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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18 14:46
누가 어떻게 사회에 기여를 하는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가 문제일텐데
세금 측면에서 보면 세금 내는 총 액수도, 소득대비 비율도 더 많이 내니 더 기여한다고 볼 수도 이겠지요
16/08/18 14:52
본문에 언급했던 낙수효과 반론은 이하를 참조했습니다: http://cafe.naver.com/anywhereis/12124
그리고 사회학 전공한 분들은 파이가 무한대가 아님을 강조하더군요. 성장한계점이란 것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요.
16/08/18 14:58
복붙합니다.
**************************************************** 책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자유시장 경제학을 정당화하는 것이 ‘낙수 효과’(적하 효과) 인데, 이것에 의혹을 제기하고 이것이 거짓이라는 주장으로 먼저 시작합니다 =============================== trickle down (트리클 다운)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경제이론 ======================== 널리 알려지고 식상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여러 사례들을 들고 있습니다. 불평등 사례들. 그래도 한번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대략적으로 전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된다. 세계개발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최상위 1퍼센트의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 국제노동기구의 추산에 따르면 세계 인구 중 30억 명이 하루 2달러(미국 달러)로 정해져 있는 빈곤선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의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의 총합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산계급들의 ‘프리카리아트’로의 전락하고 있다. 프리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로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파견직/실업자/노숙자들을 총칭한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등장한 신노동자 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2003년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영구기관 =perpetual mobile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작동한다는 가상적인 기계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것이 사회적 불평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두 번째 출발점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불평등은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에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일자리 창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늘 정당화되어 왔지만, 2008년과 2009년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꼭대기에 있는 친구들이 경제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가면서도 수억 달러를 손쉽게 챙기는 것을 보았다’ 꼭대기에 있는 친구들이 받은 보상을 그들이 사회에 공헌한 대가라는 식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그들은(꼭대기에 있는 친구들은) 새로운 일자리가 아니라 ‘정리해고된 사람들’의 줄을 늘리는데 공헌했다. 상위 10퍼센트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자들이 더 부유해짐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통설은 의도적인 거짓말고 고의적인 도덕적 맹목의 조합일 뿐이다. 부자들의 ‘희귀한 재능’이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부자들에게 엄청난 보수와 보너스를 지불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 (1) 엘리트주의가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이익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정의된 능력들을 고취시킴으로써만 촉진될 수 있으므로) (2) 배제는 정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며, 부에 대한 욕망은 삶의 향상에 이바지한다 (3) 이런 것들로 인해 초래되는 절망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거짓 믿음들은 거의 무심결에 앞뒤 생각없이 사회적 불평등에 굴복하는 우리의 습관에 기인한 집단적 빈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고 스스로 영속화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가운데 이 책에서 면밀히 검토할 것들만 몇 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기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소비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 (기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살 만한 삶의 가능성은 무엇보다 공식적인 ‘경제성장’수치에 달려있다는 확신이 최근에 널리 퍼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확고히 뿌리를 내렸는데,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확신이 인간에게 본유적인 것도 아니고, 그밖에 어떤 식으로건 ‘자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확신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 “밀물이 오면 모든 보트가 뜬다는 신화에 속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에 이익이 되게 작용한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실제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누구의 손이고 누가 그 손의 움직임을 조종하는지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은행과 자본 이동에 대한 <탈규제>(보이지 않는 손)는 부자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줄 최고의 착취 지역들로 자유롭게 이동함으로써 더 부유해지도록 한다. 일반 대중용으로 작성된 공식적 원고들은 <탈규제>를 모든 사람의 복지에 이르는 왕도로 제시한다. GNP통계가 ‘전체 부’의 증가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병행한다는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최고 부자 10명이 세계 5위 경제 대국인 프랑스의 경제규모와 거의 같다 - 2012.11.9.일 <가디언> 전반적으로 이러한 미래상(심화되는 불평등)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경제성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성장을 해도, <이미 압도적 다수이고 여전히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고 냉혹한 불평등과 더 불안정한 조건 및 더 많은 추락과 원통함과 모욕과 굴욕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이 이론(=낙수효과 이론)에 따르면, 그렇지 않을 경우( 최고 경영자들에게 많은 보수를 주지 않으면) ‘이른바 부의 창조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다른 데 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회사가 좋은 실적을 올려 이익을 취할 수 있었을 사람들이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 주요 인사들의 ‘매직 서클’에 진입한 사람들이 자기가 맡게 된 기업을 성공의 길로 이끌건 <파국으로 이끌건> 사실상 엄청난 액수의 보수를 받는 일은 드물지 않다. 최고 부자들이 사람들의 복지 증진에 기여하든 <기여하지 않든> 보수를 받을 권리는 보장된다. 