거에 지불했던 기회비용을 상기시킨다. 옥임은 나름의 분별력을 발휘하여 늙은 도지사 남편을 선택했으나, 그 남편은 반민자로 처형될 위기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들의 가치가 눈에 들어오니 옥임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옥임이 정례모친에 대해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게끔 만든다. 소설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정례모친에게 빚을 갚으라며 소란을 피운다. 그녀는 그것이 ‘반드시 정례 어머니에 대한 악감정은 아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은연중의 시기였고, 공연한 자기화풀이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옥임이 지니는 질투와 시기심이 불러오는 효과이다. 과거의 소설에서 ‘질투와 시기심’과 같은 감정은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구축된 근대의 질서를 교란하는 기제로 등장했다. 따라서 과실과 징벌의 구조에 따라, 지나친 ‘질투와 시기심’을 부린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주어졌다. (예를 들어, <감자>에서 복녀는 왕서방에게 강짜를 부렸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두 파산>의 옥임이는 ‘질투심’을 품은 결과 오히려 더 이해관계에 몰두하게 된다. 소설에서 옥임이는 히스테릭한 감정을 ‘빚 독촉’의 형태로 풀어내고, 이로 인해 정례 모친은 결국 빚을 청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두 파산>에서만이 아니라, 시장의 질서가 완전한 지배력을 갖게 된 현대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질투와 시기심’까지도 교환의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질투’는 자본주의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동력 중 하나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현대에는 질투심 유발이 ‘구매 행위’를 부추기는 반면에, 소설 속에서는 ‘독촉 행위’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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