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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24 11:18
원래 지금의 소주가 명나라의 수도였다가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켜서 그 중심지로 삼은게 자기 봉지였던 북경아니었던가요? 그후로 그냥 쭉 이어졌던걸로;;
11/04/24 11:43
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도 멸망후 황폐해졌고(그래서 태조왕건이 '옛 영광은 어디가고 잡초만 무성하니'했다죠) 천년도읍 서라벌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후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죠. 중원지역도 당나라가 망하고 도읍을 옮기면서 그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봐야죠.
11/04/24 11:44
기후적인 영향도 생각보다 큽니다. 기온의 상승이 초원지역의 건조화를 늪과 소택 지역이 농경에 좋은 지역이 됩니다.
대략 여러 역사적 요인이 있긴 하지만 중원과 관중의 생산량이 강남에 비해 떨어지는 시기와 유럽에서 남부 유럽의 농업 생산량이 서유럽의 농업 생산량에 뒤쳐지는 시기가 대략 겹칩니다. 중원의 몰락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북경은 좀 다른게 좀 정치적인 이유가 강하죠. 모두 근거지에 가까운 교통의 요지 때문에 명(연왕 주체가 영락제가 되면 자기 근거 지로 옮긴 겁니다.) 원(몽골에 가까죠.) 청(만주에 가깝습니다.) 연경(북경)으로 정한게 아닌 가 싶습니다.
11/04/24 11:51
대충검색해 보니까, 당나라 장안은 수백만명이 사는 엄청난 대도시였다고 하네요.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위해서는 엄청난 식량이 필요했는데 관중지방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대운하를 통해 강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수송했었죠. 근데 안사의 난이 일어나서 대운하가 막히고 식량공급이 끊어지면서 대규모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그로인해 급격한 몰락을 겪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11/04/24 12:34
기존의 중심지였던 중원, 관중 일대는 수당시대에 이미 지력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채집생활만으로도 정착문명 건국이 가능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목을 잡은 토양의 염화가 나타나기 시작한거죠. 생산력이 계속 정체된 상태다 보니 당 후기에 접어들면 사실상 강남의 물자로 정부가 지탱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오히려 이것때문에 당이 오래 버티기도 했습니다. 황소의 난 이전까지 강남은 당에 충성했고 북중국 일대의 절도사들이 죄다 반기를 들었을때도 강남의 물자로 이를 막고 진압했죠.)
이 과정에서 장안, 낙양 일대는 사실상 경제적 중요성을 상실하고 정치적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고, 당이 망하면서 그 정치적 상징성도 상실하면서 몰락합니다. 대신 강남의 물자를 북중국으로 가져오는 중간기착지인 개봉, 북경이 당 후기가 되면 이미 경제적 중심지로써 기능하게 되었고, 정치적 중심으로의 역할은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된 거죠.
11/04/24 12:37
제 생각으로는 북경이 이민족(만주족,몽고족)의 땅과 가까운것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전에는 이민족과 너무 가까워서 변방취급되었지만,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게 된 원나라,청나라때는 되려 본거지와 가까워서 더 좋았던거죠.
11/04/24 13:24
전에도 비슷한 답글을 적은적이 있는데
제가 읽었던 중국측 저서에서는 위의 몇몇분이 지적했듯이 기후변화와 지력의 한계였다고 합니다. 낙양과 장안 개봉은 공통적으로 황하의 중류지역으로 이지역은 모두 중부 황토고원지대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실재 고고학적 발굴조사에서도 나온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황량한 풀한포기 보기힘든 그런 척박한 땅이 됬지만 이 중부황토고원지대는 당나라까지만 해도 수목이 우거지고 산림으로 가득했던 녹초지였다고 합니다. 허나 인구의 과중과 연이은 전란 그리고 무엇보다 산림과 자원 자연에 대한 무지로 무분별하게 벌채와 개간이 이어지면서 이 지역은 완전히 헐벗은 땅이 되버렸고 이는 자연히 인구이탈 그리고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중원이라는 중국 문명의 발원지 위상을 상실하게된 요인이라고 합니다. 실재 중부황토고원지대의 무분별한 벌채,개간이 얼마나 심각했냐는 송나라시절 개봉이 한겨울 밀어닥친 대홍수로 수십만이 사망했다고 하지요
11/04/24 14:19
지난 질문에도 이번 질문과 똑같은 정답인 댓글들이 많았는데 같은 질문은...
중국대륙 내부 같이 강수량도 풍부하지 않은 지역에서, 근대적 윤작 기법 없이 농사를 지속적으로 짓는 경우에는 지력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메소포타미아, 인더스, 나일 중류 등등) 황하의 홍수가 지력을 보충한다고 해도 강수량이 부족한 경우 토지의 염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농업은 한계에 부딪혔고 중원은 황폐화 됩니다. (후한말 삼국지 시대 쯤...) 이런 지력의 황폐화는 인구 감소 등을 불러오고 외침에 대한 내성도 떨어뜨려 결국 북방유목민족의 침략과 점령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한족이 강남으로 생활권을 확대하는 건, 유목민족의 침략에 따란 결과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겁니다. 지금이 북경이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지역이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때부터 대도시로 수도나 물산 집산지로 기능했고, 후에 북방민족이 침략할 때도 (5대-요-금-원) 그 북방민족들의 수도나 대도시의 위치를 유지했고, 명나라가 건국 된 뒤에는 위엣 분들이 답글 달아주신 대로 연왕의 근거지 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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