공적서비스에 활용되는 게 아니라 <특권들을 보호>하는데 진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최고 경영자는 자신이 받는 소득에 걸맞는 수준의 실적을 올리건 말건 고소득을 독차지한다. 최고경영자의 주식 도박이 오판이었을 경우에 그들이 일자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직원들 중 일부는 생계를 잃고 생활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지만, 최고 경영자는 계약상 보장된 ‘고액 퇴직금’(= golden handshake)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 기업들이 수백만 달러를 잃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는 동안에 경영자들은 <스톡옵션>을 현금화했다 스톡옵션(stock option) : 회사가 임직원에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일정 수량의 자사 주식을 매입할 수 있도록 부여한 권한을 말한다. 따라서 스톡옵션을 받은 임직원은 자사 주식을 <사전에 정한 행사가격>으로 구입해 주가변동에 따른 차익을 얻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스톡옵션이 일반화되어 전문경영인의 경우 스톡옵션을 통해 본봉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부유한 경영자들은 회사를 그만두는 즉시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퇴직금을 받는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일괄 계약에 명시된 퇴직금은 회사의 재무 목표가 달성되건 (말건) 수익을 내건(말건) 지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월트디즈니사의 전 회장 마이클 오비츠가 받은 퇴직금은 1억 4천만달러(=대략 1400억원)가 넘었는데, 이는 디즈니사의 연간 총 순익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또한 맡고 있는 동안 마텔사(Mattel Inc.)의 주가가 50퍼센트 이상 떨어져 해고된 최고경영자 질 배러드는 회사로부터 4000만 달러(= 약 400억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1995년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루카스는 은행들과 신용-채권에서 비롯된 경제의 극적인 붕괴가 일어나기 불과 2년 전인 2003년, 금융시장의 탈규제를 <불황 예방이라는 중심 문제>의 ‘실질적 해결책’으로 제시한 바 있다)를 비롯한 많은 주요 경제학자들의 단언과는 반대로, 기존 부자들의 엄청난 소득은 ‘실물경제’(=생활에 필요한 재화의 생산 및 분배와 관련된 경제)에 재투자되지 않고 ‘실물경제’에의 기여에는 아무 관심도, 아무런 흥미도 없는 부자들의 매직 서클 내에 명목 화폐량을 재할당하는데 쓰였다. 현대 경제 이론은 <순수> 시장들이 더 광범위한 경제에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아무런 규제 없이 세계 경제에 마구잡이로 신용을 공급하는 결과로 금융업자들의 부는 늘어났지만, 그것은 ‘실물경제’를 질식시키는 활동의 확대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일자리의 신규창출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다. (금융기관과 신용 제공 기관들에 대한) 탈규제와 이 기관들의 주식회사로의 전환은 금융 산업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보수와 커미션과 보너스를 제공해주는 또 하나의 노다지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실물경제’에서 살고 일하는 수백만 <신용 대출자들>의 생계를 실물경제의 호황과 불황 앞에 방치해버리고, 안 그래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신용대출자들의 자산들을 더욱 <말라붙게> 만드는 노다지판이었다. 부자 나라들 내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은 ‘부정의’의 교의들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많은 부분에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에 노예 농장을 소유한 가족들은 노에에 대한 소유권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또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자연의 섭리’로 여겨진 적이 있었듯이, 많은 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너무나 커다란 부정의는 정상적인 경관의 일부일 뿐이다. <옮긴이의 말>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때로는 안다는 생각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경우가 있다. 불평등의 문제가 바로 그렇다 바우만에 따르면, 지금의 불평등은 이전의 불평등과 질적으로 다르다. 20 대 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명의 재산 총합과 같다. 0.1 대 99.9의 사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돌연변이다. 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종의 출현이다.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며,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없고, 불평등의 찬가, 현실 긍정의 찬가가 유행한다. 그것도 다름 아닌 불평등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된 일인가?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왜 불평등에 동의하는가? 바우만은 이 기이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그렇다고 거짓 믿음들을 버리기만 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현실의 힘, ‘운명’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거짓 믿음에 근거한 잘못된 선택이 바로 우리를 옥죄는 구조화된 현실을 만들고 공고히 하는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고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패배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바우만은 말한다. “패배했다는 것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무지 그리고/또는 무시로 인해 승리가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말이 패배한 자의 자기 합리화나 자기 위안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현실의 인질이 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스스로 만든 현실의 인질이 된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보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표현이라면 지나친 자학일까. 바우만은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할 것, 바로 이것이 바우만의 책을 번역하면서 새삼 떠올리게 된 교훈이다. 수사가 한갓 장식에 그치지 않는 글을 읽고 번역하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바우만은 수사가 현실의 새로운 면을 읽어내고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진실의 일단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ref.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 안규남 옮김. 동녘
16/08/18 15:53
사회 기여가 어떤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돈으로 치면 어느정도는 기여를 할탠대 다른 측면(음..사회발전??)에서 의문점이 드는건 사실이네요
16/08/18 17:21
그 고소득자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고소득자 1명이 수십 수백명의 저소득자의 수입이상을 가진다는건
옳다곤 보지 않네요.
16/08/19 10:56
고소득도 고소득 나름일 것 같네요. 가령 금융업계에서 돈놀이로 고소득을 올리거나 제품은 그저 그런데 다단계 사업으로 고소득을 올린다면 일종의 불공정거래가 아닐까요.
16/08/19 11:10
그런데 타커뮤니티를 보니 IMF를 몰고 온 조지 소로스도 사회에 순기능을 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으니, 무엇이 순기능이냐도 쉽진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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